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오지 않았네. 삐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았네.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이런 면담은 처음이라 어색하군요. 하하. 혹시 마실 커피가 있을까요? 아, 제 앞에 있었군요. 제가 요즘 정신머리가 없어서 눈앞에 있는 것도 잘 못 봅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준비하셨는지, 참 상냥하신 분이군요. 뭐라고요? 아, 잠은 잘 자냐고요. 어휴 말도 하지 마십쇼. 퇴근하고 오면 피곤해 죽겠는데 그대로 잠자기엔 억울해서 잠을 못 잡니다. 그나마 주말에 몰아잘 수 있어서 다행이지 말입니다. 죽어라 야근하더라도 주말은 성역만치 목숨을 다해 지키고 있습니다. 밥이요? 아이고, 이놈의 배꼽시계는 일 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몸은 귀찮고 시계는 울려대니 배달 음식을 잔뜩 먹어서 식대가 잔뜩 나오더군요. 제 돈이 줄줄 새는 건 분명히 배달 음식 때문일 겁니다. 행복하냐고요? ……. 선생님, 저는 행복이란 놈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할말은 참 많습니다. 흥미로우실 겁니다. 한번 들어주시지요.
행복추구권(幸福追求權)이라는 단어를 아시지요? 대한민국 헌법 10조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니, 작금의 우리는 행복-추구 이데올로기에 단체로 취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행복이란 건 마땅히 쫓아야 할 것, 당연히 가져야 할 것, 모든 가치의 중심에 있는 것, 온 세상의 신성으로써 군림해야 할 것처럼 회자되지만, 껍데기뿐인 권리만 있고 그를 위해 뭘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정해진 것’이라 모든 사람이 이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들어진 신의 선혈이 수많은 인간의 살갗에 흐르는 지금, 그 형태가 더 조악한 행복-추구의 우상이 다시금 떠오른 지금, 물음을 던지지 않는 게 이상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우상이 영원히 행복하게 빛나길 바라지, 이 날카로운 신살(神煞)의 창에 행복의 성역이 무너지길 바라진 않더군요. 이 시대의 어떤 평범한 이가 주어진 행복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럴 것 같다고요? 선생님, 저도 제가 이렇게 되길 바란 게 아닙니다. 제 탓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 의도치 않게 흥분을 해버렸군요. 이렇게 친절하신 분께 할짓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누군가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겪어본 바로는 그 죽음 자체는 견딜만한 것 같습니다. 병원 속 의사는 생사를 모를 고깃덩이에 대고 공식적으로 죽음이라는 매듭을 지어주고요. 곧 이어질 장례 절차에 대비해 장사치는 옆에 붙어 얼마짜리 관을 쓸 것인지, 수의는 무엇을 입혀야 할지, 화장할지 시체를 그대로 묻을지, 어디에 묻을 것인지, 옷은 빌릴 건지 등 수도 없이 몰아칩니다. 곧 준비를 마치고 자기 자신으로 파고들 무렵, 하나둘 조문객이 찾아옵니다. 좋든 싫든 그들을 맞이하고 마주해야 합니다. 정신과 몸이 분리된 꼭두각시가 된 것 같더군요. 후엔 시체를 닦는 장면도 보여주고, 그 시체를 담은 관을 화장지로 옮기고, 재를 담은 항아리를 작은 묘에 묻고, 소유주를 공식적으로 상실한 물건들을 정리하며 그에 얽혀 있던 ‘생기 넘치던 사람’을 ‘살아 있던 것’으로 비-인간화할 기회도 많이 있고요. 수많은 죽음을 지나온 문명의 혜택을 받은 것이긴 합니다만, 이 혜택은 마주해야 할 것이 있음을 시사해 주는 일종의 선고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부터죠.
그 이후로 제가 속한 가족은 한부모 가정이 되었습니다. 아빠, 누나, 나 세 명으로 이루어진 결손가정의 형태-기형적인 모습으로 말입니다. 결손(缺損), 이 불완전한 형태가 된 것까지도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땐 상황을 자각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요. 문제는 각자가 사망 선고를 소화해 내지 못함에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가족이라면 드러난 자신의 슬픔과 다른 가족의 슬픔을 나누고 공유했어야 했겠습니다만, 우리 가족은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각자의 세계에만 머물렀습니다.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먼저 부조리 가득한 선고를 삼키고 당신의 자식들에게 다가가야 했겠습니다만, 제 아버지는 슬픔에 취해 매 저녁마다 소리 지르고 나자빠져 쓰러지고 부양의 책무에서 오는 버거움을 당신의 자식들에게 토로했습니다. 정상적인 자식이라면 부모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람과 관계하는 방법을 배우고, 부모에게서 세상의 가르침을 받고 질서의 대리인으로서 존경하며,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그리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야겠습니다만, 저는 끝나지 않는 슬픔 속에 어머니 존재의 상실을 제 존재로서 지목하며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고, 부양자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욕구했지만 기대를 돌려받지 못해 부조리를 견디는 법을 익혀야 했고, 지리멸렬하고 환난이 가득 찬 세계 속에서 기대할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속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생의 초입부터 살갗이 있어야 할 곳에 구멍이 뚫려 있고, 없어야 할 곳에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형의 인간이 된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 살덩어리 괴물 같은 인간마저도 행복을 바랄 수는 있었습니다. 행복은 너무나 자비로운 것이라 현대의 어떤 인간이나 쉽게 낙원을 그릴 수 있게 해주지요. 그려진 낙원이 영원히 가상에 불과할지라도요. 저는 행복이 일종의 마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든 간에 살아갈 수 있게 해주니까요. 그렇지만요. 저는 스스로 행복에서 멀어지게 된 사람입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희로애락이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나 그 무엇도 선택할 수 없는 생애 속에서, 욕구하는 바가 때론 이뤄지지만 대부분 이뤄지지 않는 생애 속에서, 어떻게 희망으로 향할 유일한 길에서 멀어진단 말입니까? 아무리 나타나지 않을 가상이라 한들 모든 순간을 지나오는 와중에도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은 비록 자신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말입니다. 이런 인간에게도 행복이 깃들 기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언젠가부터 그는 저에게 저 멀리 떨어지기를 강요했습니다. 광명 그 자체가 저를 거부했던 것이지요.
선생님, 청춘 하면 어떤 게 떠오르십니까? 주로 열렬히 사랑하고 아파하던 때, 자신감이 넘쳐 무엇에든 용감했던 때, 고생이라 부를만한 것도 미화되는 때로 회자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모두 아닙니다. 저에게 젊은 날은 혼란과 혼돈이 가득한 날들, 꿈과 현상의 괴리로 괴로워하던 날들, 오롯이 슬픔 속에 갇혀 있었던 날들뿐입니다. 지리멸렬함과 불일치는 겪을 만했습니다만, 도저히 혼자일 때마다 찾아오는 우울만은 쉽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재미있는 건 참지도 못했지만 헤어 나오지도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홀로 있을 때마다 몰아치는 이를 언제든 그리워할 수 있는 고향, 어떻게 해서든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곳, 유일한 제 안식처이자 ‘집’이라 이름 지어 주었습니다. **
어느 날 집에 머무르는 것에 한참을 익숙해진 저의 청춘, 이 자폐적 초상의 주인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더 이상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까, 창문 너머의 세상과 철저히 유리되어 버릴까, 꿈꾸는 것들이 고향이 아닌 곳에 있을까 해서요. 하지만 제 청춘은 도무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집 밖으로 나갈 것인지, 어디로 가야 세상과 끊어지지 않을 관계를 맺을 것 인지, 무엇을 해야 꿈꾸는 것에 닿을 수 있는지, 자신이 어떤 인간이었는지조차 말입니다. 그래서 친숙하지만 익숙하지 못했던 것들, 생겨난 이후로 끊임없이 쫓아왔던 그들을 마주하기로 했습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어떻게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야 했거든요. 나름 용기를 내어서 한 결심이긴 했습니다만, 제 스스로 두려움에서 도망쳐 반행복(反幸福)으로 향하게 돼버린 꼴이죠.
치기에 가득 찬 제 청춘은 처음으로 마주할 암흑을 ‘어머니 존재의 죽음’이라 지목했습니다. 슬픔이란 집의 포근함은 심정지 소리를 듣고 차오르는 눈물과 비슷하게 느껴졌거든요. 아직 의심하는 방법을 몰랐던 제 청춘은 지목된 죽음 그 근저의 영상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일종의 정신적 자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저 조금 더 많은 슬픔이 찾아온 것뿐이었습니다. 집에 있기만 하는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한동안 기억 속 영상을 틀어놓기만 하다 잘 정렬이 되지 않아서 몇 자 적어보기도 했습니다. 제 감정을 충분히 의심하고 고민해 보며 죽음 근저에서 몰아쳤던 폭풍과 그것을 바라봄 자체에서 오는 슬픔을 분리할 수 있었습니다. 정리가 잘 되더군요.
이 우매한 젊은이는 살아감과 동시에 회상과 정리를 해나갔습니다. 꽤 좋았습니다. 그동안의 알 수 없음의 대상이기만 했던 제 자신에 대해서 이런저런 가설들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요. 그 가설들을 토대로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잘라낼 것을 결정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이 과감한 젊은이는 두려워하던 자신의 살점을 도려내고 기계 장치를 붙이는 행위를 하며, 합성 인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자의로 판단하고 살점을 도려내고 그 자리에 논리적 장치를 붙인 합성 인간, 그 자체로는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요. 오히려 흥미로웠습니다. 오로지 제 의지대로 제 입맛대로 만들 수 있는 건 제 자신 외엔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 나사 빠진 합성 인간이 간과하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행복한 인간들은 기형이든 합성이든 그 외의 인간 유형들을 알지 못한다는 걸요. 선생님, 이 알려지지 않은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해주시면 안 됩니까?
아, 다행입니다.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어 하겠습니다. 얼마 안 되어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시도를 반복했습니다. 합성 인간이 된 이유엔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가족과 어머니는 너무나 흔한 단어여서 수없이 들렸고, 이를 듣기만 해도 기계와 맞닿은 잘려진 살의 단면에서 거무튀튀한 핏물이 튀어 나왔거든요. 그저 기형의 인간일 때는 커가면서 망각해 왔지만, 합성 인간이 돼버린 이후에는 그 영상들이 선명해져서 모성의 부재와 죽음의 소용돌이가 제 자신 속에서 요동쳤고, 기계와 살점 사이가 잘 달라붙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걸 느끼던 때는 못자리에서 아빠와 누나가 묻은 기억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누군가가 자기 가족의 화목함과 부모의 존재에서 감사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 어머니 감사해요. 라는 글자를 볼 때, 친구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가 가져온 김치와 함께 라면을 먹을 때, 전부 가족 간의 행복, 특히 어머니와의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제게는 없는 것들이 그들에겐 있다는 걸 자각할 때 말입니다. 그런 가정 속에서 행복한 이들이 그들의 기쁨을 발화할 때, 저는 입을 열면 핏물을 토해낼 것 같아 입을 틀어막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 사정을 몰랐고 저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 단절로 인한 홀로 남겨짐은 필연이였고요. 꽤 잔인하지 않습니까?
문제가 단지 이것뿐 이였다면 행복과 화해하고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었을 겁니다. 기계와 살점 사이의 단면이 잘 달라붙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안 되어 핏물도 흘러나오지 않고 조금 욱신거리기만 했습니다. 전처럼 아파서 핏물 웅덩이 위에서 절규할 일은 없었거든요. 고향으로 여기던 슬픔으로도 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간혹 돌아가긴 했지만 있을법했습니다. 마냥 벗어나야 할 곳이 아니라 머물러야 할 때도 있는 곳이라 여겨졌거든요. 그런데도 여전히 행복과 제 기계 장치는 서로 거부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선생님, '행복'이란 가족과의 화목함을 유지하는 것이 제일이요. 항상 기쁜 것이 제일이요. 마음의 건강이 제일이요. 순진무구한 것이 제일이요.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요. 자라며 기형의 인간이 되어버린 저는 가족 간의 화목함이란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고 여겨야 했고요, 그렇게 자라난 저는 청춘의 시기 동안 슬픔에 파묻혀 있기만 했었고요, 그런 제 자신을 두려워하며 트라우마를 헤집어 가며 수많은 자해를 저지름과 동시에,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의심하며 두려워하던 감정을 자르고 그 위에 여러 장치를 덧붙였습니다. 그런 제 앞에서 행복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만 해도 저를 부정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진 것이라곤 제 자신밖에 없는데 어떻게 이 완연한 자기 부정의 행복을 품겠습니까? 도대체 어찌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들로부터 저를 유리시켜 버린 행복을 지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제가 행복을 부정하는 건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행복이란 그 자체로도 저에게 너무나 잔인하지 않습니까? 선생님, 제발 좀 그렇다고 해주시면 안 됩니까?
누군가에게 이를 털어놓고 ‘행복’해지는 방법은 어떠냐고요? 행복이 저에게 어떤 만행을 벌인 건지는 이해하시겠죠? 의사소통만으로도 저를 소외시켜 버린 행복의 전도사들이 가득한 걸 아시겠죠? 아, 이 순진한 사람들… 이 빌어먹도록 잔인한 사람들… 좋습니다. 이런 것이야 이제는 익숙합니다! 어찌 되었든 저는 인간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 그들에 적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요. 그 행복의 살아있는 화신들에게 제 자신을 이야기하는 건 그들이 저지른 잔인한 짓거리를 다시 돌려주는 셈입니다. 제 아집을 뱉는다는 건요, 그들의 신성을 더럽혀 그들과 그 우상 사이를 완전히 갈라버리고, 그들 스스로 전락시켜 버리는 자비 없는 행위고요. 제 불행을 떠드는 건요. 여태껏 흘린 제 핏물을 뒤집어씌워 버리는, 그로써 자신의 행복을 의심시키고 또 다른 단절된 인간으로 만드는 아주 질이 나쁜 몰인정한 짓거리란 말입니다. 제가 어찌 그런 목매달 짓거리를 한단 말입니까? 그건 너무 잔인한 처사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진짜 인간이 아닌, 각각의 인간이 만들어낸, 철저히 행복-부재의 가상에서만 위로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앞의 生>에선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필요한 아이가 떠도는 모습을, <소망 없는 불행>에서의 어머니 존재의 죽음을 철저히 추적하려는 시도를,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에선 도무지 발화자와 청자가 이어지지 않을 예측을 하는 인간의 고독을, <데미안>에선 자기 자신을 쫓는 자로써의 고독과 운명 그리고 미완의 인간으로서의 남겨짐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선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에게 반하는 한없이 어두침침한 인간의 발견을, <인간 실격>에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들을 갈구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점차 잊히고 전락해 버리는 자를 통해서, 행복에 의해 비-정상의 인간이 되어버린 지독한 운명을 지닌 제 자신을 발견해야 했단 말입니다… ***
이 정도면 저와 행복 사이에 관해 좀 아시겠지요? 선생님이 잘 들어주신 덕분에 이제야 제 소개를 할 수 있겠군요. 저는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로 어머니를 죽인, 가족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과 슬픔에 익숙해져 버린, 청춘 그 자체로 불행한, 자신의 불행을 헤집고 다니는, 기괴하게 자란 살덩어리를 스스로 잘라내 기계 장치를 붙여버린, 도무지 행복한 사람과 어울릴 수 없었던, 작금의 세상에 행복과 척지는, 스스로가 세상에서 고립되어 버린, 자기 자신에 대해 쉽사리 말할 수 없는, 그런 반행복(反幸福)의 인간. 입니다. 반갑습니다.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25
*** 순서대로,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용경식. 문학동네(2013),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윤용호. 민음사(2002),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윤용호. 민음사(2009),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영애. 민음사(200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김연경. 민음사(2010),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김춘미. 민음사(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