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거리 어느 집 앞 늦가을 풍경을 그려봤어요
'하논카페'는 서귀포 성당 입구에 자리한 찻집이에요.
전망이 아름다운 단골 '카페 준'에서 나와
점심을 먹으려고 중식당 '덕성원'으로 향하는 길에
하논카페를 우연히 접하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보고 놀랐지만
곧 무인카페라는 걸 알게 됐고
탐방을 시작했어요.
무인카페는 태어나 처음이라
호기심 그득한 눈으로
음료주문 기계를 살펴보고
곳곳에 인테리어 된 장식, 그림액자, 화분 등을
눈에 담아보았어요.
입구에서 더 들어가 보니
가게 왼쪽으로 별실이 있었는데
블라인드가 내려져 어두컴컴한 그곳은
박물관처럼 꾸며진 특별해 보이는 공간이었죠.
서귀포 성당 초대신부님이 입었던 옷이며
책들, 여러 가지 역사적인 물건들이
유리장식장 안에 모셔져 있는
성스러운 분위기의 공간이었습니다.
구경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제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든 것이 있었어요.
피아노였어요.
먼지 머금은 분홍색 조화 꽃바구니가 놓인
검은색 피아노 뚜껑을 열어 건반을 두드려보니
생각보다 음질이 좋았어요.
피아노 안친 지 5년이 되자
취미생활도 협소해지고
삶의 낙도 줄어든 기분에
의기소침해진 나날을 보내다 마주친 그 피아노 덕분에
행복한 생각을 하면
공중에 붕 떠오르던
메리포핀즈 속 이야기처럼
제 몸도 붕 떠오르듯
기쁨으로 차올랐어요.
그리고 1주일 후 악보를 챙겨 하논카페에 갔어요.
저번처럼 아무도 없기를 바랐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회색 수녀복을 다소곳이 차려입으신 수녀님 한분과
일반여성 두 분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죠.
딱히 목이 마르지도 않고
굳이 먹고 싶은 음료가 메뉴에 없어
제겐 사약과 다름없는 아메리카노 한잔을
가장 싸다는 이유로 시켜(1500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조금 읽고 있으니
여자 두 분이 카페에 입장해
수녀님 자리에 합류해서
총 다섯 명의 여인들이 대화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분들의 끊임없는 수다를 못 끊어
말 붙일 타이밍을 엿보다
끼어들기에 성공해 질문을 드렸어요.
“여기 운영하시는 분이신가요?”
모두들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셔서
피아노 쳐도 되냐고 여쭙자
수녀님이 흔쾌히 그러라고 하셨어요
.
그런데 민망해서
도저히 사람들이 듣는데 피아노를 칠 수는 없어
수녀님과 네 자매님들이 자리를 뜨길 기다렸어요.
그러나 금방 카페를 뜨실 줄 알았던 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가실 줄 모르셨고
수녀님은 점심으로
기차화통을 삶아드시고 오신 것처럼
목청이 실로 남다르셨어요.
웅변대회장에 온 것처럼
청각이 너덜거린 지 한 시간이 넘어가고
피아노칠 기회만 엿보며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수녀님의 목소리는 하이톤에 성량도 대단해서
마치 돌고래가 화통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어요.
단아, 차분, 이해, 초연, 겸손, 온화, 상냥…
어쩌면 제가 가지고 있던 수녀님에 대한
선입견을 던져버리라는
하나님의 계시일지도 몰랐어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수녀님은 굉장히 흥분한 채
큰 소리로 불만과 짜증 섞인 반말을
시종일관 유지하셨고
그에 비해 조용했던 나머지 네 분의 중년 자매님들은
수녀님의 기에 눌린 듯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가셨어요.
한 시간 넘게 고성방가를 듣다 보니
기운이 다 빠져 멍해져 있는데
드디어 그분들이 자리를 뜨셨어요.
악보를 챙겨 별실로 들어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의자를 잡아당겨 앉았어요.
5년 만에 쳐보는 피아노라
악보 없이 칠 수 있던 쉬운 곡도
떠듬떠듬 치기 시작하는데
발로 치는 것도 이보다는 잘 칠 것 같았죠.
물엿을 붓고 방치해 둔 것처럼
손가락이 다 굳은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몰입해서 계속 치다 보니
차차 예전 실력이 돌아왔어요.
아멜리에 주제곡을 치고 있는데
갑자기 웬 험상궂은 얼굴의 중년남자분이
제가 있는 별실로 씩씩하게 들어왔어요.
힘이 실린 눈을 부릅뜨고
별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저씨가 불편해
거리를 두려고 피아노 뚜껑을 닫고서 나와
제 자리로 돌아와 앉았어요.
잠시 후 아저씨가 나가시길래
다시 별실로 들어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아까 그 수녀님과 더 많은 자매님들이 아저씨와 함께
우르르 카페로 다시 들어오셨어요.
‘아 또 뭔 일들 이래?’
한 자매분께서 피아노 앞에 버티고 있던 제게
오후 다섯 시부터 별실에서 회의가 있으니
피아노를 그때까지만 치라고 하셨어요.
아직 삼십 분 넘게 시간이 남아있어 다행이었어요.
다시 피아노를 치는데 안경을 쓴 여자분이
제가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러 별실까지 들어오셔서
자신도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라고 하고는
곱지 않은 눈길을 제게 던지고 가셨어요.
아무래도 제가 그곳 피아노를 마음대로 치는 게
못마땅한 눈빛 같았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 순간 제겐
피아노 연습이 가장 중요했어요.
시간이 다 돼 악보를 챙겨 피아노 뚜껑을 닫고
별실을 나오자
수녀님께서 그 자매님께 화를 내고 계셨어요.
“아니 왜 피아노를 못 치게 해? 치는 게 어때서?”
알고 보니 아까 피아노 칠 때 와서 저를 째려본 분이 수녀님께
카페 이용자가 피아노를 못 치게 하자고 한 거예요.
그래서 수녀님은 그 큰 기차화통 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내비치셨고
어쩌다 보니 제 편이 되어주셔서 감사했어요.
카페 관리자인 아저씨도 웃으며
제게 피아노 연주 잘 들었다고 하셔서
쑥스러워 몸 둘 바를 몰랐어요.
험상궂은 줄만 알았는데
웃으시니 세상 훈훈한 분이셨죠.
“아깐 너무 시끄러웠죠?
미안해요. 제가 목소리가 좀 커요.”
수녀님께서 다가오셔서 정답게 말을 걸었어요.
자기소개를 하시며 꼭 한번 성당에 놀러 오라고 하시곤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데
돌고래처럼 어찌나 친화력이 좋으신지
저도 모르게 성당에 가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됐어요.
영업 좀 하시는 수녀님이셨죠.
그 후로 바빠져서 그곳에 다시 가진 못했지만
사진과 글과 그림 위에
소소한 추억으로 새겨졌어요.
서귀포 이중섭거리에서 가까운
하논카페와
서귀포성당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길 추천합니다.
서귀포성당을 그리려다 이중섭거리의 어느 집을 그려보았어요.
감사합니다.
더 많은 그림은
@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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