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내복 착용 필수로 날씨는 뼈 시리도록 악명 높지만 아름답고 묘한 매력을 지녀 한번 발 들여놓으면 떠나기 쉽지 않은 이 땅에도 드디어 봄이 오려는지 여기저기 꽃이 피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만 있을 줄 알았던 개나리는 한창 노랗게 피어나다 연둣빛 이파리들과 바통터치를 하고, 지금은 겹벚꽃, 튤립, 수선화가 눈길 닿는 곳마다 피어올라 예쁜 봄 풍경을 연출하는 중이에요. 영국을 대표하는 꽃으로는 장미(잉글랜드 상징), 엉겅퀴(스코틀랜드 상징), 붉은 양귀비(종전 기념 꽃), 수선화 등이 있고, 4~5월에 산과 들, 가든, 길가에 잡초처럼 피는 블루벨 또한 영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봄꽃으로 특히 온 숲 속에 빼곡히 잔뜩 핀 모습은 마치 푸른 꽃물결을 보는 듯 가히 환상적입니다.
스코틀랜드는 아니지만 요크셔 어느 숲 속에서 찍은 블루벨 물결 사진 2016년 봄
요정 같은 블루벨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며
푸르게 빛나는
종 모양 요정 블루벨
가녀린 줄기 위에
방울방울 맺힌 작은 파란 종들이
봄바람에 흔들리면
마치 연푸른 종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처럼
나를 꿈꾸게 한다
낯설지만 익숙한
나의 요정 블루벨
요정처럼 귀여운 블루벨 꽃에게서 영감을 받고 찬양하며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시를 쓰고(고맙다 브런치!), 블루벨 그림을 그리다 알게 된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황당해졌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요정들이 블루벨을 울리면 그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곧 죽게 된다는 얼토당토 한 미신이 있네요. 헐. 그럼 제가 쓴 시는 죽자고 쓴 시인가요? 죽음을 알려주는 공포의 종소리라니.. 어떻게 저 귀여운 꽃을 두고 그런 어둡고 광기 어린 미신을 지어낼 수가 있죠? 음산한 것들.. 그런데 저는 차라리 죽는 날을 미리 아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경건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고 저승사자도 마음 비운채 편히 맞이하고. 갑자기 유언도 없이 가는 것보단 낫다고 여겨지니 저 죽음의 종소리가 만약에 들린다면 고맙다고 할 것 같아요.
'고맙다. 가는 날도 알려주고. 친절하구나 블루벨.'
작자미상의 블루벨 요정그림. 우리나라 정서와 맞지않아 나체를 일부 가림.
그런 미친 미신 따윈 안 믿는 꽃에 미친 여자가 그린 블루벨 그림
동양에서 온 꽃에 미친 광녀를 홀리던 요정의 꽃 블루벨을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에든버러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 명소 중 한 곳인 Hermitage of Braid and Blackford Hill에서 걷다 이 블루벨 꽃을 발견하고는 심마니라도 된 것처럼 심봤다를 외쳤어요. 너무 예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심혈을 기울여 사진을 찍은 뒤 그림으로 남겨보기로 결심합니다.
꽃만 그리면 심심하니 그네 타는 요정도 그려 넣고, 얼마 전 수족관에서 구경한 물고기(Discus fish)와 파란 나비,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고양이도 살짝 올려보았어요. 토종 한국사람이지만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는 저를 천연덕스럽게 요정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전성기였던 아홉 살 즈음의 모습이라고 할게요(역변의 아이콘. 2차 성징 이후 역변에 역변을 거듭함. 커서 제일 많이 들은 소리가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됐니?'). 현재 요정이 되기엔 참담한 몰골이지만 그래도 이런 나라도 사랑해주어야겠기에 냉큼 축소시켜 그네 위에 앉히고 한복을 입혀놓으니 조금이나마 자기 위안이 됩니다. 그림으로나마 요정으로 영원히 남게 되어 행복해요. 한복까지 입고 있으니 자랑스럽고 그저 뿌듯합니다. 해외 나와 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지만 국뽕없이 객관적인 눈으로만 봐도 한복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래서 옆 나라가 그렇게 뺏고 싶어 안달인가요.
요정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면, 피터팬의 팅커벨, 해리포터의 요정들처럼 날개 달린 작은 사람 모습의 요정은 켈트족의 전설에서 전파되었어요. 다른 유럽 신화나 전설에서는 곤충 날개가 달린 요정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다고 하니 켈트의 문화를 여전히 품고 있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가 토종 요정 원산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토종과 외래종
300여 년 전 영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스페인 블루벨은 현재 영국 전역에 퍼져 토종꽃인 브리티시 블루벨의 수를 따라잡아 주인행세를 하며 온 산야와 들판에 피고 있어요. 아래의 세 블루벨 중 가장 왼쪽 숱 많은 애가 스페니쉬 블루벨이고, 중간은 토종과 외래종이 섞인 하이브리드 블루벨, 그리고 오른쪽이 토종 브리티시 블루벨입니다.
토종 블루벨은 향기가 아주 강하고 달콤한 반면 스페인 블루벨은 향이 하나도 나지 않아 생긴 건 비슷해도 토종이 가진 특별한 매력은 따라잡기 힘들어 보입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향도 없고, 저돌적인 생명력으로 토종을 몰아내고 있는 짝퉁 같은 스페인 블루벨이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하네요.
블루벨 꽃에 대해 알아가면서 토종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는 외래종을 접하니 토종민들레(하얀 민들레)를 몰아내고 우리나라 온 땅을 장악한 서양민들레(노란 민들레)가 떠오르며 씁쓸해졌습니다. 우리 생태계를 교란하는 외래종이 어서 빨리 숙청되길 바라고, 토종 브리티시 블루벨도 다시 자기 땅을 찾길 바라봅니다.
(노란 민들레 보시면 뿌리까지 쏙 뽑아 제거해주세요!노란 민들레도 김치로 담가 먹을 수 있으니 먹어서 해치웁시다. 뿌리까지 먹는 김치라 씀바귀나 고들빼기 같은 식감이에요.)
재미로 보는 봄꽃들의 꽃말 그리고 유래
흔히들 알고 있는 꽃말들이 국가나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영국의 것을 따른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시대에 꽃말(language of flowers) 또는 플로리오 그래피(floriography)는 꽃을 사용하거나 배열하면서 암호 통신의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나 상징을 꽃에 비유했습니다. 꽃의 언어가 매우 대중적이 된 빅토리아 시대에 관행이 번성했고, 꽃의 상징을 이용한 의사전달은 특히 로맨틱한 커플들 사이에서 자주 이루어졌습니다. 교육을 잘 받은 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의사소통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네요. 낭만적인 건 좋아요. 그런데, 아니 배울만큼 배운 인간들이 뚫린 입 놔두고 의사전달도 제대로 못했다니 답답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영국인들은 여전하네요. 제가 만나본 많은 영국인들은(특히 잉글랜드 출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 못하고 눈치 없는 사람은 못 알아듣게 빙~돌려 말하거나 싫은 것도 대놓고 싫다고 못하면서 입으로는 쉼 없이 "러블리 러블리" 합니다. ??? 싫은데 뭐가 사랑스러워? 섬나라 종특인가요, 일본인들과 성향이 많이 비슷해요. 물론 솔직하고 가식 없는 대화를 하는 영국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속마음을 대놓고 표현하지 않는 것을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사는 소심한 제가 영국에 와서 아주 직설적이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말 다했죠. 예의 갖추느라 고구마 입에 물고 살던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사람들을 위해 사이다 역할을 했던 꽃들이 암호 전달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식 꽃말 한번 알아볼까요?
Bluebell 블루벨
Usually, bluebell flowers symbolize gratitude and humility. However, they can also symbolize constancy and everlasting love.
일반적으로, 블루벨 꽃은 감사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뜻하기도 합니다.
*Gratitude : the quality of being thankful
*Humility : the quality of having a modest or low view of one's importance
*Constancy : the quality of being faithful and dependable
*Everlasting : lasting forever or a very long time
Golden bell or Forsythia 개나리
Forsythia is a symbol of anticipation.
개나리의 꽃말은 기대입니다.
*Anticipation : the action of anticipating something; expectation or prediction
Daffodil 수선화
The daffodil symbolizes rebirth and new beginnings.
수선화는 새로 태어나다, 새로 시작하다를 상징합니다.
*Rebirth : the process of being reincarnated or born again
Tulip 튤립
The meaning of tulips is generally perfect love.
Red tulips are most strongly associated with true love.
White tulips have a meaning of forgiveness, respect, purity and honour.
튤립은 일반적으로 완벽한 사랑을 뜻합니다.
빨간 튤립은 진정한 사랑과 아주 강하게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하얀 튤립은 용서, 존경, 순수함 그리고 영광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Fssociated with : in connection with or together with
*Respect : a feeling of deep admiration for someone or something
*Purity : cleanness, clearness
*Honour : high respect; great esteem
봄꽃 중 가장 좋아하는 튤립♡
영어단어를 공부할 때 영영사전으로 뜻을 익혀보세요. 시간은 걸려도 훨씬 효과적입니다. 계속 영영사전으로 단어를 익히다 보면 어느새 영어실력이 향상되어 있는 뇌를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5월 초에 써놓은 글을 한 달 후인 이제야 내놓습니다. 6월이 되자 블루벨을 비롯한 봄꽃들은 서서히 지고, 20도를 웃도는 경이로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어요. 향기로운 초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