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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 아 무개 Oct 13. 2019

아름다운 소년

Everything, everything



<뷰티풀 보이, Beautiful Boy> 2018






* 이 글은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불편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






<뷰티풀 보이>를 본 지 2주가량이 흘렀다. 이 영화를 본 건 오로지 티모시 샬라메를 향한 나의 사심 때문. 티미는 온전히 닉 셰프로서 나에게 다가왔고 데이비드 셰프였던 스티브 카렐과 마우라 티어니, 에이미 라이언을 포함한 이 영화의 모든 인물은 나의 수도꼭지를 열어버렸다.



이 영화는 ‘감동’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보통 영화들의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다. 탈출구가 생길 때 즈음 그것은 사라지고 어쩌면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해소가 될 법한 타이밍에 해결은 되지 않고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패턴이랄까. 클리셰의 파괴다.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약에 더 미쳐가는 닉, 점점 현실을 직시하는 데이비드와 같은 변화는 이루어진다.





약에 미쳐가는 아들을 보는 데이비드 셰프는 재활원에 보내겠노라는 뜻을 꺾지 않았고 ‘가족’이라면 충분히 자신을 잡아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닉은 그 희망 때문에 더 미쳐갔다. 희망은 신기루였을 뿐이다. 자신을 잡아 줄 수 있는 건 타인이 아닌 닉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두 시간 러닝타임의 끝자락, 결국 닉은 죽지 않았다. 식당 한편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쓰다 결심한 듯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멍자국이 다분한 팔에 주삿바늘을 한번 더 찔러 넣는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는, 아니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던 닉의 외로움, 쓸쓸함은 결코 기적을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티모시의 눈빛이 그렇게 말해줬던 것 같은데.





결국 닉은 죽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약을 복용하고도 살아있는 건 기적이에요.

기적처럼 닉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적은 결코 해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이여 저를 왜 살리셨나이까!”를 울부짖기에 아주 충분한 거리이지 않았을까. 링반데롱이다.


링 반데 롱(Ringwanderung)
환상방황 ; 산을 오를 때나 넓은 고원 등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현상.



이 영화는 마지막까지 어떤 희망의 메시지 따위는 부여하지 않았다. 약은 하지 말자는 교훈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기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온전히 닉의 상태를 관람한 내가 마음이 아픈 이유였다.




동생 재스퍼와 닉, 그 둘만의 장면에서는 마음이 굉장히 미어졌다. 형은 그대로라는 재스퍼와 닉의 저 웃는 얼굴이 참 안쓰러웠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닉의 네레이션이 흘러나온다. 결국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끊임없는 도돌이표를 찍으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앞서 말한 신기루 같은 희망이라도 품으며 간신히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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