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를 깨우다.

중국 사회의 조용한 각성

by ShionJins
본 칼럼은 希望之声(Sound of Hope)의 기사 “于朦胧事件引觉醒潮 专家解答民众三退关切问题(위멍룽 사건이 각성 열풍을 불러일으켜: 전문가들은 국민들의 삼퇴관련 우려를 언급하였다.)” (2025.10.25) 을 참고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링크:https://www.soundofhope.org/post/908476)


2025년 가을, 중국 사회가 다시 한 번 깊은 충격에 빠졌다. 한 젊은 배우(于朦胧|Alan Yu, 1988.5.16.-2025.9.11)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단순한 연예계 비보를 넘어, 체제와 진실을 향한 거대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반향은 압도적이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온라인을 통해 “퇴당·퇴단·퇴대”를 선언하며, 자신이 속한 정치 조직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정치적 반발이 아니라, 억눌린 윤리의식이 스스로를 회복하는 집단적 각성의 장면이었다.


출처: 나무위키 "무산계급문화대혁명(无产阶级文化大革命)" 사진



중국에서는 개인의 고통이 집단적 공감으로 확장될 때, 그것이 곧 사회적 전환의 징후가 된다. ‘쇠사슬녀’ 사건, ‘후신위 실종 사건’, 그리고 이번 사건까지—이 모든 사건은 권력과 진실 사이의 깊은 침묵 구조를 드러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사적인 비극을 넘어, 공적인 질문이 된다. 사람들은 “왜 진실을 말하는 자가 침묵당해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두려워졌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음은 결국 양심의 언어로서의 ‘퇴당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현상을 정치적 저항으로만 해석하기엔 부족하다. 많은 이들이 “퇴당”을 말하지만, 그 언어는 반체제의 구호가 아니라 자기해방(self-emancipation)의 표현에 가깝다. 중국의 당 조직은 단순한 정치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학교의 입단식, 공무원의 충성서약, 직장의 인사체계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정체성의 틀이다. 그렇기에 “퇴당”은 행정적 이탈이 아니라 정신의 탈식민화(psychological decolonization)다.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말했듯, 진정한 해방은 외부 권력의 붕괴가 아니라 내면의 복종과의 결별에서 비롯된다.


이번 사건은 그 결별의 순간을 보여준다. 시민들은 조직적 충성 대신, 양심적 선언을 택했다. 그것은 “나는 이 체제의 일부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나는 거짓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윤리적 결단이다. 그리고 그 결단은 디지털 공간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의례화되었다. 온라인 서명, 화명(化名) 선언, 가상 추모와 같은 행위는 감시 체제 속에서 시민이 만들어낸 비가시적 저항(invisible resistance)이다. 이들은 더 이상 거리에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일상의 언어로 묻고, 감정으로 기록한다.


출처: https://tuidang.epochtimes.com/index/showpost/id/33432819
(위 스크린샷 전문)
중국 공산당 및 그 산하 조직에서 탈퇴
저는 오랜 당원입니다. 9월3일 열병식을 거행한 직후, 위멍룽 학살 사건에 깊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중국 공산당과 그 산하 조직에서 탈퇴할 것을 맹세합니다. 중국 국민 여러분, "미 제국주의자들은 우리를 파괴하려 한다"라는 주장에 속지 마십시오. 강력한 중국 군대가 인민의 행복을 의미합니까? 대기근, 문화대혁명, 6.4사건, 파룬궁 박해, 그리고 올해의 위멍룽 사건은 모두 미국의 소행입니까? 중국 국민들은 여전히 인터넷에 접속하려면 만리방화벽을 넘어야 합니다. 미국이 인터넷을 차단하고 있습니까? 중국 공산당 "공산당" 2세대는 왜 자식들을 러시아가 아닌 미국에 보내려고 합니까? "미 제국주의자들은 위를 파괴하려 한다"는 말은 시진핑이 국가 통치의 무능함을 은폐하기 위한 최고의 변명임이 분명합니다! (2025년 10월 21일 성명)


“선한 사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라는 문장은 이번 흐름의 핵심을 압축한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각성의 언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사회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 불렀다. 고정된 권위와 제도가 녹아내린 시대, 사람들은 이제 디지털 윤리의 언어로 도덕적 정체성을 다시 세운다. 검열의 시대에 진실을 말하는 일은 더 이상 대규모의 집회가 아니라, 데이터 위의 양심 기록으로 전환되고 있다.


2000년대 초부터 이어진 이른바 ‘삼퇴 운동’은 이제 보통 시민들의 윤리적 실천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해외 망명자와 비판적 지식인의 전유물이었지만, 지금은 교사·노동자·청년들이 일상의 언어로 참여한다. 현재 ‘삼퇴’ 참여 인원은 4억 5천만 명을 넘어섰다. 일각에서는 “당원 수가 1억 명 정도인데 어떻게 4억 명이 넘을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되지만, 전문가들은 ‘퇴당’이 단순히 당을 탈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산당·공청단·소선대(少年先锋队) 등 세 조직에서의 탈퇴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는 정치적 조직이 아니라 세대 전반에 퍼진 ‘충성의 언약’에서 벗어나는 행위다.


2025년 10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퇴당·퇴단·퇴대 선언자는 4억 5,300만 명을 넘었고, 한 달 새 85만 명 가까이 증가했다고 집계된다. 이 압도적인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집단적 도덕 감수성의 부활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는 집단 도덕의 재구성(collective moral reconstruction)이다. 공포가 신념을 대체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시 “진실”, “양심”, “자유”라는 단어를 복원하고 있다. 그 언어의 부활은 체제의 붕괴보다 더 큰 변화를 예고한다.


이번 사건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바로 ‘죽음 이후의 정치(politics after death)’다. 진실이 봉쇄된 사회에서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시민의 윤리적 자각을 촉발하는 거울이 된다. 제도 밖에서 일어나는 이 각성은 새로운 형태의 시민참여다. 선거도, 조직도, 시위도 없이, 개인이 양심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선언한다.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합리성(lifeworld rationality)”이 체제의 식민화를 돌파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시민의식은 더 이상 국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가 당장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각성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시민종교(civic religion)’의 씨앗을 본다. 그것은 신을 향한 신앙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윤리적 신념이다. 사람들은 이제 국가의 구원 대신 양심의 자유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증명한다.


이 사건은 단지 한 배우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무엇이 인간다운가”를 다시 묻는 순간이었다. 한 개인의 죽음이 집단의 각성을 이끌 때, 사회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 변화는 느리고, 조용하며,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향한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본능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그 각성을 잊지 않는 한, 그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 정신의 가장 깊은 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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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다른 나라의 한 연예인의 죽음이, 제가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시민참여’ 카테고리에는 주로 참여, 공산당, 우멍롱 관련 글이 주입니다. 이번 글도 그 연장선에 있구요. 아직 49제도 지나지 않은, 제가 애정하던 한 인물의 죽음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지만, 단순한 감정의 기록만은 아닙니다.


벽 안(중국)의 그들은 사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상하이에서의 거리시위, 백화점 등 전광판을 활용한 표현, 그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고 유추되는 가수/기획자/작가 등 문화예술계 종사자 17인의 행보에 대한 보이콧, 기획사 등 관련 주식 하락, 사건이 벌어진 멘션 대량 매각건 등 이 사건은 꾀나 크게 이슈화되고 있는건 사실입니다.


한 개인의 죽음이 어떻게 사회적 각성으로 번지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와 외교, 나아가 인간의 윤리와 양심의 문제로 이어지는가—그 질문이 바로 제가 브런치스토리에서의 시민참여를 쓰게 된 진짜 계기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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