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아비뇽

by 꽃마리

아비뇽은 네 번째 방문이다. 첫 두 번은 30여 년 전 어학연수 시절에 한 번은 혼자, 또 한 번은 친구와 들렀다. 한여름 교황청 계단에서 친구가 찍어 준 젊은 내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세 번째는 10년 전 시어머니, 두 아이와 함께였다. 그해 1월 우리가 기차를 타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프랑스 남부의 님(Nîmes)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사무실에서였다. 편집장을 포함해 12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님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우리가 막 내린 기차역 주변으로 무장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도주한 테러 용의자를 아직 붙잡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정을 앞당겨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이 돼 밤마다 비행기 표를 검색하곤 했다.


님에서 조용히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기차로 30분 거리의 아비뇽에 다녀왔다. 충격적인 테러로 나라 전체가 극심한 긴장 상태였지만, 그런대로 시민의 일상과 여행자의 리듬이 이어지고 있었다. 성곽으로 동그랗게 둘러싸여 있는 아비뇽 시내로 들어섰을 때 지도 없이 교황청까지 찾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리 풍경이 익숙했다.


기억을 떠올리며 걸었다. 교황청 앞 탁 트인 광장에서 아이들이 한참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서는 사람 없는 마당에 아예 양반다리를 하고 털썩 앉아 공기놀이하기 딱 좋은 돌을 가지고 놀았다. 아비뇽 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17세기에 대홍수로 끊어진 생베네제 다리(Pont Saint-Bénézet)에도 올랐다.


당시에 검은색 천이나 종이에 하얀 글씨로 ‘내가 샤를리다(Je suis Charlie)’란 문구를 적어 내걸며 추모에 동참하는 기관이나 개인이 많았다. 시청 건물 앞에도 추모의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글을 쓰던 이들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누군가 가져다 놓았을 펜 한 자루에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그날의 일기를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아비뇽에 혼자 다시 섰다. 엑상프로방스에서 루르마랭과 카바용을 거쳐 TGV를 타고 파리로 가기 위해 아비뇽을 선택한 것인데, 결국 루르마랭과 카바용은 건너뛰고 엑상프로방스에서 바로 아비뇽으로 오게 됐다. 성곽 안으로 들어서자 또다시 익숙한 길이 펼쳐졌다. 곧바로 교황청 앞으로 갔다. 즐비한 카페 중 한 곳을 골라 야외석에 자리를 잡고 버섯과 상추가 담뿍 올라간 크레프를 주문해 먹었다. 아직 숙소 체크인까지 시간이 남아 공원에 가서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거나, 대형 서점에 들어가 책 구경을 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강의 소설들이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띠지를 두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탔던 시청 앞 회전목마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극장 입구에서는 막 지나간 아비뇽의 여름을 더 뜨겁게 달궜을 연극 축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다시 나와 아비뇽 다리를 향해 걷는 길에 모퉁이를 돌다가 무심코 발밑에 있던 무언가를 건드리고 말았다. 거리에서 개와 함께 또는 혼자서 동전 통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이들을 보았기에 내가 건드린 물체가 굴러가며 내는 소리에 누군가의 통을 내가 발로 찬 것임을 직감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할 새도 없이 통을 얼른 집어 들고 흩어진 동전들을 찾아 통에 담았다. 그때 통의 주인이 건너편에서 길을 건너오며 내 쪽을 향해 크게 소리를 쳤다.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키가 큰 젊은 남자가 나를 향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대충 눈으로만 인사하고 마저 동전을 주웠다. 못 찾은 동전이 없는지 다시 주위를 살핀 다음, 허리를 펴고 나서야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걷다가 통을 차고 말았어요. 죄송합니다.” 그는 통을 거기에 둔 자신이 오히려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했다. “미안합니다.”와 “고맙습니다.”가 몇 번 더 오갔다.


그가 통을 내놓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고, 이 일을 계기로 바로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며칠 전 르망에서 파리로 돌아온 날, 숙소로 이동하는 지하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있던 칸으로 들어온 젊은 여자가 “안녕하세요. 동전 좀 주세요. 제가 먹을 수 있게요.”라고 말했다. ‘먹을 수 있게’라는 말에서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지만, 선뜻 동전을 꺼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해 여느 때처럼 눈이 마주치지 않게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내 시선 안으로, 밖으로 드러난 여자의 다리가 들어왔다. 여자의 다리는 내가 생각하는 성인 여성의 그것이 아니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다리를 보고 비로소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잠시 후 지하철에서 내렸고, 나는 심란해졌다. 나를 지목하곤 내 앞에 와서 돈을 달라고 하거나 물건을 사라고 하는 이까지는 외면하진 못하지만, 고개를 돌릴 수 있는 상황이면 늘 고개를 돌렸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던져진 개인의 고통을 담을 마음의 그릇이 좁디좁았다.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순진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일상의 평온이 깨져 버리면, 나라고 별수가 있을까? 내게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사안과 관련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나름의 답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첫새벽에 아비뇽 외곽의 TGV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따로 표를 사지 못해 기사에게 현금 2유로를 냈다. 기사가 표를 내게 주곤 단말기에 찍으라고 말하며 거스름돈을 건넸다. 버스 안에서 동이 완전히 텄다. 사이프러스 여러 그루가 내 옆을 휙휙 지나갔다. 내릴 때 확신이 없어서 뒤를 돌아보았다가 뒷자리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승객이 내리려고 준비하다가 ‘내가 뭘 도와줄 거라도 있나요?’ 하는 표정으로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TGV 타는 기차역 맞나요?”라고 물었고, 맞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차례차례 버스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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