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이Noni Aug 21. 2020

계절이 두 개뿐인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 중독된 그림쟁이의 스코틀랜드 짝사랑

그림을 그리다 창문을 열자 한동안 뜸했던 그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어온다. 그리웠다. 이 냄새. 맥주공장 냄새. 누가 술꾼 아니랄까 봐 콧 평수를 최대한 넓히며 킁킁댄다. 조금이라도 더 맡아보려고 명상할 때처럼 폐 깊숙이 심호흡을 한다. 온몸 가득 퍼져가는 알코올처럼 심히 자극적이지만 무해해서 더 사랑스러운 이 맥주 향기. 보리를 볶다가 쥐어짜는 건지는 몰라도 맥주 빚는 냄새는 강냉이나 뻥튀기 냄새와 살짝 비슷하면서 구수하고, 냄새 맡다가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너무나 강렬하고 향긋하다. 그래, 커피콩 볶는 냄새에 당당히 견줄 수 있을 만큼 좋다고 해두자(커피는 써서 안 마시지만 원두 향기는 좋아하는 인간).


에딘버러에 거의 4년을 살면서 나는 맥주공장이 틈만 나면 내뿜는 이 환상적인 냄새에 중독되어 버렸고 이 냄새를 맡기만 하면 뭔가에 홀린듯 맥주 뚜껑을 따게 되는 지경까지 와버렸다. 에딘버러에서 처음 맡았고 이곳에서만 맡을 수 있어 에딘버러 냄새라 이름 붙이고 혼자 열광한다. 이도시는 처음엔 시각으로 내 혼을 쏙 빼놓더니 이제는 후각까지 홀딱 반하게 만들어버렸다. 큰일이다. 이제 내년이면 황홀한 맥주 향기 나는 이곳을 떠나는데 냄새도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맥주공장 향수 제작을 연구해보고 홈메이드 맥주 만드는 법도 배우고 싶다. 물이 좋아 맥주도 맛있는 스코틀랜드가 정말 그리울 것 같다. 이 사랑스러운 맥주공장 향기도, 웅장하고 아름다워 운치 있는 에딘버러도, 백파이프 소리도 모두 그리울 예정이다.


스코틀랜드에 처음으로 들렀을 때 나는 브라이튼에서 머물고 있었다. 2014년부터 학생으로 2년간 몸담았던 식물화가 협회의 보태니컬 아트 디플로마 코스 세미나를 위해 런던에 왔다가 먼 기억 속에 남아있던 히피와 예술가들의 도시 브라이튼이 그리워 기차에 몸을 싣고 브라이튼 역에 도착해 해변에서 멀지 않은 백팩커스에 짐을 풀었다. 게이들의 수도이자 유럽인 노동자가 넘쳐나는 브라이튼에서 방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기에 방을 구하다 지쳤을 무렵 경비도 아끼고 여행도 할 겸 영국 하우스 시팅 웹사이트(ukhousesitters)에 가입을 했다. 폴커크(falkirk)에서 열흘 동안 고양이 한 마리와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뒤 열 시간가량 메가버스를 타고 도착한 스코틀랜드는 우아한 건축물로 나를 첫눈에 매료시켰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친절한 사람들 모두 나의 취향에 들어맞아 장거리 여행의 피로마저 잊게 해 주었다. 특히 에딘버러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워서 이런 천국 같은 곳이 있다니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고 언젠가 꼭 다시 와서 살리라 다짐했던 게 2014년이었는데 2017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3년째 살고 있으니 생각한 대로 이뤄진다는 말이 영 개소리는 아닌 듯싶다. 6년 전 한번 와보고 반해 늘 염원했던 그곳에 지금 현재 살고 있다니 당사자인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스코틀랜드는 날씨를 빼면 모든 것에 별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땅이다(올해 4월부터 5월까지는 두 달 동안 비가 딱 한번 왔을 만큼 너무 맑아서 스코틀랜드 답지 않아 이상했지만). 우스갯소리로 스코틀랜드에는 계절이 딱 두 개만 있다고 한다. 겨울과 7월. 그 얘기를 처음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정말 7월을 뺀 11개월이 겨울같이 으스스하니 내가 내복 마니아가 된 것도 당연하다. 해가 8시 넘어서 뜨는 한겨울에는 낮 세시부터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몰아쳐 치를 떨게 만드는 곳이 스코틀랜드인데 비, 우박, 서리, 폭풍은 기본이고 폭설까지 종종 내려 음습하고 어두운 긴긴 겨울을 버텨내는 이곳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용하다. 이곳에서 알게 된 지인은 스코틀랜드의 날씨가 조금이라도 좋았다면 모두가 에든버러에 이민 와서 바글바글 살았을 거라며 인구수를 증폭시키지 않는 이 서늘한 날씨에 감사하다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보였다.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은가 보다. 추위라면 몸서리를 치는 나 같은 사람도 햇수로 4년째 머물고 있으니.. 신비의 땅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니까 이렇게 짜증 나는 날씨도 관대히 용서가 된다.


공단 위에 금분 안료로 그린 하이랜드 카우. Star seeds cow, metallic pigment on satin 2019


스코틀랜드 땅에서 태어난 전설의 유니콘, 하이랜드 소, 웨스트 하이랜드 테리어, 사슴 등의 동물들은 왜 그렇게 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신비로울까. 시야를 가리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지닌 하이랜드 소를 처음 본 곳은 특이하게도 스코틀랜드가 아닌 스위스  바젤에서 자원봉사할 때였다. 알고 보니 스위스에서 하이랜드 소를 직접 수입해 키운다는 것이었다. 난생처음 본 독특한 얼굴의 소에게  다가가 사진도 찍고 눈을 덮은 앞머리를 귀엽다며 만졌는데 소가 귀찮았는지 뿔로 내 손을 쳐내버렸다. 상처는 없었지만 손이 은근히  아팠다. 운이 좋았지 하마터면 뿔로 들이받아 내동댕이 쳐질 뻔했다. 겁도 없이 뿔 달린 짐승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다니.. 귀여운  걸 꼭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이 집요함 덕분에 타국에서 비명횡사할 뻔했다. 그 이후로 조심성이 생겨 동물을 웬만해선 만질  생각을 안 하고 강제로 만져지는 동물의 기분도 존중하게 되었다.


공단 위에 금분 안료로 그린 사슴. Indigo deer, metallic pigment on satin 2019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동물들은 많지만 식물은 단연코 엉겅퀴꽃이라 할 수 있는데 꽃말을 알아보니 '독립', '엄격'이라고 한다. 영국으로부터 영원한 독립을 염원하는 스코틀랜드의 국화로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아 온 엉겅퀴꽃을 나 역시 그려보고 지난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판매했다.


마켓 판매를 위해 그린 스코틀랜드 상징 엉겅퀴 꽃 그림들. 공단위에 금분안료. Golden thistle, metallic pigment on satin 2019


그밖에 위스키, 스콘, 숏 브래드 쿠키 등등의 내가 사랑하는 먹을거리들도 스코틀랜드의 명물이다.  럭셔리 스포츠 골프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탄생했다는 기원설이 유력하다. 그래서 초원이 흔한 스코틀랜드에는 골프장이 많이 있고 실제 집 앞에 공공 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어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을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탁 트인 잔디밭 드넓어 예쁘다고 역시 에딘버러는 최고라며 찬사만 늘어놓던 나는 이곳에 이사를 와서야 그 골프장 잔디밭에 관한 소름 끼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백여 년 전 유럽에서 유행한 흑사병으로 에딘버러 인구의 반이 죽고 수많은 시체를 공동묘지에 처리할 수 없어 놀고 있던 변두리 땅에 묻었는데 그 땅이 바로 현재 사람들이 골프를 치고 바비큐를 해 먹으며 피크닉을 즐기는 우리 집 앞 드넓은 잔디밭이라는 것이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파묻힌 땅 위에서 즐기는 스포츠와 소풍이라니 오싹하다. 여전히 해골들이 즐비할 땅속 사정은 생각도 않고 그 위의 초록 잔디밭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밤에는 좀비들이 땅에서 기어나와 돌아다닐 것 같은 브런츠필드 링크스 골프코스와 멀리 보이는 에든버러 성의 고풍스러운 모습
에딘버러 프린세스 가든. 날씨가 좋을 땐 환상적이다.
햇볕쬐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빵부스러기라도 얻어먹으려는 갈매기 새끼. 여긴 갈매기 크기가 고양이 만하다. 어떤 갈매기는 사람손에 들려있던 샌드위치를 낚아채갈 정도로 깡패같다.




아홉살 소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동산위의 왕자님, 앨버트씨 또는 안쏘니.

사실 스코틀랜드 문화에 처음으로 반했던 건 아홉 살 소녀시절이었다. 중학생이었던 언니들이 부모님 몰래 빌려보던 만화책 캔디 캔디에서 나의 첫사랑 안소니가 입고 있던 옷이 스코틀랜드 전통의상 킬트와 백파이프였던 걸 스코틀랜드에 와서야 알아차렸을 때 나는 이것을 운명이라 여기고 체크무늬 킬트를 입은 스코티쉬 남자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지리라 예감했지만 역시 만화는 만화일 뿐 안소니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다 늙어서도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게 만드는 순정만화의 폐해). 지금 에든버러에 15년째 살고 있는 남자 친구는 런던 출신으로 킬트를 혐오하는 잉글리시이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기는 치마를 입는 걸 미친 짓이라 생각하는 뼛속까지 마초인 그는 킬트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 전통이 끔찍하다며 죽어도 입지 않겠다고 한다. 노숙자에게 입혀놔도 왕자님이 되는 킬트가 얼마나 멋진 전통의상인데 바람 불면 소중한 부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다니. 참 멋없는 영국 남자다. 안소니를 기다렸는데 니일 같은 남자를 만났다.


 

스코틀랜드 병사와 그들의 치마 속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프랑스 여인들.

 French illustration titled "Le prétexte." A humorous caricature  depicting Scottish soldiers, wearing kilts, leaning forward to inspect  items for sale.  Behind them, two well-dressed Parisian women use the  pretext of playing with a child or tying a shoe in order to lean over  and peek beneath the soldier's kilts.  Caption in scan source (not the original 1815 caricature caption) was Der Vorwand ("the pretext").  Published by Aaron Martinet (1762 - 1841





더 많은 그림이 보고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매거진의 이전글 집시 화가 생활 10년을 돌아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