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으로 가는 길

by 꽃마리

내일이면 파리를 떠난다. 아이와 무엇을 하며 보내면 좋을까 생각하다 뤽상부르 정원 앞에서 RER B선을 타고 학생 기숙사 단지 시테 유니베르시테르(Cité universitaire)로 향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 이곳 네덜란드관에서 약 한 달간 묵은 적이 있는데, 그 뒤로 프랑스에 자주 들렀음에도 한 번도 다시 가 본 적이 없었다. 특별히 어디 갈 곳이 있지 않았던 터라 나중에 아이가 살게 될지도 모르는 곳이니 가서 둘러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역 바깥으로 나오자, 트램이 지나갔다. ‘여기에 트램이 다녔었나?’ 싶어 검색해 보니 2006년 말부터 운행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곳에 20세기에 묵었다. 당시에는 한국관이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먼저, 도서관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마침 ‘유럽 문화유산의 날’ 행사로 도서관이 일반인에게도 개방돼 있어서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각자 잠시 시간을 보냈다. 서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쉬라고 만들어 놓은 공간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가 탁자 위에 펼쳐져 있었다. 몽파르나스의 프낙(Fnac)에서도 K팝 소개가 한쪽 벽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개 있던 작은 부스에서는 언어와 관련된 소모임이 진행되는 듯했다.


이왕 왔으니, 내가 묵었던 네덜란드관에도 가 보고 싶어졌다. 거의 다 지워지다시피 한 기억에 의존해 찾아가기에는 단지가 너무 넓었다. 단지 끝자락 어딘가에 있었다는 기억만 났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위치 안내판을 살피며 한참을 걸어 네덜란드관 앞에 도착했다. 프랑스어와 관련된 진로를 찾을 거라 확신하던 젊은 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 것 같아 잠시 멍하니 건물 입구를 바라보았다. 한시적 행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숙사도 일반인에게 공개돼 있었다.


건물 안은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듯했다. 테이블과 의자가 여러 개 놓인 공간은 그대로인 것 같았다. 단체로 온 학생들과 소수의 인솔자가 이 자리에 모여 앉아 회의를 겸해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훅 떠올랐다. 두 명씩 쓰던 방으로 올라가던 길은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한쪽 전시 공간에서는 네덜란드 건축가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시테 유니베르시테르에서 나와 다시 RER B선을 탔다. 이번엔 교외로 나가 보기로 했다. B선의 종점인 생레미레슈브뢰즈(Saint-Rémy-lès-Chevreuse)라는 지명을 보자,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기억으로 가는 길』이 떠올랐다. 소설의 배경이 슈브뢰즈다. 읽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이해에 어려움을 겪은 책이지만, 지명을 보자 반가움이 앞섰다. 일단은 목적지를 그곳으로 정하고 B선을 탔다.


그런데 B선에 오르자 내 앞에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지명이 나타났다. 부르라렌(Bourg-la-Reine)이었다(발음은 ‘부흐라헨’에 가깝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기억을 따라 슈브뢰즈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해 나의 기억을 따라 부르라렌에서 내리기로 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사진을 찍어 한국에 있는 C에게 보냈다. C에게 어딜 가면 좋겠냐고 묻자, 쏘 공원(Parc de Sceaux)에 꼭 가라고 했다. C는 30여 년 전에 이곳에 집을 구해 몇 년을 살았다. C가 살 때 나도 와 본 적이 있지만, C의 집 구조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동네 분위기나 마을의 풍경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았다. 광활하고도 아기자기한 쏘 공원에 발을 들여놓고서야, 쏘 공원엘 가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라렌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설계자가 설계한 공원답게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부르라렌에 머무는 동안 아이와 헤어질 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역 근처 모노프리에 들어가서 밤에 마시면 금세 잠이 든다고 적힌 차를 사고, 기숙사에서 먹을 아이 간식거리도 조금 샀다. '핫플레이스' 같아 보이는 역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아보카도 토스트와 아사이볼을 주문해 천천히 식사를 했다.

다시 RER B선을 탔다. 환승역인 당페르로셔로(Denfert-Rochereau)에서 아이와 헤어졌다. 아이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아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봤다. 아이가 방향을 바꾸기 전에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손을 흔들며 어서 가라고 중얼거렸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그러곤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도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