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에서 파리로 돌아와서는 주로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아이를 파리에 남겨 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주말이었고 아이는 첫 학기 개강 후 일주일을 막 보낸 시점이었다.
토요일엔 몽파르나스 주변에서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입을 아이의 점퍼를 샀다. 저녁 무렵에는 뷔트쇼몽 공원(Parc des Buttes-Chaumont) 근처 태국 식당에서 지인의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이의 학교와 서로 좋아하는 음악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가서 차를 마시자고 해 벨빌(Belleville)의 집까지 완만한 오르막길을 함께 걸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 기웃기웃하는데, 저 멀리에 에펠탑이 반짝이며 서 있었다. 벨빌은 이민자들이 많이 살아 다양한 음식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식당이 즐비했다. 나중에 가 보면 좋을 여러 식당을 소개받았다.
아이는 기숙사로, 나는 숙소로 돌아갔다가 일요일 이른 오전에 다시 만났다. 노트르담 성당 앞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에 딸린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화재 후 복원을 마친 노트르담 성당이 다시 문을 열어 성당 입구부터 줄을 선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카페에 가려고 다리를 건너는데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색감의 배를 타고 무리를 지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매년 9월에 열리는 카약 행사를 본 것이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장관이 따로 없었다.
카페 창가에 자리를 잡고 메모를 하고 있을 때 아이가 도착했다. 창 바깥에서 찍은 내 사진을 아이가 보여 주었다. 모자를 써서 얼굴은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채 연필을 꼭 쥐고 시선이 종이에 가 있는 모습이었다. 마음에 들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 두고 있다.
우리의 한국어 대화 소리에 옆자리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다가 파리로 여행을 왔다며 하루 시간이 남았는데 어딜 가면 좋겠냐고 물어 왔다. 우리는 몽마르트르가 좋겠다고 말했다. 왜 몽마르트르가 좋은지 물어 나름대로 설명을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사이 미국인으로 보이는 딸이 자리로 왔다. 딸은 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는데, 엄마가 처음 보는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의아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대화가 멈췄고, 몸을 각자의 테이블 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먼저 카페를 나갈 때 인사는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희 먼저 갈게요. 여행 잘하고 가세요.” 엄마가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이와 뤽상부르 정원을 오래 산책하고 나서 점심은 생자크 거리(Rue Saint-Jacques)의 중국 식당에서 먹었다. 30여 년 전부터 가던 곳이다. 중국인 형제가 운영하던 곳인데,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다. 중국인 형제 중 홀에서 손님을 응대하던 동생은 점심을 먹고 인사하고 나갈 때 진지한 표정으로 “저녁에 또 봐요(À ce soir).”라고 말해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점심시간에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은 곳이었는데, 주인이 바뀌고 마지막으로 다시 찾았을 때 분위기가 썰렁하고 음식 맛도 예전만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발길을 끊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이와 추억의 식당을 다시 찾았다. 메뉴판에 빼곡하게 적힌 요리 중에 여기서 꼭 먹는 음식은 베이징풍 수프(Potage pékinois)와 양파 소고기 볶음(Bœuf aux oignons)이다. 고기를 먹지 않는 편이지만 여기선 고민을 하지 않았다. 베이징풍 수프는 전분으로 걸쭉하게 만든 국물에 닭고기와 달걀, 죽순과 버섯을 넣어 만든 뜨거운 수프인데, 시큼하면서도 부드럽고 매콤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 일품이다. 양파 소고기 볶음은 진한 갈색이 날 때까지 볶아 단맛을 끌어낸 양파와 소고기를 버무린 요리다. 밥에 비벼 먹거나 숟가락에 밥을 뜨고 그 위에 올려 먹으면 맛이 참 좋다.
우리가 주문할 때만 해도 테이블이 많이 비어 있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들어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다시 예전의 맛과 손님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차례차례 나왔다. 뜨끈한 베이징풍 수프의 시큼한 첫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양파 소고기 볶음은 양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따뜻한 볶음 요리가 이 공간에 있던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중국인 주인 형제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의 좁은 통로를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손님이 없어서 이 식당이 없어지면 어쩌나 했는데, 다시 활기차게 북적거리는 공간을 확인하고 나니 안도감이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