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읽던 책을 내가 꺼내 들었을 때
한 달에 한 번 대구 본가에 내려갈 때 작은 의식을 거행한다. 서울 내 집에 있는 작은 책장에서 읽지 않을 책을 고르는 일이다. 처음엔 큰 책장으로 벽 하나를 메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집주인의 예상치 못한 친절로 TV 옵션을 갖게 된 것 아닌가. 책장이 좁아진 탓에 거기에 놓을 책들을 까다롭게 고르게 되었다. 읽기 위해 산 책, 읽었지만 가끔 꺼내보고 싶은 책, 누군가가 내 집에 놀러 왔을 때 나를 이해할 단서가 될 만한 책, 읽지 않을 거지만 꽂아 두어야 양심의 가책이 덜한 책(영어 표현집 100선 이런 것들)... 아무튼 매달 심사에서 탈락한 책들은 나와 함께 KTX에 몸을 싣고 본가에 새 보금자리를 꾸리려 간다. 우리 집안 책들의 블랙홀, 중앙 도서관, 최종 종착지. 홈 스윗 홈.
엄마 아빠는 처음부터 죽이 잘 맞는 천생연분은 아니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매우 닮아있는 부부가 되었다. 아빠는 책에 국한되기보다는 정보 중독에 가깝고, 엄마는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섭렵한다. 이 부부는 매달 수십 권의 책을 사들이고, 덕분에 딸내미는 매달 새로운 큐레이션의 책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거실 큰 책상에 놓여있는 책들이 가장 따끈따끈한 신간이자, 엄마 아빠가 지금 가장 관심 있어하는 주제들이다. 나는 대구 집에 도착하면 두 분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옷을 갈아입은 뒤 엄마가 내어 주시는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한차레 수다를 떨고, 그간 입고된 신간들을 쭉 훑고 맘에 드는 한 권을 집어 소파에 몸을 푹 파묻는 것으로 고향 방문을 시작한다.
부모님과 작고 잘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없었다. 십 대 시절부터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았고, 아주 가끔 나누는 한두 시간의 통화로 서로의 생각과 일상을 나누는 정도로 대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이 굉장히 비슷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어쩌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 우리는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를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일상에서 부딪히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고, 말로 그것들을 다 공유하기에 사람의 시간과 의식은 너무 제한적이다.
이제는 대구 본가는 내 집 아닌 부모님의 집이다. 부모님의 소파에 앉아 부모님의 책을 꺼내 읽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치 두 분의 머릿속에 들어간 것 같다. 그어놓은 밑줄 때문이다. 그 생김새만 보아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다. 아빠는 굵게 꾹꾹 담아 그린 선. 엄마는 살포시 종이에 얹어 놓은 듯한 선. 작가의 글 위에 그들의 생각이 변주곡이 되어 문장을 타고 흐른다. 독서가 한 화자와의 대화를 넘어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장이 된다. 나는 가끔 피식 대기까지 한다. 그래 아빠라면 여기에 줄 칠 것 같았어. 엄마 여기서 충격받았구나, 하고. 한 마디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그 어떤 것 보다 깊고 농밀한 생각의 나눔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들의 집에 앉아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빠는 저 멀리서 TV를 보고 있고, 엄마는 이불을 덮고 단잠을 자고 있다. 나는 내 고향에 와 있다.
내가 줄 그어가며 읽던 책을 누군가에게 내어준다는 건 그런 일이다. 누군가가 아주 은밀하게 내 생각의 흐름을 함께 읽게 되는 것. 말하지 않아도 나에 대해 알게 되는 것. 어쩌면 말하는 것보다 더 섬세하고 깊게 나를 이해하게 되는 것. 지난주 친구와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을 교환해 읽었다. 친구는 내 앞에서 내가 밑줄 친 구절들, 가끔 끄적여두었던 메모들을 함께 읽으며 자신의 생각들을 나눠 주었다. 밑줄 친 책을 보여주는 건 굉장히 사적인 영역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본인도 쉬이 보여주지 않게 된다고 했다.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밑줄을 보여주고, 그 밑줄을 읽은 생각을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감을 즐거워했다. 그녀는 밑줄은 긋지 않았지만 내 생각이 났다는 책을 소개해 주었고, 나는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눈물이 그렁거림을 느꼈다. 누군가가 책을 보고 나를 떠올렸다는 건 멋진 일이다.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건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