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 의심 환자로 한 달 반 가량 앓으면서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복 벗어서 말리기였습니다. 발열과 오한으로 땀에 흠뻑 젖은 내복과 잠옷을 몸에서 분리하고 눅눅해진 침대에서 벗어나는 게 7주 간의 후줄근한 아침 일상이었어요. 워낙 추위를 잘 타는 체질인 데다 5월에도 서늘한 영국 북부 날씨는 저를 내복 마니아로 만들었고 내복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여름에도 입고 잔다는 뜻이죠. 저도 제가 이렇게 면 100% 내복에 심취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답니다. 그렇다고 빨간 내복 따위를 입지는 않아요. 나의 내복들은 꽃무늬가 만발한 분홍색이지요. 줄무늬 내복도 있구요). 영국 날씨가 선물한 어이없는 취향으로 할머니 체험을 미리 하고 있는 건가요. 마당에 고추 말리듯이 히터에 내복을 말리다니.
내복을 말려 빨래를 돌리고 샤워를 하고 나서 아침을 먹습니다. 아침 먹고 나면 생강을 얇게 썰어 물에 넣고 약한 불에 오래 끓여 쓴 생강차를 만들어 마누카 꿀과 잣을 넣어 마시는 것이 저의 감기약입니다. 증세가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너무 힘들고 아픈 날엔 그 매운 날생강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불을 토하며 독하게 버텼어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끔 생강차를 만들기 힘겨울 정도로 기운이 없을 땐 Paracetamol (진통제) 두 알로 24시간을 견뎌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입원했을 때 하루에 열 알도 넘는 각기 다른 약을 제공받고 퇴원 후 약독으로 머리카락의 3분의 2가 빠지는 일을 겪고 나니 (과장이 섞이지 않은 실제 겪은 탈모 증세였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에 숱하게 빠져있는 머리카락을 붙들고 망연자실해 있었지만 다행히 빠진 구멍에서 새 머리카락이 바로 나와 회복 가능했어요. 지금도 머리숱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대한민국 5% 에 속한답니다. 미용실 원장님 말씀 인용) 약에 손이 쉽게 가지 않아 감기에 걸리면 웬만하면 생강과 마누카꿀로 이겨냅니다.
생강은 강력한 항생제이자 항바이러스제로 놀라운 소염진통 효과를 볼 수 있고 마누카 꿀은 수많은 박테리아와 맞서 싸우는 방패 역할을 해요. 약을 멀리하게 되면서 천연 항생제인 생강과 마누카꿀로 잔병치레 많은 이 가련한 몸뚱이를 자가 치유한 경험이 있기에 이번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다뤘습니다.
입맛은 없었지만 현미, 과일과 녹황색 채소 같은 건강식을 주로 먹고 인스턴트식품은 멀리했어요. 칼슘 섭취를 위해 늘 달고 사는 케일로 김치를 담그고 (우유보다 칼슘이 10배 많은 슈퍼푸드로 김치로 먹으면 갓김치 같은 아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어요. 갓을 못 구하는 영국이라 꿩 대신 닭이지만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시금치를 데쳐먹거나 브로콜리나 버섯 등등을 다른 푸성귀와 볶아 먹기도 했지요. 생선, 미역, 다시마, 김 등의 자주 먹는 해산물도 더 챙겨 먹으려 애썼습니다. 집안일은 평소 하던 것의 반의 반도 못 할 만큼 체력이 달려서 청소는 가끔 해도 저녁만큼은 온 에너지를 쏟아 잘 지어먹겠다고 이 악물고 요리했어요.
타지에서 아프면 정말 서럽죠. 자가 치유하는 환자에게 심심한 위로가 되어준 차와 식물들 단체사진. 작년부터 재배한 빨간 제라늄 꽃도 제게 큰 힘이 되었답니다.
5월 9일 아침. 식은땀 없이 상쾌하게 일어나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와 안녕했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며칠 후 목에서 또 피가 나왔네요.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두 번째 객혈이었고 오른쪽 폐 결림도 계속 느껴져 걱정하던 남자 친구가 동네 의원에 전화 예약을 해서 드디어 지난주 월요일 아침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뵈러 다녀왔다. 작년에 남자 친구가 축구하다 다리를 다쳐 한 번 가본 병원이고 집에서 도보 3분 거리에 있어 걷는 동안 숨이 차지 않아 다행이었어요. 마스크를 쓰고 손소독제를 바른 뒤 비장하게 입장한 병원에서 직원의 안내에 따라 RED ZONE이라고 쓰인 방으로 들어가 선생님을 기다렸어요. 잠시 후 나타나신 의사 선생님은 이것저것 물어보시면서 자신도 지난 3월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6주 동안 심한 근육통을 앓았다고 하셨습니다. 다들 증상이 달라서 더 무서운 코로나.. 제 경우는 전편에 썼듯 끊임없는 두통, 발열, 오한 그리고 가끔씩 나던 마른기침에 가장 두려웠던 입맛을 잃은 것이었어요. 요리 좋아하는 식탐 대마왕이 입맛과 미각을 잃으면 삶의 의욕을 잃게 되네요. 먹는 것에 인생의 의미를 가장 크게 두는 인간이 맛있는 음식 맛도 못 느끼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니 우울해지는 게 당연했어요.
청진기로 숨이 오가는 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신 의사 선생님은 폐 외부에 해당하는 몸 이곳저곳을 눌러보시고 진찰을 마치셨어요. 폐 안쪽에서 이상함은 못 느끼셨고 폐를 감싸는 근육이 기침할 때 뒤틀리는 바람에 근육통이 생긴 것으로 본다고 하시며 곧 나을 거니 걱정 말라고 하셨습니다. 결과에 해피하다고 하시며 한국에는 언제 가냐고 물으시길래 이번 9월에 들어가기로 했고 여긴 그림 그리려고 머문 거였다고 덧붙였어요. 그림 그려서 영국에서 전시회도 했냐고 관심을 보이셔서 여기저기 전시회 한 곳들을 말씀드리니 미소 지으시던 사람 좋은 선생님과 작별인사를 하고 진찰실 문을 나서는데 예약할 때 말씀하셨던 70파운드의 진료비를 안 받는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친절하게 진료해 주신 덕에 즐거운 진찰시간을 보내고 걱정할 만큼 폐가 나쁘지 않아서 우울증을 동반한 이 몹쓸 역병이 싹 나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이던 길가의 사과꽃들이 제게 축하한다며 사과꽃향기를 내뿜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정말 오랜만에 세상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건강을 되찾고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동안 못 먹은 맛난 음식들도 신나게 만들어 먹고, 브로닌에게서 주문받은 그림도 완성해야겠어요. 그리고 작은 선물을 준비해 다시 한번 병원을 찾아 의사 선생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2020년 5월 26일에 쓴 글로 8월 현재 저는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고 며칠전에는 하루에 세시간을 걸었을 정도로 100% 회복되어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진료해주신 의사선생님께는 제 그림이
프린트 된 머그컵과 프린트를 선물해드리며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전해드렸습니다.
여담이지만 전직의사였던 스코틀랜드인 친구 제니와 그녀의 지인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7주 가량 앓았다고 하고 남자친구 부모님의 런던 사는 지인은 코로나로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수많은 사망자를 낸 대책없는 영국에서 두달동안 앓다 살아남아 감사하지만 돌아가신 분들께는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