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꼭 오고.” 나른한 평일 한낮에 울리던 전화기 속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지’라는 말을 당신에게 배운 저는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오후 2시라며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렇게 여느 평범한 날들처럼 짧게 할 말을 마친 당신은, 할일 없이 TV만 본다며 시덥잖은 소리를 던집니다. 그 습관을 빼다 박은 저도 TV를 아주 열심히 보라며 통화를 마무리합니다. 잠시 올라갔던 입과 눈 끝이 내려가며 누이에게 짤막한 메시지를 보냅니다. “이따 전화 좀”
한참을 키보드를 두드리다 혹시 몰라 작은 스크린에 눈을 돌리니, 부재중 전화 알림이 최상단에 떠 있습니다. 전화기를 들고 일어나 답신을 걸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들리다 누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저는 말합니다. “아빠 이번에 다시 색전술 시술 받는다는데, 계속 진료하던 의사가 다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 보라 했데. 그 다른 의사는 간 이식 전공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담당 의사는 종양이 계속 생기니 보존보단 이식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문제는 증여를 받거나 가족이 떼어줘야 하는데, 나는 간염이 있어서 안 되니 남은 건 누나뿐이잖아. 그래서 진료받을 때 같이 가야 할 것 같아서.” 누이는 내일 일정을 말해야 한다고 말했고, 저는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하지 못한 말이 있는지 누이와의 통화를 곱씹다, 전할 말은 다 전한 것 같아 간 이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의 생명을 자식의 생명을 깎아가며 연장시켜야 할까? 저는 ‘아니오’ 라고 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어나지 않은 간 이식 건에 대한 모든 결정권이 있다면, 따로 증여받지 않는 이상 연명 치료 이상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중요한 건 증여자의 결의와 환자의 회복 의지이니 제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미리 정리는 해두어야 당황하지 않겠지요. 누이는 필요하면 기꺼이 할 것 같기도 하구요. 곧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서의 저는 진행 과정은 알지만 끼어들 수 없는 관찰자이고 할 수 있는 건 말뿐이겠지요.
생각을 정리하고 직장 동료들과 시덥잖은 이야기를 좀 하다 회사 건물에서 나옵니다. 갈랫길을 바라보며 역까지 걸어갈까 버스를 탈까 하다 걸어가는 갈래로 향합니다. 강변을 따라 주욱 걸어가다 보면, 탁 트인 주황빛 하늘을 고개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게 됩니다. 곧 시야가 막히면 ‘아쉽다’ 한마디 하며 고개를 돌리고, 햇님의 시야에서 사라진 저는 상념에 젖곤 하죠. 오늘은 낮부터 시작된 당신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좀 잊고 있었습니다. 따로 벌려 놓은 것들도 많기도 하고, 회사에서의 제 양상도 조금 달라져서요. 그러다 다시 여러 걱정거리를 스스로 떠안게 되었구요. 대부분은 사소한 것들입니다. 앞으로 병원에 쫓아가려면 야근을 좀 해야 하나, 저번에 입원하면 간호사가 붙는 것 같던데 간병인이 따로 필요한가, 간 이식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면 어쩌지,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면 옷은 못 사겠네, 뭐 이런 것들이죠.
걱정의 대부분은 쓸데없긴 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앞으로의 사건에 대비하기에도 유용합니다. 그 망상의 단계는 결국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고, 그것을 마주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기도 하거든요. 사실 당신의 간암 소식을 들을 때부터 걸리던 하나가 있었습니다. 시술을 반복하며 생긴 희망 덕분에 거의 옅어졌던 것, 그 회생 불가능한 간 소식을 듣고 다시 떠오른 것, 끝을 보게 되기 전까지 계속 나타나게 되는 것, 그러니까…
당신의 병세에 차도가 없다면, 아무래도 남은 대부분의 날들을 병상에 누워 지내겠군요.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의 아내가 판정받았던 시한부 기간보단 오래 살아 있겠네요. 당신이 자식들에게 전해준 바로는, 간에서 터져버린 암세포가 신체 곳곳에 전이되어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했었죠. 당신과 아내가 다를 점은 사전에 발견했느냐의 유무이니, 살아남고자 한다면 3개월보단 훨씬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눈앞의 것들만 보고 살아왔으니 아무래도 더 버티고자 할 것 같구요. 당신의 딸은 제 아버지가 더 살아있기를 바랄 것이고, 당신의 아들은 환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마주한 고통에 스스로 꺾이지 않는 이상, 유일한 가족인 자식들은 살아있기를 요구하는 꼴이 되겠군요. 이건 당신의 아이들에겐 그나마 나은 일입니다. 그 중 아들이 그 아비의 목숨을 끊게 만들고 평생 자책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겐 한없이 잔인한 일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오래전에 어느 병원 혹은 그 의료진들더러 아내를 실험체 취급한다고 자식들에게 험담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어른의 역할은 심적 부담을 지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자세한 내막은 이야기하지 않은 채 해소를 위한 말만 쏟아낸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당신의 아들은 제 아버지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가족이란 각자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해 내는 냉혈한이 모인 집단이 아니라, 심적 부담마저도 같이 짊어지는 운명 공동체 아니냐고 말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그걸 말하기에 자식들이 너무 어렸다고 하겠죠. 그 자녀들이 장성해서 결혼 적령기에 놓인 지금 마저도요.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군요. 온갖 짐을 오래 지고 있던 탓인지 당신은 환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동안 어린아이들은 금방 자라 환자 옆을 지켜야 할 보호자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곧 당신을 닮은 자식들은 그 부담을 져야겠군요. 그래도 그 아이들은 속내를 터놓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당신이 끝까지 버티고자 한다면, 보내왔던 여느 날들의 모습은 점점 늙은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 가겠군요. 당신은 아내 옆에서 끝까지 버텨본 경험이 있으니 아무래도 잘 알 것 같습니다. 먼저 떠난 아내와 다를 건, 매일 자기 전 잊기 위해 마시던 술 때문에 나온 뱃살이 점점 사라지겠다는 점이겠군요. 당신의 아들은 이 점이 잔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들의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매일 밤 무리하던 아내와, 이런저런 과로들이 연속되어서 마주한 그 아내의 영정 사진과, 평생을 버릴 수 없는 꼬리표처럼 쫓아다닐 매일 밤의 자책과, 이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자기 전에 마시던 독들과, 그렇게 매일 매일 켜켜이 쌓인 것들이 생명이 꺼질 때쯤이 되어야 사라진다는 게 말입니다. 당신의 아들은 자책하는 것마저도 닮았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기도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아내가 병상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병원에서 심심하다는 말하지 마’라고 하고, 기어코 그 말을 한 아들에게 언성을 높여 혼내곤 했습니다. 곧 금방 자라버린 당신의 아들은 곧 그 아버지가 버티는 과정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심심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상에 누운 당신의 모습이 자녀들에게는 익숙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를 점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모습이 아니라, 끝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모습인 점이지요. 어떻게든 버티는 사람은 버티는 것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점을 신경 쓸 틈이 적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보호자는 입장이 다르겠지요. 당신의 연명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자식들은 아내를 옆에서 지켜보던 당신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 병상에 누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아이들의 볼 때, 일전의 품어온 것들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의 끝이 코 앞으로 온다면, 살아생전에 이뤄지지 않은 소원을 떠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딸은 참 다행입니다. 고정된 일자리도 구하고 결혼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만난 사위는 참 좋은 사람이니 어떤 순간이든 당신 자식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딸이 곧 다가올 임신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선 굉장히 아쉬울 수 있겠습니다. 얼마 전 당신은 성능 좋은 보청기를 맞추고 자식들에게 자랑했었잖아요. 그것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손주를 위해서요. 반면에 아들 생각은 많이 나겠습니다. 일자리는 구한 지 오래지만 결혼의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요. 아들은 여전히 당신이 살아있을 줄 알고 여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아쉬운 말밖에 할 수가 없군요. 아들은 그 자신이 보기에 결격 사유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도 당신의 아들은 최선의 아쉬운 말만 할 겁니다. 꼭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겠다. 라고요.
당신이 떠난다면, 사실 아들은 이 생각을 한 지 꽤 되었습니다. 당신의 아내가 갑작스레 떠난 것처럼, 금방 떠나버릴 것 같아서요.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죽는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아들은 미리 이별 연습을 하는 겁니다. 계속 반복함으로써 무뎌지는 것밖에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당신이 도망치는 동안 체득한 나름의 방법입니다. 당신이 떠난다면, 그 아들은 무엇 때문에 자꾸 연습을 하는 걸까요. 당신과 잘 지내지 못한 날들일까요. 아니면 홀로 떠돌아다니던 날들일까요.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제 아버지의 도망치는 삶을 그대로 이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매일 밤 흐린 정신으로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닮아 잘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떠난다면, 살아가는 것은 점점 죽어가는 것이라고, 종종 당신 아들은 말하고 다녔습니다. 모든 것들에 끝이 있기 때문에 영원한 건 없다고, 결국 다른 사람을 바라는 것은 늪에서 허우적대는 꼴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끝을 한번 겪어본 아들은 언젠가는 끝날 다른 것이 두려웠고, 조금이라도 놓기 위해 시한부 선고를 내리곤 했던 겁니다. 언젠가는 떠날… 당신을 닮아서요.
당신이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