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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논이Noni Aug 23. 2020

일진 고양이로 인해 병색이 짙어지다

한달 넘도록 앓고 있는 자가격리자의 영국병상기록

병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증세가 3월 말부터 시작되어 한달을 훌쩍 넘겨 이제 5월이 되었으니 짧지 않은 기간이다. 앓는 동안 경증 감기라 괜찮다고 다독이며 꾸역꾸역 그림을 하루 한시간이라도 그려보려 노력하고 브런치에 글쓰기도 시작했지만 절로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두통과 발열로 인한 식은 땀으로 결국 다 멈추는 수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삶의 의욕마저 없을 정도다. 사라진 입맛으로 그토록 좋아하던 먹는 일 마저 귀찮다. 무력감과 나른함에 짜증이 나고 치솟는 우울함으로 귀신과 무당까지 등장하는 신박한 악몽까지 꾸게 되자 안되겠다 싶어 기분 전환에 최고인 고양이가 나오는 유튜브를 관람하고,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방영 중인 '부부의 세계' 원작 영드 Dr. Foster (영국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가미한 완전 막장 드라마이다. 부부의 세계는 루트가 없어 아직 보지 못했다)와 몇몇 한국 드라마를 넷플릭스로 시청하며 소파와 한 몸이 돼 환자놀이에 여념이 없던 지난 4월은 그야말로 드라마 폐인의 나날들 이었다.


생각해보면 격리생활 2주차가 지났을 때 내 몸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고 가끔 바깥으로 나가 산책도 하곤 했었다. 이렇게 오래 앓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웃집 고양이 밤부와 겐조의 소식때문이기도 하다. 내 베스트 프렌드였던 고양이들로 인해 병색이 짙어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지은 지 150년 쯤 된 유서깊은 플랏으로 수백 여가구가 모여 사는 공동 주택에 속해있다. 삼각형 모양으로 형성된 거대한 Back garden (공공 정원)에는 오래된 나무들과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종종 주인과 산책나온 개, 피크닉 나온 가족들을 창문을 통해 볼 수 있고 운좋은 날엔 선명한 빨간 깃털을 지닌 딱따구리까지 만날 수 있는 새들의 천국이다.


3층 (영국에서는 2층 이라고 하지만)에서  찍은 도로 쪽 건물 모습과 석양
창밖을 내다보면 온통 초록인 전망 좋은 내 방에서 찍은 Back garden


이사를 온 뒤 꼬리가 두툼하고 긴 털이 예술인 가필드 형제 고양이를 창밖으로 처음 발견했을때 창을 열고 고양이 성대모사를 하며 그들의 시선을 끌어보려 했으나 새침냥이들은 나를 그저 무시하기 일수였다. 결국 남자친구가 사온 고양이 간식 Dreamies (일명 냥이 마약)를 가지고 정원으로 내려가 고양이 유혹 작전을 실시하자 그 둘은 경계심을 풀고 마약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몹쓸 한국인 마피아에게 홀딱 빠져버린 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접선을 시도했다. 그렇게 해서 친해진 고양이 형제들과 나는 거의 매일 정원에서 행복한 한 때를 보냈고 그들과 노는 것이 세상 유일한 낙이었다.


"내 마약은 어딨냐옹~" 서러운 표정의 밤부. 선홍색 나리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사이좋은 형제의 한때


에딘버러엔 아는 한인도 없고 이곳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세라와 카롤리나 뿐인 완벽한 아싸인 내게 밤부와 겐조는 베스트 프렌드를 넘어 진정한 영혼의 친구로 외로운 타지 생활을 반들반들 윤기나게 만들어 준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특히 밤부는 주인이 밥먹으라고 불러도 가지않을 정도로 나를 많이 좋아하고 진짜 집사처럼 대했을 만큼 각별했다. 내가 보고싶어 우리집 근처까지 와 가끔씩 아침부터 기다리던 밤부는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남자처럼 나의 창 밑에서 툭하면 나를 불러댔다.


실컷 놀고나서 더 놀고 싶어 우리집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던 냥이들

창밖으로 밤부가 보이면 헐레벌떡 달려 나가 주인님께 냥이 마약 드리미를 바치고(남의 고양이라 딱 4개씩만. 간에 기별도 안갈만큼 양이 적다. 처음 드리미를 사온 남친에게 남의 고양이에게 먹을 걸 주면 안된다고 하자 쟤네는 공공 정원에서 노니까 우리 모두의 고양이라 괜찮다기에 수긍하고 주기 시작), 함께 산책을 즐기거나 돗자리 위에서 같이 낮잠도 자고, 긴 나뭇가지로 실컷 놀아주고 전신 마사지도 해주며 1년 동안 정원에서 그들과 만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정이 푹 들었을 무렵 나는 지난 1월부터 3월 중순까지 Falkland (미드 Outlander로 유명해진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아름다운 경관으로 1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에서 하우스 시팅을 하게 되어 집을 떠나 있었다. 가끔 주말에 집에 왔을 때도 볼 수 없었던 고양이들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겨울이라 추워서 안나오는 건가? 코로나 바이러스때문에 집주인이 고양이를 안내보내나? 하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고 늘 마음속으로 고양이들을 위해 다시 곧 만날때까지 건강하라고 기도했다.


오래 전 사고로 꼬리뼈를 부상입고 꼬리를 늘 말고 다니는 겐조와 여우같은 꼬리를 지닌 밤부


4월 13일.

자가격리를 마치고 정원을 산책하다가 만난 밤부와 겐조의 주인 실비(영국에서 30년 넘게 사신 프랑스인 아주머니)에게 냥이들 소식을 묻자 청천벽력같은 대답을 들었다. 둘 중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입양보냈다고.. 머리를 뭔가로 맞은 듯 땡 했다. 무슨 말씀이냐고 되묻자 영역관리가 철저한 밤부가 이웃 고양이들을 크게 상처입히는 일이 잦아 이웃과 큰 싸움이 나고 더이상 문제 삼고 싶지 않아 유기동물센터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 이후 겐조는 몸이 안좋아져 동물병원에 데려갔더니 심각한 심장병이 있어 더 많은 검사가 필요했고 큰 수술까지 해야한다는 수의사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안락사를 시켰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겐조가 밤부 떠나고부터 그리움에 병이 도졌다고 본다. 싸움 한번 하지 않던 사이좋은 형제였으니까..


"기다리라옹..하품부터 하고 찍자옹~" 사진찍기 전 늘어지게 하품하는 겐조와 몸 단장하는 눈 쳐진 밤부


 밤부는 입양이 안돼서 두달이나 철창신세를 지다가 얼마 전 외곽에 사는 정원 딸린 집에 사는 노부부에게 간신히 입양이 되었다고 했다. 아기고양이 때부터 거의 10년이나 함께 살아온 반려묘를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니... 자식이 동네 방네 문제 일으키는 일진이라면 같이 이사를 나갈 생각을 해야지 쫓아내...? 실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고양이를 아끼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갔다. 밤부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그런 결정을 했겠지 생각하니 진심으로 아줌마의 멱살을 잡고 싶었다.



근엄한 밤부의 표정이 말한다 "나는 깡패냥이라옹. 이 구역의 일진냥은 나야옹~ "

두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는 이웃 아이들이 내게 작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밤부가 자기네 고양이들을 해쳐서 동물병원 치료비가 엄청 나와 엄마가 너무 속상하다고 했고 책임을 밤부 주인에게 물겠다고 했던 것이 작년 여름이었는데 겨울이 되자 또 그 고양이들이 심하게 다친것이다. 밤부로 인해.. 작년 봄 처음 밤부를 만났을 때 정원에 있던 동네 아저씨가 했던 말이 복선이었. 밤부가 이 동네를 주름잡는 깡패 고양이라 모든 고양이들이 벌벌 떤다고. 아주 문제 많은 고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저 고양이들의 세계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결국은 쫓겨나고야 말다니. 밤부는 그저 본능에 충실했던 힘 센 고양이였을 뿐이었는데..


돈이 뭐라고... 돈때문에 애들을 파양하고 안락사 시켰구나.. 밤부가 왜 그렇게도 나를 좋아하고 집착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이웃과 실갱이가 있는 날이면 분명 밤부를 미워했음이 틀림없었다. 실비가 말하길 밤부는 절대 자기에게 다가오지도 만져달라고 하지도 않던 차가운 고양이였고 겐조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단다. 내게는 반대였다. 겐조는 드리미를 먹고나면 종종 나를 모른척 했던 새침한 고양이였고 밤부는 드리미가 있건 없건 사랑을 갈구했던 로미오같은 낭만고양이었다. 밤부가 얼마나 애교많고 다정한 고양이였는데... 내 앞에서 심심하면 배보이며 드러눕고, 긴 털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흙 위를 자유롭게 뒹굴던 행복한 고양이 밤부였거늘.. 그녀는 모른다. 우리가 1년 동안 정원에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밤부가 내게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끔찍한 소식을 들은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파오는 오른쪽 폐(십대시절 20 kg 쌀 한 포대를 등에 지고 빌라 3층에 있던 집까지 올라갔다가 늑막염에 걸려 오른쪽 폐에 물이 가득 차 병원에 열흘 간 입원한 적이 있었고 그때 부분 마취를 통해 대바늘로 물을 빼내었다)를 부여잡고 누워있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숨이 깊게 쉬어지지도 않을 정도로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이다. 십년을 살던 곳에서 무참히 쫓겨나 두달이나 죄수신세였던 밤부가 떠올라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 자유로운 영혼이 철창안에 갇혀서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안락사가 아닌 고통사로 죽은 겐조도 너무나 가여워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의 동물 친구들을 향한 그리움과 연민으로 가슴이 너무나 조여왔고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4월 21일.

코로나인지 감기인지 모를 증세에 폐의 느낌마저 좋지 않아 일주일을 끙끙대다 아침에 가래인 줄 알고 뱉은 검붉은 핏덩이를 보고 놀라 111로 전화를 했다. NHS에서는 거의 한시간 가량 내 증상을 자세히 묻고 기록한 뒤 의사와 연결 시켜주었는데 중증환자들을 많이 접해서인지 대수롭지 않은 듯 곧 괜찮아 질 거라며 그냥 집에서 푹 쉬라고 했다. 열나고 두통나며 숨이 얕게 쉬어지고 폐가 결릴 뿐인 경증 환자인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홀로 이겨내는 수밖에.. 코로나로 3만명이 죽어간 영국에서 병원치료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불안감으로 무너져가는 멘탈을 챙기며 자가치유 하면서 다행히 2주일 만에 폐의 느낌은 많이 좋아졌고 밤부와 겐조를 생각하면 울컥해지는 일도 줄어들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인데 감정이입 선수인 나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고양이들의 슬픔을 스폰지 처럼 흡수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다 건강마저 완전히 잃을 뻔했다.


겐조가 드리미로 가득한 고통없는 고양이 별에서 태어나고, 밤부가 새 집사들에게 사랑받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간절히 빈다. 내세가 있다면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나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다. 1년 동안 외로운 이방인과 친구해줘서 너무 고맙고 사랑해 얘들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한달 동안 상태 좋을 때만 가끔씩 쓴 글입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표지그림은 종이위에 혼합재료(수채, 색연필, 잉크)로 그린 '너바나'(노니그림)입니다.

*더 많은 그림이 보고싶다면-

https://www.instagram.com/nonichoi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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