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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데어 Aug 19. 2020

스스로 그러하다

김나윤,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조금만 서 있었을 뿐인데도 목 뒷덜미로 땀이 흐른다. 꽤 긴 장마가 지나더니, 이젠 폭염 차례다. 장마로 집안에 꼭꼭 붙어만 있던 아이들이, 이번엔 폭염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다. 사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나가려 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래서 잠시도 그 햇볕 밑에 서 있기도 힘든 정오에도 아이들은 놀이터만 보이면 그곳으로 달려갔다. 분명 온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데도, 아이들은 뛰어다녔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온난화로 지구가 더 뜨거워졌다고는 하지만, 나의 어렸을 적 '더워서 힘들었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더워서, 추워서 힘들었던 기억은 책상 앞에만 앉아있어야 했던 고등학생 때부터였던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나가야 했던 연애시절부터였던가...


아이들과 시골을 찾았다. 흙이라고는 모래 놀이터의 흙이 전부인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지인의 시골집 초대에 냉큼 응했다. 과수원을 바로 옆에 둔 아담하고 깔끔한 시골집이었다. 안마당이 있어 작은 수영장을 설치해두었고, 거의 외딴집이라 길가에 지나는 차, 사람도 없었다. 아이들은 신나게 밖에서 놀다가 더우면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했고, 배가 고프면 밖에 나와 간단한 간식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뛰어놀았다. 모험을 떠나듯 무릎 너머로 자란 잡초들을 헤치며 고구마 밭에 다다랐다. "추워져야 수확을 한다"는 지나가는 시골 할아버지의 잔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구마 순을 헤치고 땅을 파냈다. 우글거리는 지네도 나왔고, 때때로 이름 모를 벌레들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이들은 벌레는 보이지도 않는지, 땅 속 깊이 묻힌 보물 찾기처럼 보랏빛 아기 고구마들을 찾아 땅을 파댔다. 서울이었으면 "벌레!!!" 하며 도망갈 4살 아들놈도 조금 움찔할 뿐,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호미질을 했다. 시골의 밤은 서울의 밤보다 길었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은 다시 캄캄한 시골길로 나왔다. 아이들은 캄캄한 어둠이 좋은 듯했다. 불빛이라곤 집 밖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 있었을 뿐인데도, 아이들은 그 어둠 속에서 또 한바탕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이틀을 꽉 채워서 놀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또 '시골집'에 가자며 졸랐다. 해가 뜨면 아침이 되고, 별이 뜨면 밤이 되는 시골 생활이 좋아서였을까. 혹 눈만 들면 보이는 초록 초록한 창밖 풍경에 한결 너그러워진 엄마, 아빠가 좋아서는 아니었을까. 

아이들도 안타이오스처럼 땅을 밟고 서 있어야 더 단단해지는 건 아닐까. 


땅을 밟고 서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안타이오스가 생각났다. 발이 대지에 닿으면 힘이 세지는 안타이오스는 힘이 세기로 유명한 헤라클레스에게도 힘든 상대였다.(물론, 안타이오스의 힘의 비결을 알아낸 헤라클레스는 안타이오스를 대지에서 들어 목을 졸라 죽일 수 있었다.) 혹 아이들도 안타이오스처럼 땅을 밟고 서 있어야 더 단단해지는 건 아닐까.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햇빛을 마음껏 받으며, 땅 속 깊이 물을 찾아 뿌리를 뻗어내는 뿌리 깊은 나무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흙 속에서 꼬물꼬물 자신들만의 삶을 살아내는 곤충들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자라났으면 좋겠다. 아이들만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내는, 스스로 그러한 아이들로 자랐으면.. 


아이들을 그냥 두고 싶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신이 난 아이들의 얼굴엔 호기심이 가득하고, 또 무엇을 관찰하고 쫓아다니며 어떤 재미난 상상을 해나갈지 이렇게 바라본다. 

아이들은 자라고 있다.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으로. 

태양과 비가 자연스레 꽃을 키워주는 것처럼.

(김나윤, 내가 너라도 그랬을 거야) 


사진 출처 Photo by Casey Horner / Sushobhan Badha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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