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성의 이름으로 잔혹해지는 사회

‘방생인간’이 드러낸 인간의 윤리 실패

by ShionJins
image.png 20231018, 아이치이 방영, <방생인간>, 송위룡, 문기 주연

우리는 흔히 기술의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 더 무서운 것은 윤리의 미래다. 기술은 언제나 가능성을 넓히지만, 인간은 그 가능성을 거의 본능적으로 필요라는 명분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그 필요가 충족되는 순간, 인간은 방금 전까지 필요했던 존재를 위험한 존재로 재분류할 줄도 안다. 방생인간이 잔혹한 이유는 복제인간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잔혹한 이유는 이 드라마가 필요가 윤리를 대체하는 순간을 너무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현재의 인간이다.


드라마의 세계에서 복제인간은 인간의 욕망—더 편리한 삶, 더 안전한 질서, 더 매끈한 관계, 더 통제 가능한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산업이 급팽창하고, 그 기술이 범죄에 활용되며 사회적 불안이 커지자 국가는 금지와 소환이라는 형태로 복제인간을 관리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복제인간이 위험해졌다가 아니다. 더 결정적인 장면은 인간이 만든 존재를 인간이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속도다. 인간의 필요로 탄생한 존재는, 인간의 필요가 바뀌는 순간 곧바로 제거 가능한 대상이 된다. 이때 윤리의 질문은 늘 뒤늦게 도착한다. 그들은 인간인가?가 아니라,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먼저 온다. 필요는 곧바로 정책이 되고, 정책은 곧바로 처분이 된다.


이 드라마의 핵심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을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가?” 임마누엘 칸트의 언어로 말하면, 인간은 결코 단지 수단이 아니라 언제나 목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이 필요를 위해 제작된 존재로 놓이는 순간, 그 존재는 태생부터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여기서 사회는 잔혹해지는 대신 합리적이 된다. 수단은 관리·활용·폐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합리성의 얼굴이, 윤리의 붕괴를 가장 조용하게 진행시킨다.


이 지점에서 이기심은 단순한 심리 묘사가 아니라 윤리학의 핵심 문제가 된다. 인간의 이기심은 내가 더 편해지기 위해 타인을 착취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위험한 이기심은 착취의 구조를 정책과 제도로 바꿔버리는 이기심이다. 드라마의 명모 조사팀, 복제인간 소환령, 실험 시스템은 개인의 악의보다 훨씬 더 무섭다. 개인의 악의는 비난하면 끝나지만, 제도화된 악의는 질서와 안전이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윤리는 선택지가 아니라 비용으로 취급된다.


드라마에서 복제인간 연쇄살인 범인이 그들을 위한 일이라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장면은 불쾌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폭력은 흔히 증오의 언어가 아니라 구원의 언어로 자신을 세탁한다. 바로 이때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른다. 거대한 악은 종종 나는 옳은 일을 했다는 자기합리화의 언어로 실행된다. 악이란 언제나 특별한 광기가 아니라, 나는 합리적이다라는 평범한 확신에서 출발할 때가 많다.


하지만 방생인간이 더 차갑게 보여주는 것은, 최종 악의 얼굴이 복제인간이 아니라 권력 내부의 통제 욕망일 수 있다는 점이다. 복제인간의 초기 집념(목적)을 없애는 기술은, 복제인간을 인간 사회에 순응시키는 기술처럼 보이지만, 곧 인간의 감정까지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확장된다. 권력은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사람을 관리 가능한 존재로 만드는 방식으로 더 오래 지속된다. 신체, 감정, 선택을 위험 관리의 이름으로 조정할 때, 사회는 안전해지는 대신 비인간화된다. 권력은 폭력의 형태가 아니라 관리의 형태로 더 오래 지속된다.이때 통제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라는 말로 전달된다.


자유는 내 몸이 내 것이라는 감각, 그리고 내 삶의 목적을 내가 정할 권리다. 복제인간은 태어나는 목적이 이미 외부에 의해 부여된다. 그러니 그들의 비극은 차별받는다가 아니라 더 근본적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유의 토대가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살아갈 권리보다 먼저 존재할 권리부터 의심받는다.


여주 안치우의 서사는 이 점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초기 집념이 바뀌고, 기억이 소실되며,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설계된 존재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개인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기술적 변화가 아니라 정치철학적 사건이다. 사회는 그 개인에게 권리를 부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지만, 존재는 이미 권리의 주체가 되려 한다. 여기서 충돌이 폭발한다. 사회는 위험을 말하지만, 존재는 자유를 말한다. 사회는 관리 대상을 말하지만, 존재는 존엄을 말한다. 결국 충돌의 본질은 정체성이 아니라 권리의 인정 여부다.


사회악은 복제인간이 아니라, 필요를 이유로 존엄을 유보하는 인간의 방식에서 자란다. 정확히는, 존엄을 원칙이 아니라 조건부 옵션으로 만드는 순간 사회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인간은 필요할 때는 만들어내고, 불편해지면 금지하고, 위험해지면 제거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합리적 선택”으로 포장한다. 방생인간이 남기는 불편함은 바로 여기서 온다. 우리는 복제인간이 등장하는 미래가 아니라, 필요가 윤리를 대체하는 현재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현재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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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를 남자 주연 덕분에 찾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이러한 시나리오를 드라마화했다는 것도 좀 재미있었고, 결국 겸열로 어느정도의 톤 다운은 있었겠지만, 나름 생각할 이슈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OST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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