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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Nov 03. 2020

프랑스의 역사 16

프랑스 대혁명 1


1789년 7월 14일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신분제에 기반한 구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세계 역사가 민주주의로 발전해 나아가는

전환점이 된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신분은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인 평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 제도는 절대왕정이

성직자와 귀족의 특권을 보호하는 체제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2%에 해당하는 성직자와 귀족이

프랑스의 토지와 재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나,

세금은 면제해 주었지요. 따라서 제3신분인

평민이 국가의 세금을 모두 부담하고 부역의

의무도 짊어졌습니다.


루이 16세는 선대로 부터 어어져 온

사치스런 생활과 많은 전쟁 참여로 적자 상태의

프랑스를 이어 받았습니다. 재정 장관들이

몇 번에 걸쳐 개혁을 시도했으나, 그 때 마다

특권층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우유부단한

루이 16세는 개혁정책을 밀어부치지 못하고

철회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 독립 전쟁까지 도와주면서

더욱 재정이 악화되었고, 1788년에는 최악의

흉년까지 겹쳤습니다.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는

1789년 5월 5일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하였습니다. 삼부회에 참석한 제3신분은

시민계급으로서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계몽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평등한 권리와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회 할 때 부터

검은색 지정복을 착용해야 했는데 국왕주위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이

앉아있었지요.


삼부회 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의원수는 제3신분이 500명, 귀족이 188명,

성직자가 247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진보적 사상을

가진 일부 귀족과 성직자가 제3신분에 동조하여

제3신분이 유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표결방식

때문에 충돌하였습니다. 즉, 귀족과 성직자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제3신분은 머릿 수별

표결방식을 주장하였습니다.


제3신분은 자신들의 요구가 거부 되자 별도로

국민의회를 조직하고 새로 헌법을 제정할 때 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들이 회의한 장소가 테니스 코트장이었기 때문에

테니스코트 서약이라고 부릅니다.


테니스코트 서약 출처 위키피디아


이제 삼부회는 문을 닫게 되었고 베르사유

궁전에는 군대가 투입되었습니다.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7월 14일 총과 탄약을

찾기 위해 파리 중심부에 있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했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출발점인

이 사건은 곧 폭력적인 양상으로 번져 곳곳에서

살인과 방화, 약탈이 이어졌습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출처 위키피디아


같은날, 왕은 온종일 사냥을 했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일기를 쓴 후,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이틑날 아침,

신하로부터 소식을 듣고 "반란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신하는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8월 4일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고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다.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재산권은 신성불가침하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중에서




오늘날 까지 통용되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최초로 문서화 된것입니다. 루이 16세는

이 문서를 한 달 이상 승인하지 않고 버티다가

파리의 평범한 여성들이 빵을 달라며 베르사유로

행진해온 시위에 굴복하고 선언문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문서상 국민이 주권자가 되었을 뿐,

아직은 군주체제였습니다


혁명의 와중에 재정문제는 더욱 악화되어

국민의회는 교회재산을 국유화하여 매각하였습니다.


1791년 라파예트가 주도하는 국민의회는

최초의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헌법은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여

왕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투표권은 보통선거가 아니라

일정액의 세금을 납부하는 유자격 시민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즉 혁명은 민중에게 의존했으나

헌법은 부르주아 계급 위주로 제정된 것이지요.


그러던 중 국민의회를 양극단으로 분열시킨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불안에 떨던 루이 16세가

가족을 데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하려다

국경근처 바렌에서 발각되어 파리로 송환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혁명의 느린 속도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급진파가 왕의 퇴위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라파예트는 실각하여 왕당파가 되고 반대파는

공화정을 수립하기 위해 결집하였습니다.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파는 자코뱅파

불리우며 33살의 젊은 변호사 로베스피에르

리더로 세웠습니다.


1791년 9월 우여곡절 끝에 헌법은 제정되었고

그에 따라 국민의회는 해산되었으며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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