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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시온 Oct 30. 2020

프랑스의 역사 15

루이 16세, 마리 앙뜨와네뜨, 부르봉왕조


루이 16세는 루이 15세의 손자로서 1774년

즉위하였으나 ,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왕입니다.


루이 16세 출처 위키피디아


루이 16세는 즉위 시에 국민의 사랑을 받는

왕이 되고 싶다고 말했고 선정을 베풀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격상 결단성이

부족하여 누구에게든 조언을 요청하였고

우유부단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소 사냥과 자물쇠

만드는 취미에 빠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6세에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 딸인 마리 앙뜨와네뜨와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녀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왕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대신 랑발르 부인, 폴리냐크 부인, 

그리고 아르투아 백작 (샤를10세)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마리 앙뜨와네뜨 출처 위키피디아


국민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던 왕은 진보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튀르고를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튀르고는 생산을 늘리고 세출을 줄이려고 했습니다.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 곡물거래를 자유화 할 것,

부역을 폐지하고, 도로 건설 비용을 지주에게

부과하는 한편 특권층에게도 과세하려 했습니다.

또 폐쇄적인 길드조직과 동업조합제도도 폐지하려

했으며 왕비의 지출도 감독하겠다고 하였지요.


이러한 개혁 정책은 거의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곧 그는 왕비와, 은행가, 고등법원

그리고 곡물독점업자들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왕은 튀르고를 21개월만에 파면하였고

모든 개혁은 폐지되었습니다.


아메리카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영국에 복수하기 위해 식민지를 지원하고

비밀리에 무기를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미독립선언 이후,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파리에 온 벤자민 프랭클린은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루이 16세는 아메리카 합중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동맹조약을 체결했으며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미 독립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신임 재무 장관 자크 네케르가 전쟁비용 조달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1776년에서 1781년까지

6억 리브르라는 거액을 융자하였습니다.


미 독립 전쟁이 승리한 후, 프랑스는 됭케르크를

요새화할 권리, 세네갈 영유권,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영향력 행사 등의 이권을 확보했습니다.

그러나 10억 리브르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 채무도 함께 떠안게 되었지요.


이에 따라 고등법원은 네케르의 파면을 요구했고

왕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새로운 재무 장관으로

임명된 샤를 드 칼론은 부족한 적자를 메꾸기 위해

귀족과 성직자에게 과세를 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튀르고와 네케르도 시도한 바 있는데

이번에도 특권계급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이익을 지켰습니다. 특권층의 강력한 요구로

칼론 또한 파면되었고 툴루즈의 대주교

로메니 드 브리엔이 수상이 되었는데 그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왕비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폴리냐크 부인과 함께

값비싼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가장 무도회를

즐기고 도박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 출처 픽사베이


오스트리아 왕 요제프 2세가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누이 동생인 마리 앙뜨와네뜨로 부터 

무슨일이 있어도 오스트리아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왕비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반감은 

더욱 고조되어 오스트리아 여자가 국가의 안전에 

 위험한 존재이며 재정적자가 왕비의 낭비벽 

때문이라고 공격했습니다.


국고가 텅비어 더이상 파산을 모면할 방책이

없음을 깨달은 왕은 국민들이 지지하는 네케르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굶주리고 분노한 군중은

왕비를 적자 부인이라며 욕설을 퍼붓고

왕비의 심복 폴리냐크 부인의 인형을 

하수구로 끌고 다녔습니다.


네케르는 1789년 1월 1일 제3신분의 정원을 

두 배 늘린 삼부회를 소집하겠다고 공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별 투표는 언급하지 않은 상태였지요.


이제 프랑스는 대혁명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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