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인 서석화 Feb 14. 2019

기억이 아픈 이유

서석화의 참말 전송- 10

               기억이 아픈 이유     



각인된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각인된 얼굴이기 때문이다. 각인된 몸짓이기 때문이다. 각인된 내음이기 때문이다. 백 년이 흘러도 그 자리 그 시간으로 데려간다. 데려가서 내게 들려주고, 내게 보여주고, 나를 붙잡아주고, 내 오감을 집중시킨다.     


기억이 아픈 이유는 그렇다. 내가 나에게 새긴 시간의 문신!  


 ©픽사베이     


사포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고, 사방의 시간을 끌어와 그 자리에 밀어 넣어도 숨구멍 하나 열리지 않는다.      


천일쯤 자고 나면 딴 세상일까? 천일의 열 번을 눈 감고 있으면, 돌투성이 샛길이라도 가슴에 뚫릴까? 기도하다 두 손 얼어 열 개의 고드름 쩍쩍 붙는 소리 들리면, 멈춘 달력 찢어내며 오늘로 돌아올까? 일 초마다 헛생각, 헛꿈, 헛이름 부르면, 엉뚱한 사람 되어 엉뚱한 세상에서 정 붙이고 살 수 있을까?      


육십 년도 아직 못 살았는데 육만 개도 더 넘는 기억이 무겁다.      


지난 시간의 소환, 기억! 과거는 늘 과장되어 오는 것이지만 그래서 현재보다 선명하다. 미래보다 진짜이며, 꿈보다 적나라하다.       


사십 년이 흘렀어도 구구단보다 정확하게 흘러나오는 오정선의 ‘님을 위한 노래’ 가사! 그런 노래가 있다고 내가 말한 사람과, 그 노래를 불러보라고 내게 말한 사람. 

동대구역과 서울역과 대구 북부 터미널과 신림동과 등촌동과 잠실 주공과 모범 부동산과 장미 아파트! 국민은행과 안동과 울음과 무서움과 동부간선도로와 창동과 효 요양병원. 보람상조와 을지병원과 창 5동 성당과 용미리 제2 묘역. 바람과 햇살과 소나기와 구름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과 자꾸만 헛짚어지는 땅과 꼭꼭 여민 커튼과 앙다문 입술...  

       

©픽사베이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 삼백육십 다섯 개씩 말하라 해도 막힘없이 술술 튀어나와 내 몸에 산을 만드는 것, 들!     


기억이 아픈 이유는 그렇다. 내가, 거기, 그 시간에, 울고 웃고 생생하거나 앓으며 있었다, 는 것!     


최근에 많은 사람의 ‘기억’을 보고 들은 날이 있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스승의 1주기를 맞아 제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그분의 묘까지 가서 합창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역시 합창으로 울음도 쏟았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 다른 사람을 그리워했다. 그날 스승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 아니었다. ‘너’의 스승이었고, ‘나’의 스승이었다.      


기억이 아픈 이유는 그렇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A에게는 두어 줄 격려 글로 남았고, B에게는 ‘추워, 추워’ 가녀린 목소리로 남았고, C에게는 프뢰베르의 시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로 남았고, D에게는 ‘가로등에 미등이 켜지는 시간’으로 남았고, E에게는 ‘멸치와 고추장’으로 남았고, F에게는 ‘박카스와 우루사’로 남았고, G에게는 이름도 알 수 없는 ‘가는 담배’로 남았고, H에게는 ‘병맥주’로 남았고... 그리고 Z에게는 ‘벌판 같은 외로움’으로 남았다.      


마흔두 명이 모인 자리에서 스승은 마흔 두 사람이 들어앉은 무덤으로 우리를 맞았다.      


일동 스승님께 묵념!     


같은 시간에 같은 각도로 머리를 숙였지만, 그 잠깐의 시간 우리는 ‘우리’의 스승을 만난 게 아니었다. 너의 스승이 나에게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고, 나의 스승이 너에게는 이름도 가뭇한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스승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 스승의 나이를 훌쩍 뛰어넘은 마흔 두 명, 하나의 무덤 앞에서 우린 각자 다른 하늘을 지고 있었다. 각자 다른 땅을 밟고 있었다. 마흔두 개의 하늘과 마흔두 개의 땅이 각자의 가슴에서 치솟거나 흔들렸다. 


©픽사베이

     

각자의 기억은 각자가 가진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돌아오던 길, 서울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엔 이미 밤이 와 있었다.      


모르겠다. 나는 ‘밤’이었는데 너는 또 ‘무엇’이라 할지!      


기억은 그래서, 아프다! 


*논객닷컴 게재 원고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라서 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