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이 희망입니다
흔히 말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며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밥 먹고 공부만 하면 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어!’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자존감이 곤두박질친다. 일철이 닥치면 젖먹이 남동생으로 결석하는 날이 잦았기 때문이다. 나는 2남 2녀 중 셋째다. 적어도 이 엄청난 일이 없었다면 3남 2녀 중 셋째가 되었을 테다. 내 아래로 두 남동생이 7살, 4살에 하늘나라로 갔다.
친구와 놀고 싶은 6살 병옥이는 엄마의 부탁인 동생 돌보는 게 싫었고 도망치듯 친구와 놀러 나갔다. 늦게까지 소식이 없던 동생, 대문 옆에 있던 수돗가(펌프) 시멘트로 마감한 욕조에서 힘없는 모습으로 발견됐다. 축 늘어진 모습으로 엄마를 보자 건넨 한마디 “엄마, 배 아파!”였다.
농사일에 집안일 그리고 누에를 치는 양잠 일로 정신이 없던 엄마는 “그래, 엄마 얼른 치워놓고, 조금만 기다려라” 하시고는 급한 일을 마무리했다. 뒤늦게 아들을 안은 엄마, 온몸으로 느껴진 열감에 시멘트 욕조에서 잤다는 아들이 더위를 먹었나 의심하며 급한 마음에 열을 떨어뜨릴 요량으로 찬물 목욕을 시켰다. 그날 이후, 병원 약도 듣지 않은 채 결국 초등학교 문턱을 넘지 못한 체 우리 곁을 떠났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엄마의 자책과 한탄의 신음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병옥이 동생 3살 터울의 병희마저 하늘나라로 갔다. 일주일 동안 시름시름 앓던 병희를 데리고 십 리 밖에 있던 약국에서 약을 받아다 먹이기를 여러 차례였다. 약을 먹을 때는 조금 차도를 보이다가 이내 되돌아가는 병세로 뒤늦게 대구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뇌막염 진단과 함께 제대로 된 치료도 못한 체 보내야만 했다. 연이어 생때같은 두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두 동생이 떠난 빈자리를 아버지는 술로, 엄마는 눈물로 보내는 일이 많아졌고 그러던 중 주변에서 슬픔을 빨리 잊는 처방으로 동생을 낳아보면 어떻겠냐는 권유가 이어졌다. 결국 엄마 나이 39살에 지금의 남동생이 태어났다. 대문 없는 대문에는 금이 줄이 걸리고 이웃 어르신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그렇게 태어난 동생은 엄마 아들이 아닌 동네의 아들로 이웃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지금도 생생하다. 남동생은 둘째 동생 병희가 환생한 듯 판박이 었다. 부모님의 방황과 슬픔은 남동생의 재롱에 조금씩 잊히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다행이란 생각에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한동안 나는 어린 나이에 접한 두 동생의 죽음 앞에 뒤꼍에 있던 대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두 동생의 울음소리 같아 혼자 있을 때면 대낮에도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님을 살린 남동생이지만 우리 자매에게는 또 다른 고민을 낳는 심적 고통을 주는 존재였다. 엄마 못지않게 동생의 재롱을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동시에 이 누나들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었다.
문제는 학교를 가야 하는데 일철이면 젖먹이 남동생으로 결석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너무 싫었다. 억울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쩔 도리가 없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런 엄마가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마음을 알기에 미어지는 고통과 통제할 수 없는 뭔가가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동트기 전 새벽이 싫었다. 눈 뜨자마자 우리 자매는 서로 학교에 가겠다며 아침밥도 마다하고 앞다퉈 대문을 나서려고 밀고 당기는 소동을 벌였다. “오늘은 내가 갈 거야. 언니 넌 어제 갔잖아." 그러면 언니는 시험기간이라 빠지면 안 된다는 둥 하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곤 했다. 그렇게 등교 시간은 가까워지는데 끝날 줄 모르는 딸들의 실랑이 앞에 아버지는 판결을 내리듯 결단을 내리셨다. 평소와는 달리 학교를 둔 아버지의 결론은 늘 나에게 좌절을 주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보다 언니인 중학생이 가는 게 낫겠다는 결론이셨다. 아버지의 결론이 내려지기 무섭게 언니는 보란 듯이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대문을 통과했고 그런 언니가 너무나 얄밉고 야속했다.
지금은 기계가 대신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전부 사람 손을 빌려야 했던 농사일이요 모내기였다. 그렇게 모내기철을 비롯해 일철이면 남동생을 업고 논으로 밭으로 모유를 먹이러 가야 했다. 모유 수유가 끝난 동생을 업고 돌아오는 길, 누나 등을 침대 삼아 단잠에 빠진 동생을 조심스레 눕혀놓고 그 사이 난 집안 청소를 했다. 아버지가 만든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마당도 쓸었다. 청소를 하면 마음이 정화된다. 얽혔던 실타래가 시원스레 풀리며 정리되는 개운한 그 느낌이 좋아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한 정리와 청소를 지금도 놓지 못하는 이유다. 그리고 추천하는 이유다.
고된 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칭찬도 참 좋다. “오늘도 깨끗하게 청소를 했네!!” 그 짧은 말의 의미를 안다. ‘남들 다가는 학교, 결석시켜 미안한데 이렇게 집안일까지 해놨구나. 미안하고 고맙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10년 터울 젖먹이 동생을 돌보던 그때부터 난 가족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살림을 시작한 거였다. 꾸준히 살림 연습을 한 거였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르신들에게까지 정리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지금도 친정에 갈 때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있다. 작은방에서 청소기를 가지고 나오는 행동이다. 창문을 열고 청소를 마친 후 그제야 앉는다.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앉았을 때의 편안함, 마땅히 할 일을 하고 마시는 차 한 잔의 여유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 상쾌한 맛을!!
청소가 끝날 즈음 저 멀리 고개를 넘어 하교하는 친구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동네 반 친구들은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돌아가며 준비물과 숙제를 알려주려고 우리 집을 찾았다. 멀리 친구라도 보일라치면 부끄러운 마음에 숨기도 여러 차례였다. 그런 상황이 지속될수록 미움도 함께 커져갔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가 앞이 보이지 않아 심란스러운 마음에 아무런 해결책을 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고 그럴 때면 입버릇처럼 혼잣말을 하곤 했다. ‘아니 왜 학교도 내 맘대로 못 가냐고?’
그렇게 야속했던 엄마는 어느새 80 순의 노모가 되었고, 내게 늘 서운한 결단을 내리셨던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가 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엄마와 언니 이렇게 셋이 모일 때면 자연스레 그 시절 얘기다. 언성이 높아지고 흥분이 인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화가 아닌 추억하는 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말이다. 내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남동생은 앞서간 두 형아의 몫이라도 하듯 반듯한 교사가 되었고 누구보다 엄마를 잘 챙기는 착한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어릴 적 우리 자매의 등교 걸림돌이었던 남동생, 고등학교 3년은 올케언니가, 대학교 때는 내가 그리고 교사가 되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언니가 데리고 있었다. 그런 형수와 두 누나들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틈만 나면 말한다. “형수님, 누나들 고마움 평생 잊지 않고 잘할게요.”
어느덧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동생, 그 동생을 대하는 마음도 달라졌다. 젖먹이를 둔 엄마의 마음에서 세상을 나누는 친구 같은 존재로 말이다. 그 옛날 엄마가 막내를 낳으셨던 39살, 나는 둘째를 출산했다. 돌이켜보니 제아무리 힘들었다고 한들 자식 앞세운 부모만큼 엄마만큼 힘들었을까 싶다. 세상의 엄마가 다 강하다지만 자식을 낳아 키우며 돌이켜보니 울 엄마의 노고와 노력에 숙연해진다. 그리고 엄마에게 가졌던 못난 마음이 죄송하다. 울 엄마 같은 사람이 어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