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교 때 밤마다 즐겨듣던 '이주연의 영화음악' 오프닝 음악이 '이터널 선샤인'의 OST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그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2015년 재개봉 당시 영화를 보러 광주에 갔다. 끝나고 이동진의 온라인 GV가 있었는데 몬탁에 다녀온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저것 자랑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막차 시간 때문에 중간에 나왔지만 그때 받은 영화 포스터와 책갈피를 오랜 시간 간직했다. 언젠가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
우리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져 있던 대주아파트 비디오 가게 아줌마는 우리 집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시험 기간에만 갔으니 일 년에 4번 정도밖에 가지 못한 셈인데도 단골 관리가 확실했다. 영화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아드레날린 찌릿한 영화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중학생이 보기에는 선정적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네 비디오 가게에서 '구미호'를 빼돌려 몰래 보던 경험이 아니었다면 꽤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집 앞에 만화&비디오 가게가 들어왔을 때 '언플러그드'와 '오디션'을 봤다. 처음 본 만화책이다. 비디오까지 한꺼번에 빌릴 수 있었지만 비디오는 꼭 대주아파트 비디오 가게로 갔다. 난로 기름 냄새가 풍기던 주황빛의 비디오 가게 안에는 포르쉐처럼 날렵하게 생긴 되감기 기계가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3.
고등학생이 되고 수업 대신 즐겨 듣던 '윤종신의 두시의 데이트'에 고정으로 출연한 김세윤 기자의 영화 이야기가 재밌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비디오 가게에서 알바했다는 이야기를 거기서 처음 들었다.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지하철역 안에서 '필름 2.0'과 '씨네 21'을 샀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필름 2.0'을 정기구독했는데 중간에 회사가 망했는지 발행을 중단했다. 환불해 주겠다는 안내 따위는 없었는데도 화가 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남겨 두었다. 몇 번 독자의견란에 짧은 글이 실렸다. 짐 캐리가 출연한 공포영화의 굿즈(수첩, 펜, 인덱스)를 받았는데 그 영화는 끝내 보지 못했다.
4.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제천영화제의 '원섬머나잇'티켓을 주는 이벤트에 당첨되어 처음으로 제천에 갔다. 전주에서 후배 한 명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갔다. 잠은 찜질방에서 잤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다음 해에는 동기와 갔고.. 한동안 여름마다 제천을 찾았다. 영화제 기간이면 청풍호 앞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곤 했는데 멀리서 이주연 언니를 발견했지만 부끄러워서 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5.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프리윌리'다. 백운아트홀에서 봤다. 불바다에 고래가 점프하던 장면, 주인공과 마주 보며 인사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백운아트홀은 공연장이라 영화도 하고 공연도 했다. 이봉원 아저씨가 엠씨를 보던 마술쇼도 봤다. 공연 전에 주섬주섬 오징어나 과일을 꺼내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음식을 못 먹게 했는데 껌이나 사탕 같은 것은 자기 손에 뱉으라고 했다. 영화만 틀어주는 극장에 처음 간 것은 99년이다. 명절이었는데 다 자고 있는 밤중에 막내 고모가 나를 슬쩍 불러 영화를 보러 가겠냐고 했다. 많은 조카들 중에 나만 콕 찝어 데려가는 것에 이미 만족감이 높아진 나는 가족들 몰래 할아버지 댁을 빠져나왔는데 사촌 동생이 눈치를 챘는지 서둘러 쫓아 나왔다. 두고 가려 했지만 택시가 잡혀서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결국 막내 고모, 고모부, 동생, 나 이렇게 극장에 갔다. 급하게 나온 사촌 동생은 어른들 신는 고무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사람들이 의식되었는지 고모가 멋쩍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때 본 영화는 '미이라'다. 왜 '미라'라고 안 하고 '미이라'라고 할까 궁금했다. 영화는 재밌었다. 그날 처음으로 팝콘을 먹었다. 그때 이후로 막내 고모와 뭘 한 적은 없다. 원래 조용하던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조용해졌고 막내 고모는 좀 웃기고 술 잘 먹는 어른 정도로 곁에 있다. 몇 개월 후에 백운아트홀에 '미이라'가 상영했고 표가 생겼는데 이미 본 영화임에도 보고 싶다던 동생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한 번 더 보러 갔다. 한 번 더 보니 처음만큼 재밌지는 않았다.
6.
'엽기적인 그녀'가 개봉하자마자 친구와 극장에 갔다. 엄청 큰 극장 안에 꽉 찬 사람들. 웃긴 장면이 나오면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극장이 넓어서 대사가 울렸다. 음악이 좋았다. 많이 웃어서 좋았는데 친구는 울었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종이 울렸고 종소리와 함께 조용해지던 극장 안의 공기가 기억난다. 외국 영화를 볼 때면 글자가 잘 안 보여서 매번 불편했다. 언젠가부터 극장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영화를 선택한 것, 사람들이 극장을 잘 찾지 않는 것이 이유겠다. 가끔 광주극장에 가면 소리가 울리는 옛날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극장이 꽉 차는 것은 여전히 보기 힘들다. 동네 극장에서 나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은 좋다. 아주 좋다.
7.
대학교 때는 영화를 2천 원에 봤다. 통신사 할인에 극장 할인, 요일 할인까지 더 하면 그 가격이었다. 팝콘도 공짜로 먹었다. 팝콘을 마음껏 퍼갈 수 있는 통이 있었는데 극장에서 주는 종이컵에 영화 포스터를 말아 더 많이 담아 먹었다. 알바 하던 친구 찬스로 영화도 그냥 보는 날이 많았다. 동기들과 '빨간 모자의 진실'을 봤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없다.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다. 지금 봐도 웃을지는 모르겠다. 수업 끝나면 시내에 가서 영화 보고 미스터 피자 가서 샐러드 배 터지게 먹었다. 미스터피자를 같이 가던 06학번 동기들과 mp6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별건 없는데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영화를 만들 때마다 크레딧 맨 마지막에 'mp6 n 번째 작품'이라고 넣었다. 극장에 안 가는 날에는 중앙도서관에 가서 DVD를 빌려 봤다. 도서관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추천받은 영화들을 봤다. 지루하면 2배속을 해서 보기도 했다. 최근에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라는 영화를 봤는데 저 때 봤다면 분명 2배속해서 봤을거다. 나이 먹고 진득해져서 멍하니 봤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라도 보긴 본 거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봤다. 교수님이 꼭 보라고 했었는데 이상하게 그때는 보기가 싫더라. 제목이 이상해서 그런가.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도로명인 줄 알았으면 봤을까. '400번의 구타'는 '구타유발자들'을 본 이후에 봤고 '자전거 도둑'은 이번 달에 봤다.
8.
이번 주 수요일 스터디에서 다루는 영화들이 '이터널 선샤인'과 '클로저'다. 둘 다 아주 좋아하는 영화라 여러 번 봤다. 이터널선샤인을 막 틀었을 때 흘러나오던 그 음악이 방 안에서 라디오를 듣던 나로 데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