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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Aug 20. 2020

집시 화가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세계를 유랑하는 그림쟁이의 첫 영국 도전기

잉글랜드, 뉴질랜드, 호주, 프랑스, 스코틀랜드에서 지낸 나날들을 모두 더하면 올해로 10년이 됩니다. 단기로 아일랜드(입주 화가 프로그램으로 한 달)와 스위스(자원봉사와 하우스시팅 5개월)에서도 지내봤으니 이만하면 집시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네요. 돌이켜보면 왜 이리도 역마살이 잔뜩 꼈는지 헛웃음부터 나오지만,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영혼까지 털린 보증 서기로 인생에 굴곡이 많으셨던 부모님 덕에 어릴 때부터 포장이사의 달인이 되어 워낙 이사를 자주 해본 터라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제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5개월 동안 그림 그리던 작고 아늑한 작업실. The JAG gallery, Brighton, England 2015


스위스에서 찍힌 내 인생 사진. Urban bike festival, Zurich 2017


지금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햇수로 4년째 살고 있지만 나의 뇌 한구석은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 가을 한국에 돌아가려고 일까지 구해놨건만 여러 사정으로 귀국을 연기했더니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쟁 같은 상황이 벌어져 조금 심란하군요. 펜데믹이 터지기 전에 귀국했어야 했는데 안타깝습니다. 바이러스가 퍼진 지금까지 3만 명 이상 사망한 영국에서 코로나에 걸렸는지 독감인지 아직도 모른 채 불안한 마음으로 자가 격리하며 6주째 오한, 발열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저로선 그림과 글로 자가 치유하는 길 밖에는 없는 것 같아 브런치에 집시 생활을 기록하기로 마음먹고 글을 쓰며 본업인 그림도 쉬엄쉬엄 그리고 있답니다. 무엇인가를 직접 빚어내면서 얻는 그 기쁨으로 파생되는 밝은 에너지가 코로나로 지친 저를 온종일 감싸고 있길 바라며 집시 인생을 시작하게 된 영국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보려합니다.


존경하는 영국 일러스트레이터 아서 락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팀버튼 감독은 아서 락컴에게서 영감을 얻고자 이미 오래전 죽은 그의 런던 집을 사서 아예 살고 있다고 하네요.  



독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그려 본 앨리스 일러스트레이션. 종이 위에 수채, 아크릴, 크레파스, 펜, 2002

어릴 때 열광적으로 좋아하던 메리 포핀즈, 피터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소공녀 세라 등등의 영국 동화들로 인해 영국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저는 동화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자 독학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아서 락컴을 비롯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대부분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직접 그 땅으로 가서 영감 좀 제대로 얻어 볼 요량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1년간 돈을 모아 영국으로 날아갔죠. 어떤 나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그 나라의 언어부터 공부해야 하는 게 당연 지사인데 당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영어라고는 오직 헬로 땡큐 밖에 없었던 순수한 뇌의 소유자인 저로서는 어학공부가 가장 시급했기에 남부 해변 도시 이스트본에 있는 어학원에 다니며 영어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게 된 영어 학교는 옛 귀족의 집을 살짝 개조한 것으로 왕이 올 때를 대비해 왕의 침실까지 화려하게 만들어 놓고 (그러나 왕이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슬픈 이야기), 교실마다 그 집에 살던 귀족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근사한 저택이었습니다. 낭만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학교에서 3개월 동안 어학공부를 하고 유럽 여행을 끝으로 귀국하려던 나의 원래 계획은 영국에 푹 빠지며 변경되었고 그렇게 그림 그리며 9개월을 영국에서 더 머물게 되었답니다.


 

3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던 어학원 LTC International college, Eastbourne, England, 2004



날씨로 악명 높은 영국에서 일조량이 가장 많아 선택한 도시 이스트본은 노인들이 살기 좋아 실버타운이라 불렸고 해변 주변엔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 즐비해 있었어요. 런던 같은 대도시에 비해 물가가 싸고 조용하며 쾌적한 소도시라 공부하기엔 딱 좋은 환경이지만 지루하고 따분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심심할 때마다 동네를 탐방하고 오솔길과 언덕을 산책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습니다.


처음 동네 곳곳에서 그림 파는 가게를 발견했을 때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런 작은 도시에 갤러리의 수가 적지 않았던 것도 신기했지만, 아마추어화가인 제가 봤을 때 걸려있는 그림의 수준이 조금 많이 떨어지는데도 오리지널 이랍시고 가격은 상당히 비쌌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저런 그림을 돈 주고 산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도 했거니와 발로 그려도 내 그림이 더 낫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용기가 마구 샘솟아 그 원동력으로 그림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답니다. 알고 보니 많은 영국인들은 집안 곳곳을 그림으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고 오리지널 원화라도 소유하고 있으면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초대한 손님에게 보여주는 것을 소소한 행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무리 작은 그림도 선물로 받으면 굉장히 기뻐하는 모습에 저는 영국에서 만난 고마운 분들께 한국에서 가져간 그림 재료로 정성 들여 그림을 그려 드리기 시작했어요.



외국은 미술 재료비가 비싸다는 말에 수채 색연필, 수채화 물감, 아크릴 물감과 수채화지를 한국에서 챙겨갔어요. 지우개와 연필은 화가 지망생에게 필수.
꽃 그림을 좋아해 생애 처음으로 장미 그리기를 도전해 보았고, 영국에서 처음 본 꽃 퓨셔(후크시아)와도 사랑에 빠졌어요.
고마운 분들께 그려드린 작은 그림들. 영국에서 채집해 책사이에 말린 꽃들도 그림에 붙여 보았습니다. 하늘색 물망초 꽃은 최애 아이템.
연필과 수채 색연필로 그린 작은 초상화. 여전히 인물화가 가장 어려워요.
새로운 주제를 그리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이런 저런 그림들을 시도해 보며 기본기를 쌓았습니다.
그림그리기에 다소 협소한 공간이지만 반년동안 부지런히 작업하던 조이할머니댁. 작은 그림의 장점. 어디서나 그릴 수 있죠!
환경을 바꿔 장미 정원과 도서관에서도 그림을 그리곤 했죠. 외롭고 인터넷 안터지면 작업이 잘 된다는 사실.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당시 고도의 집중과 몰입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수채화 용지를 접어 카드를 직접 만들어서 표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체리티 숍에서 산 액자에 그림을 넣어 선물을 하면 돈 주고 산 물건과는 색다른 느낌에 주고받는 기쁨 또한 커서 수많은 그림 선물을 하고 나니 그림 실력도 점점 늘어가 기본기가 탄탄해 짐을 느꼈어요. 작은 연필 초상화나 수채화로 그린 꽃 그림이 주력 아이템이었고 틈틈이 동물과 풍경, 건물 그림에도 도전해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입시미술로 디자인과 소묘를 잠시 배워본 적이 있는데 항상 똑같은 주제에 모두가 틀에 박힌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에 미친듯한 괴로움을 느끼고 (흡사 고문당하는 것처럼 끔찍했죠) 미대입시에 실패하고 대충 점수에 맞춰 도자기 공예과로 갔기에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국 가기 전 만화가 문하생으로 살아 본 1년의 경험이 디테일한 그림을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언젠가 문하생 시절 경험담도 풀어볼게요. 말이 문하생이지 거의 무급 노동 착취였지만 실력 좋은 만화가 선생님께 전수받은 테크닉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보석 같은 선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영감을 주는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고 싶었고 입에 풀칠만 해도 그저 그림만 그리며 살아도 좋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밝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영국의 매력에 빠져 지낸 1년을 발판 삼아 집시처럼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린 10년..

지금 저는 그토록 고대하던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으니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식 살 돈이 없어 사흘을 굶다 아끼던 책을 헌책방에 팔아 간신히 식량을 마련했던 대책 없는 인간의 흑역사와 청소 같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힘들게 살았던 나날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절실히 느끼고 있어요. 화가의 꿈도 이뤘고 이젠 굶지도 않으니까요.


작년 여름 Toward, Scotland 2019



더 많은 그림이 보고싶다면 -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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