시간이 멈추는 찻집 '카페세바'를 그리다

제주 선흘리 산책. 개미도 배 깔고 누워 힐링하던 카페를 손으로 그려봄

by 논이

작년 1월, 바다멍 때리며 서귀포에서 반 자연인처럼 3년을 살고 나니 조금 더 도시답고 문명의 이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제주시로 이사하고 싶어 졌을 때였습니다. 사이트로 매물을 알아보고 마침 괜찮아 보이는 집이 선흘리 부근에 있어 집 보러 가는 김에 선흘리에서 예쁘다고 소문이 난 '카페세바'에도 들르기로 했어요.


제주에 살며 좋았던 점 중 하나는 멀리 일이 있어 이동할 때 여행을 겸할 수 있어 소풍 가는 날처럼 설렘을 동시에 누리는 거였어요. 그날은 미세먼지가 심해 마스크를 쓰고 로터리에서 손님이 저뿐인 버스에 올라 창밖의 제주도 풍경을 한참 구경하고 나자 버스를 갈아타야 할 정류장에 다다랐어요. 다음 버스시간까지 30분은 기다려야 해서 근처 카페로 가 앤티크 찻잔에 대추와 잣이 뜬 생강차를 마시며 손을 녹였습니다. 값비싸 보이는 유럽풍 가구와 인테리어로 화려하게 꾸며진 리조트옆 카페라 찻값은 보통 카페보다 훨씬 비쌌지만 생강차는 입에 착착 감겼고 우아한 귀부인만 앉아야 할 것 같은 푸른 벨벳소파에 널브러져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구경을 하니 몸과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힐링이 됐어요. 1월 말의 겨울 정원은 식물들이 잠을 자며 서늘한 꿈을 꾸는 중이라 쓸쓸하고 황량한 분위기였지만 그 잿빛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릴 수가 없었어요. 예상과 계획에 없던 정류장 옆 카페에서의 휴식으로 상큼한 아침을 보내 기분이 좋아졌어요.


차를 다 마시고 일어나 버스정류장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마을버스 한 대가 정류장을 그냥 지나쳐 가는 게 보였어요. 바로 제가 타야 할 선흘리행 버스였죠.

'저거 놓치면 끝장이다!'

한 시간 더 기다리거나 택시를 타야 하기에 두 팔을 힘차게 휘저으며 미친 듯이 달려갔어요. 만화에서 도망갈 때 주로 표현하는 모기향 모양 다리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다행히 기사님이 괴성을 지르며 쌍수를 든 광녀를 발견하시고 차를 멈추셔서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습니다. 역시나 손님은 저 혼자였고요. 숨을 고르며 자리에 앉자 미소가 지어졌어요.

'또 초대형 택시를 탔군.'

가는 길에 보이는 창밖 풍경은 혼자보기 아까울 만큼 귀엽고 소박한 농촌뷰였어요. 가슴속에서 뭔가가 몽글거리며 입 밖으로 감탄사가 되어 튀어나왔어요. 동네가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제주도는 어딜 가든 예쁘고 좋지만 선흘리는 더 아기자기하면서 뭔가 달라 보였어요. 그래서 이 동네 할망들이 그림도 사랑스럽게 그리는가 싶었어요.


2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은 김소연 작가의 책 <할머니의 그림수업> 덕분에 선흘리라는 동네를 알게 됐어요. 제주시 선흘리에 사시는 할머니들이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행복한 소녀들로 변해가는 마법을 그린 책을 접하고 홀린 듯 저도 선흘리로 와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연예인 이효리 씨가 애월에서 선흘리로 이사해 산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제 몫까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마음속으로 빈 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귀포에서 계속 살았지만 꿈틀대는 역마살과 선흘리에 대한 환상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결국은 선흘리 근처의 집까지 보러 오게 된 것이었죠. 그 후 이효리 씨는 서울로 돌아갔다고 들었고 저도 결국은 제주시로 이사하지 않고 해외로 나와버리고 말았지만 제주시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요.


보러 간 집은 농가주택을 개조한 작은 독채로 새치를 그냥 둬 은발이 되기 직전인 진정한 자연인의 머리를 한 여인이 개 두 마리와 사는 집이었어요. 사진으로 본 것보다 작지만 밝고 아늑한 공간이었고 그의 푸근하고 선한 인상도 좋아 보여 살짝 고민한 뒤 더 생각해 보고 연락 주겠다 하고는 '카페세바'로 가는 버스를 타고 두어 정거장 지난 후 내려서 느리게 걸으며 고대하던 선흘리 동네 탐방을 시작했어요. 가보고 싶던 비건책방은 아직 문 열기 전이라 유리문에 아쉬운 표정으로 가득한 얼굴을 붙이고 컴컴한 내부를 구경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루 종일 영업하던 건 옛날방식인가 봅니다. 제주도에서 하루에 두세 시간 영업하거나 일주일에 나흘만 영업하는 곳을 자주 봤어요. Mon-Fri, 9 to 5는 이제 옛말인가 봐요. 제가 좋아하던 서귀포 카페 '식물집'은 일, 월, 화, 수, 목 영업했어요. 어쩌면 카페 사장님은 주말마다 제주도를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일지도 몰라요.


'카페세바'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작은 고등어 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 사이를 어슬렁 거리는 걸 발견해 야옹하고 불러 세운뒤 고양이 과자를 조금 뿌려주고 다시 길을 걸었어요. 제주도에 살 때 냥까까를 가방에 늘 넣어 다니며 길고양이 만나는 게 가장 큰 낙이었어요. 캣맘처럼 끼니를 챙겨주는 게 아니라 대단한 인심이랄 것도 없지만 냥이들이 그저 사료보다 조금은 맛 좋은 과자 한번 먹어보고 기분전환했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에요. 동물들도 감정이 있고 인간만큼 섬세하진 않더라도 미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서귀포에서 친하게 지내던 한 예민한 삼색고양이는 연어츄르를 짜주면 눈을 꼬옥 감고 맛을 진정으로 음미하며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을 짓곤 했어요.

'인간아 이게 바로 극락의 맛이로구냥!'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죠.



동백나무 아래 낮게 쌓인 돌담과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대문 위로 카페세바를 알리는 나무 간판이 보였어요.

'11-6'

7시간이나 영업을 하신다니 감개무량해졌어요. 카페사장님의 긴 노동시간을 축복하며 바스락바스락 밟히는 낙엽이 뒹구는 작은 옆마당을 지나 카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코끝을 스치는 기름난로 내음과 건조하고 따사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이 멀고 먼 서귀포에서 온 겨울나그네의 영혼까지 감싸주며 환대해 주는 것 같았어요. 통유리창이 있어 빛이 잘 드는 넓은 돌집을 자연스럽고 아늑하게 꾸며놓은 카페내부는 인터넷에서 본 사진보다 훨씬 예쁘고 아기자기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장님이 직접 지은 돌집이라고 해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나요.



카페 안은 한산했어요. 혼자 온 여자손님은 독서삼매경에 빠져 책에 거의 머리를 박고 있었고 사장님은 검은색 마스크를 쓴 채 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어요. 카페인에 취약한 몸이라 카모마일 티를 주문하려다 무설탕 유기농 감귤주스를 발견하고는 메뉴를 급히 바꾸고 쿠션이 여러 개 놓여 편해 보이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어요. 카페 한가운데 놓인 난로와 피아노 앞 유리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타고 오래된 재즈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 사색하고 책 읽으며 꿈꾸는 순간이 주어져 감사했어요.


주문한 감귤주스가 나와 목을 축이다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에 주스잔 옆을 보니 큰 개미 한 마리가 느린 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어요. 감귤맛 한번 보라고 주스 위에 꽂힌 로즈마리 장식을 꺼내 개미 근처에 놓았더니 개미는 잠시 신중모드에 돌입했다 금세 경계를 풀고는 로즈마리에 안테나를 세우고 다가가더니 딱 붙어버렸어요. 새콤 달달한 주스가 입맛에 맞았나 봐요. 집에서 들고 간 책을 읽으며 얼음이 그득한 주스를 마시느라 속이 꽁꽁 얼어붙을 즈음 개미는 단물을 다 빨아먹고 지쳤는지 로즈마리 곁에 멈춰 움직이질 않았어요. 자세히 보니 개미는 신기하게도 다리를 다 접고서 배를 깔고 아예 엎드려 자고 있었어요. 개미는 항상 바쁘게 움직인다고만 생각했는데 얘는 무늬만 개미인 배짱이과인지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어요. 한국인답지 않게 빨리빨리와 거리가 먼 저이기에 동질감이 느껴졌고 우린 그새 친구가 됐어요.

'얘도 쉬고 싶은 건가?'

무슨 힘든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지친 몸을 누인 채 쉬고 있었을까요?

IMG_5979.JPG 로즈마리 이파리 밑에서 쉬고 있던 개미. 다이어리 위에 펜으로 그려봄


난롯가에서 손도 녹이고 그림 그리고 책도 읽으며 한참을 죽치고 있다 집에 가려고 카페를 나올 때 보니 개미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어요. 푹 쉬고 다시 일하러 간 모양이에요. 개미가 최고의 휴식을 취했으리라 믿어요. 향긋한 로즈마리 나무 아래서 제주산 유기농 감귤주스 한 모금 마시고 스마트폰도 안보며 배 깔고 널브러져 진정한 휴식을 즐겼으니까요.




시간이 멈춘듯한 경험을 선사해 준 카페세바에 언젠가 다시 한번 들러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림으로 그려봤어요. 아늑하고 따스한 겨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보고 싶었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여름의 나라 발리에서였어요. 그래서인지 겨울 느낌은 별로 나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기엔 충분했답니다.





IMG_5964.jpeg 은근히 재미있는 지우개질. 복잡한 왼쪽 부엌구석을 그리기 귀찮아 현실도피의 일종인 지우개질을 먼저 해봅니다


IMG_5966.jpeg 한참을 밍기적거리다 간신히 부엌 구석에 토스트기, 커피포트 등을 얹고 난 뒤 밑그림 마무리합니다


IMG_5962.JPG 옅은 심 2F 연필로 밑그림을 살짝 그려준 뒤 워터프루프 펜으로 선명하게 긋고 말린 후 지우개질까지 끝내면 펜드로잉 완성


IMG_5981.JPG 옅은 갈색으로 나무 천장과 선반을 칠하며 채색 시작


IMG_5983.JPG 카페로 자리를 옮겨 채색하기도 합니다
IMG_5982.JPG Lemony Cafe, Ubud, Bali
IMG_5990.JPG 자잘한 도구들과 식기를 하나하나 채색할 때 시간이 너무 걸리고 좀이 쑤시지만 다 그리고 나면 뿌듯합니다. 아직 싱크대와 벽면이 덜 칠해져서 허옇네요


photo-output 16.jpeg '제주 카페세바' 아르쉬 수채화지(세목) 위에 혼합재료(피그마 마이크론 워터프루프 005,01 검정색, 홀베인 수채물감). 논이 그림 2025년



감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인스타그램 @nonichoiart 에서 만나보세요!






photo-output 14.jpeg Ubud, Bali



photo-output 13.jpeg Brighton, 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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