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논이Noni Feb 14. 2021

부촌을 지나 장 보러 가는 길

*영국 일상* 하얗게 된 에든버러 그리고 전원 풍경(Ft. 은마아파트)

위성이 찍은 오늘자(2021년 2월 11일) 스코틀랜드 사진. 찹쌀가루 뿌려놓은 듯 온통 하얀 영국 북동부. 출처 - NASA

이틀간 쏟아진 폭설로 겨울왕국이 된 스코틀랜드에서 코로나도 잊고 하얀 낭만을 즐기고 있어요. 모처럼 한국의 겨울이 느껴지는 파랗고 쨍한 하늘에 기분이 좋아져 밝은 햇살을 받으며 창가에서 그림을 그리다 아직 환할 때 산책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채소가 떨어져 장 보러 테스코(영국 슈퍼마켓 체인. 은근히 저렴)에 가기로 하고 영하 4도 바깥 날씨에 대비해 무장을 했어요. 목도리, 장갑, 청바지 안 내복은 필수.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장화. 한국 패셔니스타들에게 장화는 레인부츠로 통칭된다면서요? 장화 하면 모내기할 때 신는 농사용 고무신발이 떠오른다며.. 영국에선 장화를 레인부츠라고 해도 알아듣지만 대부분이 '웰리'라고 불러요. Wellington boots 웰링턴 부츠를 줄여 웰리. 어느 나라든 긴 단어를 짧게 줄여 부르는 게 대세인가 봐요.


재작년에 £9.99(만 오천 원가량) 주고 구입한 어린이용 장화(size 2). 발이 작아 어린이 운동화(size 3)도 소장 중. 한국으로 치면 220~225.


한 시간 이상 신으면 장딴지가 뻣뻣해지며 쥐가 나는 싸구려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닌 장화를 신고 쌓인 눈길을 씩씩하게 헤쳐나갑니다. 이래 봬도 메이드 인 리투아니아, 유럽산 장화예요. 쥐 나는 신발에 유럽 부심 애잔하구만.


집 근처 공원 Bruntsfield links. 며칠째 눈썰매를 원 없이 탈 수 있어 신난 아이들과 썰매 끌고 애들 돌보느라 지쳐 보이는 부모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겨울 하늘에 향수를 느낍니다. 한국의 겨울 하늘은 참 시리도록 파랗죠. 한파는 무섭지만 겨울 하늘은 그리워요.
꿀벌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꽃밭에도 눈이 엄청나게 쌓였어요.
눈이 소복하게 쌓여 빙수 그릇 같은 우드 피존 둥지. 여름에만 알 낳는 용도로 이용하는 둥지라 늘 비어있어 다행입니다.
공원을 지나 드디어 부촌으로 진입합니다. 뭔가 냄새가 나지 않나요? 부자 냄새... 이 부촌 도로명은 Greenhill Gardens예요.


현재 비어있는 집으로 코로나 때문에 1년 넘도록 리모델링 중인 단독주택. 탁 트인 앞마당에 깔린 초록 잔디도 눈에 덮여버렸네요. 이 부촌에서 가장 맘에 드는 집입니다.



사방으로 창이 뚫려 볕 잘 들고 밝아 보이는 저 높은 탑 방 안에서 그림 그리고 명상하면 좋겠어요.




인간에겐 독성이 작용해 몹쓸 빨간 열매이지만 새들에겐 별미래요.



저물어가는 해를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는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고풍스러운 건물. 쓰레기통 위에 귀엽게 쌓인 눈도 예쁘네요.



이 동네에서 제일 부잣집으로 보이는 이 으리으리한 집은 얼마 전 타계한 에든버러 출신 배우 숀 코너리가 젊었을 때 부모님 모시려고 구입하려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불발로 그치고 말았대요. 작년 여름, 이 집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이 동네 할아버지 한분이 지나다 발걸음을 멈추고 설명해주셔서 알게 된 숀 코너리의 이야기는 참 흥미로웠어요. 007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그 영화배우가 살 뻔했던 집이라니. 할아버지는 친절하게도 이 집을 지을 당시에 얽힌 사연까지 말씀해주셨어요.

"창문 위에 장식된 엉겅퀴꽃과 장미꽃을 보세요. 스코틀랜드의 상징 엉겅퀴와 잉글랜드의 상징 장미 알죠? 이 집을 지은 스코틀랜드 사람이 잉글랜드인 부인과 결혼하며 화합의 상징으로 저 꽃문양 조각을 주문하고 장식한 거예요."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1800년대에 지어진 집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그분이 아니었으면 영원히 몰랐을 거예요. 일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특히 노인분들) 이방인에게 친절하고 붙임성이 있어 길에서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묻지도 않은 얘길 장황스레 늘어놓는 귀여운 특징이 있어요.


숀 코네리가 살뻔한 집의 옆집도 귀여워요.


가위손이 다녀간 듯 잘 다듬어진 토피아리 입구



부자동네를 지나 도로를 건너면 꽤 큼직한 프라이벗 가든이 나와요. 공공정원이 아닌 주인이 있는 사유지라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담장 옆을 지나며 눈으로만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영국 전역에 퍼져있는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정원이에요. 그나마 저 정원은 그물망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누구나 밖에서 볼 수 있지만 런던에 머물 때 발견한 수많은 개인정원은 안을 볼 수 없도록 높은 담장을 쌓아 꽁꽁 숨겨놓고 커다란 자물쇠로 문을 잠가놔 외부인은 철저히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어요. 그 아름다운 5월, 정원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 달콤한 꽃향기를 맡고도 외부인+이방인이라는 신세 때문에 꽃구경을 못해 아쉽고 슬펐었는데 그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이 개인정원에 들어가 마음껏 구경하게 된 사건이 있었어요.


스머프 마을에 나올법한 하얀 무늬의 새빨간 버섯이 잔디밭 여기저기에 솟아오르던 작년 가을, 그 잘 익은 홍옥처럼 예쁘고 주먹만큼 큰 버섯을 구경하려고 툭하면 담장 밖을 뱅뱅 돌던 제눈에 누군가가 띄었어요. 쪼그리고 앉아 정원 출입문을 수리하던 머리가 온통 하얀 할아버지였죠.


"익스큐즈미, 여기가  당신의 개인정원인가요?"


알면서도 여쭤봤어요. 할아버지는 맞다고 하시며 자신을 비롯한 정원 맞은편 집주인들이 공동 소유하고 있다고 친절히 답해주셨어요. 마음씨 고와 보이고 순해 보이는 할아버지의 인상에 안심하며 말을 이어나갔어요. 여기에 핀 빨간 버섯들 너무 예뻐서 종종 보러 오는데 정원사들이 한번 왔다 가면 다 뽑아놔서 분통 터진다며 할아버지께 하소연하자 대뜸 들어와서 구경하라며 문을 활짝 열어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사소한 것에 로또 당첨된 듯 큰 기쁨을 느끼는 제게 그 말은 '천국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로 들렸고, 땡큐 땡큐를 남발하며 드디어 남의 정원에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코앞에서 바라본 빨간 버섯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예뻤고, 잘 정돈된 정원 내부는 밖에서 본 것보다 더욱 정갈했어요. 호들갑을 떨며 감탄하고 나무들을 둘러보는데 할아버지가 제게 일본인이냐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한국인이라고 대답하자 오 그러냐고 하시며 저기에 한국에서 온 나무와 일본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하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셨어요. 나무이름이 한국에서 왔다고 코리아나라고 해 검색해보니 Abies Koreana 라고 하는 한국산 전나무였죠. 타향에서 한국인을 만난 듯 반가운 마음에 나무에게로 다가가 보니 뿜어지는 기운과 자태가 참으로 건강하고 예뻤습니다. 국뽕없이 봐도 제 눈엔 이 정원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나무로 보였어요.  

영국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인기 있는 한국 전나무 Abies Koreana. 눈이 쌓인 자태가 고고하고 우아해요. 어쩜 이렇게 사진발도 잘 받죠?
차도 건너편에서 바라본 공원. 안녕 코리아나 전나무!


할아버지께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렸어요. 오래전부터 궁금하던 그 공포스러운 역사에 관한 이야기였죠.

"이 정원 땅 밑에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들이 묻혔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1600년대에 퍼진 역병으로 에든버러 인구의 반이 죽었고, 그 시체들을 처리할 수 없어 외곽에 한꺼번에 매장했다는 이야기에 소름이 돋은 적 있었어요. 그 외곽이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이고, 이 개인정원이 틀림없는 단체 무덤이라는 얘길 런던 출신 친구에게 듣고 반신반의하며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게 정확하겠다는 판단하에 여쭤봤습니다. 결과부터 말하면 다행히도 아니래요. 휴. 할아버지도 이 정원의 역사가 궁금했던 찰나, 안경을 맞추러 모닝사이드의 안경점에 갔을 때 가게 안에 오래된 에든버러 지도 복사본이 걸려있어 찬찬히 살펴보니 이 곳은 그저 공터였을 뿐이고, 시체가 매장된 곳은 The Meadows와 Bruntsfield Links(저 위에 있는 사진을 참고하세요. 애들이 신나서 썰매 타는 곳이 시체 묻힌 단체 매장지)라고 지도에 명확히 표시되어있더랍니다.

땅 밑의 죽은 사람 피 빨아먹고 빨간 버섯이 나는 거라며 이상한 망상의 나래를 펼치던 제게 할아버지의 짧은 역사수업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개인정원 맞은편에 자리한 호루라기 모양 토피아리 담장이 너무 귀여워요. 이걸 다듬으며 얼마나 뿌듯했을까요?


다시 장 보러 가는 길입니다. 테스코까지 빨리 걸으면 15분도 안 걸리는데 눈길 위에서 천천히 걷고, 사진 찍으며 옛 생각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됐어요.

진저브래드같이 생긴 집. 에든버러의 건물들은 특유의 돌 색깔 때문인지 다들 진저브래드 하우스 같아서 맛깔스럽고 귀여워보여요. 하얀 지붕장식도 아이싱 장식처럼 먹음직스러워요.


사거리 교회 옆 semi detached house. 한 지붕 아래 두 가구가 거주하는 주택을 semi detached house라고 해요.


드디어 테스코를 몇십 미터 앞에 두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분홍 장미가 한창이던 이 집의 담에 달라붙어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며 두 명의 동양인 꼬마 아가씨들이 뛰어나왔어요. 한국사람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이곳에서 한국말로 조잘대는 말소리에 놀라 웃으며 안녕~ 장미꽃 사진 좀 찍을게~ 하자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한국 여자아이. 뒤이어 아이들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분이 나오시길래 꽃이 너무 예뻐서 사진 좀 찍겠다고 하며 좋은 데 사시네요 하자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웃으시던 기억이 나네요.  

테스코 옆 펍. 작년에 야심 차게 문을 열자마자 코로나로 타격 입은 술집.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야외에 케이블카까지 모셔놨건만 봉쇄로 영업을 못하고 있어요.
런던에서 시작된 코스타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영업점을 가진 카페예요. 스타벅스는 995점, 코스타는 2467점으로 1위지만 얼마 전 코카콜라가 인수해 미국 기업이 됐어요.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부촌의 집 가격이 궁금해져 검색을 해보았어요. 가장 비싼 집은 30억 원을 조금 웃돌았고 대략 20억에서 25억 원 사이였습니다. 강남의 은마아파트와 맞먹는 가격이죠?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고 흙 밟으며 자연 속에 사는 걸 추구하는 제게 은마아파트와 에든버러 Greenhill Gardens의 집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Greenhill Gardens 고르겠어요.



*스코틀랜드 Dunbar에 사는 지인이 찍어 보낸 전원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도 감상해보세요!


까만 개 보이죠? 이름이 쑤키랍니다. 꼭 우리나라 이름 숙희 같아 정겹고 착한 개예요.
매거진의 이전글 자연식품으로 극복한 코로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