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렌체"를 보고
그 이유를 논리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메디치 가문의 시간들이 스며든 돌과 벽과 골목을 걷다 보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조차 함부로 보이지 않는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의미가 있다는 말로는 더 부족하다. 피렌체는 사람에게 감각을 요구하는 도시다.
이 도시는 늘 영화 속에 있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 〈인페르노〉, 〈한니발〉, 〈전망 좋은 방〉, 〈무솔리니와 차 한 잔〉. 장르도 시대도 다르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피렌체를 ‘배경’이 아닌 ‘정서’로 사용했다. 이야기가 그 도시를 빌려 말을 걸고, 인물은 그 안에서 조금 느려진다. 피렌체가 가진 ‘느낌적인 느낌’은, 분명 실재한다.
나는 피렌체 근교 피에솔레를 더 좋아했다. 버스 종점 앞 작은 카페에 앉아, 해 질 녘의 피렌체를 내려다보던 기억이 있다. 도시 전체가 한 호흡으로 가라앉는 시간이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나는, 왜인지 모르게 노을을 보며 울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무엇을 애도하고 있었는지. 다만 그 장면은 지금도 정확한 색감과 공기로 남아 있다.
그래서였다. 이창열 감독의 영화 〈피렌체〉가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퇴근 후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글로벌 스테이지 할리우드 영화제에서 작품·감독·각본 3관왕을 수상했다는 이력, 그리고 ‘피렌체’라는 제목이 주는 기대. 내가 알고 있는 피렌체와는 다른 얼굴을 보여주리라는 예감도 있었다.
초반의 감상은 솔직히 당혹에 가까웠다. 빈 좌석이 많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간에 하나둘 자리를 뜨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 속에서 마주한 김민종의 얼굴. 내가 기억하던 ‘민종 오빠’는 없었다. 대신, 삶에 지친 중년 남성이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고, 외면하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화면은 친절하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땅에서 올라오는 흙비린내처럼, 날것의 현실이 잔잔하게 던져졌다. 미화도, 감정의 안내도 없었다. 이 영화가 왜 대중에게 불편할 수 있는지, 나는 초반부에 충분히 이해했다. 이것은 위로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관객을 배려하는 영화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화의 중심은 그 이후에 있었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것은, 한국 사회의 중년 남성이다. 한때는 혈기왕성했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청년. 그러나 치열한 경쟁과 비교,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아오며 사랑도, 관계도, 일도,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마저 소진된 인간. 그는 실패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성실하게 사회의 요구를 수행해온 인물이다.
그가 다시 피렌체로 향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는, 함께 빛나던 친구가 있다. 영화는 이 만남을 통해 과거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스스로를 이렇게까지 잃어버렸는가라고.
중후반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분리해 바라보는 장면에서 영화는 비로소 감정을 연다. 그 감정은 폭발하지 않는다. 아주 미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열린다. 스스로를 위로하는 법을 잊어버린 인간이, 늦게나마 자신의 감각을 다시 만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 장면에서 울었다. 이게 울 일이냐고 스스로에게 묻다가, 더 울었다. 휴지도 준비하지 못한 채, 펑펑 울지는 못하고 그저 조용히 무너졌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울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울 수밖에 없는 지점에 데려다 놓는다.
성과, 비교, 사회가 요구한 삶의 방식. 그 모든 것을 중년이라는 시간 이후에 내려놓고, 또 다른 나로 살아가기 위해 버리는 장소가 피렌체라는 설정은, 지나치게 정확했다. 이 도시는 늘 그랬다. 무엇을 더 얻기보다는, 무엇을 내려놓게 만드는 곳이었다.
〈피렌체〉는 아름다운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정직한 영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을 용의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