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by 김수혁

“오너십을 가지고 해야죠.” 아이고. 정말이지 세련되지 못한 말이네요. 아무런 맥락도 없이 냅다 이런 말을 던지다니요. 개그 프로에 나올 법한 말이 순진한 말투로 들리니, 웃음이 삐져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습니다. 당황스럽거나 어이없는 게 아니라 정말로 웃긴 건데요. 맞는 말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만, 순진하지만 단호하게 뱉어버리는 게 해학의 한 장면 같아서요. 풍자를 한 번 더 비꼰다니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메시지까지 명확하니 금상첨화입니다. 해야 할 것을 하는 동안 그 주변부를 이야기하는 건, 당연한 것임과 동시에 지켜야 할 일관성의 문제죠. 이런 점에선 기쁘기도 합니다. 다수의 사람과는 다른 제 속의 이야기를 꺼내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동안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나타난 점에서, 돈을 벌기 위해 약삭빨라야 하는 행위를 바보처럼 순수하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누군가는 ‘주인의식’을 주장하는 게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며, 휘발될 말과 남겨질 행동의 괴리는 당연하다 하겠죠. 하지만 괴리의 존재 여부는 조금만 지켜보면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는 일의 특수 덕분이긴 한데요. 제가 속한 그룹 내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일종의 공용 글쓰기를 하는 것이라서, 서로 일을 투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하는데요. 이건 이유가 분명합니다. 즉시 공유되는 글의 변경 사항은 다른 시나리오의 의미를 바꾸기 마련이라서요. 이런 이유로 주 저작자와 그리고 동료들까지 쉽게 읽히는 글을 쓰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건 쉽게 외면되는 가치입니다. 공용 글이기도 하지만 항상 죽치고 있는 전용 의뢰자들이 날마다 다른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죠. 정말 성가신 점입니다. 제가 쓰는 건 동료가 읽을 글일 뿐만 아니라, 기계가 실행할 명령문의 나열–실행 계획이기도 한데요. 의뢰자들은 기계가 움직이는 외양만 놓고 요구하기 때문에 명령문의 가독성 따위는 항상 논외입니다. 요구자의 바람을 해결함과 동시에 요구자는 알 바 아닌 가독성을 가지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옥죄이는 마감일까지 더해지면 대환장 파티죠.


어느 하나를 버리면 쉽게 해결되기에, 쉽게 읽히지 않는 명령문을 작성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독성의 누락은 추후의 오독–기대하는 명령의 미실행으로 이어지서, 길게 보면 큰 문제죠. “최초 저작자가 알아서 잘하면 되는거 아냐?” 하며 냉소를 던질 수도 있습니다만, 그건 아주 고약한 소리입니다. 급작스러운 상황을 넘기기 위해선 이런 경우는 다반사이며, 우선은 일어난 사고를 수습하고 문제를 예방하는게 해야할 것이죠. 수습의 관점에선 공유되는 글을 꼼꼼히 읽고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예방의 관점에선 일어날 일들을 예측하고 울타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중요한건 수습과 예방 전부 혼자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조직 대부분은 잘 굴러가지도 않을 겁니다. 같이 해나가는 것. 이건 아주 현실적이고 그나마 실행 가능한 방법입니다. 이 포인트에서 각자의 ‘주인의식’ 이 잘 드러나고요.


특히 자리를 잡은 사람일수록 영향력이 지대해서, 한순간에 강한 인상을 남기곤 하죠. 시간에 쫓겨서 달려가다 쳐놓은 울타리에 걸리고, 조여오는 숨을 트기 위해 어떻게든 이를 넘으려다 “거기로 가면 넘어질꺼야.”라며 힘껏 붙잡히는 건.. 처음 겪어본 일이기도 했구요.


꽤 자주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를 버리면 당장은 편하지만 저 멀리에서 넘어지고, 모두를 챙기는 건 고되지만 버틸 방법이라, 우리가 가야 할 길이 거의 정해져 있다는 말을 듣는 게 말이죠. 이렇게 동행을 권유하던 이들 중 한 명은 순진하게 ‘오너십’ 을 이야기하는 이였구요. 바보 같았습니다. 그렇게 고된 길과 고민을 거쳐온 사람이 설득되지도 않을 순진하고 투박한 말을 한다는 점에서요. 당연한 걸 전달하는데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요. 누구에겐 중상모략이 들끓는 곳이, 제겐 순수로써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좋았습니다.


어느 시기엔 이들과 일을 자주 하고, 많은 문장과 의견을 나누곤 했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의 문제를 머리를 맞대 해결하고, 문제가 생길 지점에 적절한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의뢰자들의 요구와 가독성에 관해 여러 의견을 나누기도 했지요. 피곤하고 머리 아프고 고된 일이긴 했습니다. 익숙한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렇지만 옳은 방향으로 같이 나아간다는 기분에, 그런 것들쯤은 상관없었습니다.


순진하기만 한 이들을 따라가다 보니, 앞선 테제들을 마음속에 새기기도 했고,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한 이상향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제 자신만 이런 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이런 기분을 느꼈으면 해서요. 그동안 배타적인 사람들에 계속 베여 왔기도 했고요. 내 일과 당신의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모두 연관되었으니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는 공동체. 그런 사회에 대한 기대랄까요. 눈을 감아도 자꾸만 빛무리가 아른거렸고, 저는 닿지 않을 곳을 향해 손을 내밀곤 했습니다.




멸망을 초래하는 것들은 거의 언제나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 있다. 신문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나 ‘필연적인 슬픔’ 같은 주제들이 나온다. 이와 같은 일들이 실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날, 절박한 사람의 친구가 무심한 어투로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




문제라 불리는 것들, 그 정체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대부분은 ‘문제라 불리는 게 있음’을 칭하기 위해 ‘문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그 정체를 밝히는 데에는 무관심하죠. 이런 흔한 용례 때문인지, ‘문제’를 알고 해결하는 입장에 놓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골치 아픈 건 저도 같은 입장이라는 거죠. 기계가 움직이는 외양이 기대와 다를 때, 그 기대대로 비틀어놓는 게 제 일 중 하나거든요.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떻게든 문제 앞에 서게 되므로, 당황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찾는 건 당연한 게 되었고요.


시작은 겉보기와 실제의 차원에서 추상과 논리 구조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오감 너머로 한발 한발 디뎌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훈련되어야 돌아다닐 수 있죠. 제 발로 현실과 유리되는 과정을 밟으면 그다음은 간단합니다. 어색한 움직임이 가리키는 곳에서 시작해 파고 들어가서 하나씩 들춰보면 되죠. 간혹 헤매곤 하지만 추적의 과정은 대부분 간단합니다. 끝까지 가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원인은 기대를 위해 넣은 명령이 다른 동작을 유발하는 경우인데요. 대부분은 원고의 오탈자를 수정하듯 간단히 고칠 수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라며 난리를 피워서 들어갔는데, 이런 경우면 좀 맥 빠지긴 하죠. 제 입장에선 좀 싱거워서요. 간단한 일은 ‘문제’로 치부하기엔 해결이 쉽고 금방 해소되니까요. 그럼 진짜 ‘문제’가 뭐냐고요?


동료들끼리 입을 모아 말하는 문제의 순간은, 이미 작성된 논리 구조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을 때입니다. 이때의 대처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일관성을 위해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것, 하나는 구조에 복속되지 않는 예외를 만들고 슬쩍 넘어가는 것, 등떠밀린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선 양자택일이 필요합니다. 실용이 전부인 직업 윤리에 따르면, 규모와 비용에 따라 선택해야 하죠. 전자는 다시 세워야 할 규모와 요구에 따라 비용이 정해지고, 후자는 단순히 요구의 비용만 책정됩니다. 직업 윤리에 따르면, 비용이 크면 클수록 당위가 충분해야 하니 후자를 자주 택하게 되구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문제’는 더 뒤의 일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예외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후에서야, 그 덩치가 문제를 일으켜서 들여다보곤 하는데요. 사정을 들어보면 전부 처음부터 이상했던 게 아닙니다. 수많은 이들이 거쳐 간 후, 원치 않게 기형의 모습을 부여받게 된 거죠. 잘 생각해 보면 모순은 언제나 일어날 일입니다. 인간의 기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논리적 구조체는 가만히 있기만 하니까요. 하지만 그걸 바라보기만 하는 인간은 그 자체로 기만과 방임을 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기대와 구조 사이의 모순을 눈앞에 두고 못 본 체하며 지나감의 기만, 수많은 해결의 갈림길 중 가장 쉽지만 모순을 인정하는 방임. 수없이 눈에 밟혀서 처음엔 당연한 건 줄 알았습니다. 깨진 유리창이 거의 전부라서요.


시작은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팀 단위의 결과물을 만드는 일을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만들곤 하는데요. 자주 고장이 나서 사람이 붙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불리는 사람은 고정되어 있었는데, 낮밤과 휴일 구분 없이 불리는 걸 꽤 오래 반복하더군요. 불리던 이는 한참을 힘들다 힘들다 반복했지만, 사람들은 “그렇구나.” 하고 대꾸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모두와 연관된 중요한 일이었지만, 다들 자기 일이 바쁘다고들 하더군요. 새로운 걸 알기엔 시간이 없다면서.


저도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 당장의 도움을 주기엔 모르는 것뿐이었고, 모르는 걸 알기엔 시간이 걸렸거든요. 못 본 체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론 방임을 일삼았던 것이지요. 한동안 텀을 두고 여러 번의 질답을 주고받았습니다. 알고 나니 딱히 어려울 건 없더군요. 그래서 가끔 대신하곤 했습니다. 제 일은 아니긴 했습니다만 너무 한두 사람만 몰아세우는 것 같아서요. 신기한 건, 후에 그 소외된 이가 고맙다는 말을 반복할 때였습니다. 덕분에 강한 유대를 얻었으니 좋은 일이었지만, 저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잠시나마 짐을 들어준 게 이렇게까지 고마울 일인지.


얼마 안 가서 소외는 해소되긴 했습니다. 계속 반복된 힘듦의 보고는 조직 내 당번의 역할로 대체 되었거든요. 누군가의 해야 할 일로 배정된 셈이죠. 하지만 이게 맞는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있던 이상향의 그림과는 달라서요. 착취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더군요. 전부 자발적으로 뛰어든 이들이긴 했습니다. 미지의 세계에 과감하게 발을 들이고 황량한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확립하는, 그런 용감한 이들이었죠. 하지만 그 밖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계를 그어놓고 안에만 머물러 있더군요. 그어놓은 경계라곤 전부 안전한 울타리 안이였구요. 그들은 그 속에서 맡은 일만 수행하는 게 당연하다고, 슬며시 당위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주장에 한 치의 오류도 없다는 듯이 말이죠.


어쩌면 불지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구덩이에 스스로 뛰어드는 이들을 동력으로 삼아 굴러가는 공동체, 멀찍이 떨어져 주변 사람의 분신을 부추기는 게 모범이 된 사회, 그리고 이게 우리의 진정한 면모이며 당연하다 주장하는 악령의 얼굴들. 그러니까, 그 악령들의 주장은 뛰어든 이들의 외면은 필연이고, 소외는 아주 적합한 조치라 들렸습니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게, 해야 할 것을 여러 이유로 하지 않는 게, 합당하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지녀왔던 빛무리는 그저 허상이라고, 그릴 수 없는 걸 그린 것이라 그만 포기하라고, 비명 지르는 듯했습니다.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기억과 이상향을 약속 받는 것에 대한 기대, 이 간극은 인간의 삶을- *




요즘은 염증이 좀 납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고민하는 시간보다 움직이는 시간이 많아지긴 했습니다. 수많이 쌓여온 유산들의 문제점도 잘 알고 있고, 그에 대응하는 것도 이제는 능숙합니다. 매번 흥미와 고역의 낙차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가야 할 길을 잃은 느낌이 듭니다. 그럼 왜 일을 계속하냐고요? 글쎄요. 관성에 끌려가기만 하는 어른이 되었나 봅니다.


썩은 동아줄을 잡은 채 하루하루를 버티고만 있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넓어졌는데 가능한 건 그저 한발씩 움직이는 것뿐.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미약하고 바라는 것에 닿을 날은 요원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세상에 크기에 압도되어 수 없이 미약해진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걸까. 라고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위희(慰戱, divertissement)에 푹 빠져 있더군요. 수 없이 작아진 자신을 안아줄 위안, 초라한 모습을 잠시나마 잊기 위한 오락, 비교되어 내버려진 자신을 가리기 위한 기쁨. 이런 것들 말입니다.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거대한 기계 구조 속 부품인 인간이, 어떻게 원하는 것을 다 이루며 살겠습니까? 비대해진 간극과 끊임없는 절연 사이에서, 어떻게 나약한 인간이 제 정신을 차리고 살겠습니까? 곧 굴러떨어질 것 같은 평소의 하루가 아니라, 모든 걱정과 고민을 잊을 환락에만 머무르는 건, 필멸의 존재 그 자체로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리 거대해진 기만과 방임이 잠시나마 서 있을 당위를 앗아가더라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살아 있을 이유 따윈 없었고, 그조차도 떠나갈 것들이었으니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수의 도덕 아래 비참히 뭉개진 제 꿈이 있더라도, 제겐 흔히 있었던 일이니 별 것 아닙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도덕으로써의 위희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각각이 주인이길 바라는 체제의 순진한 기대를 외면하더군요. 주변을 둘러보지 않고 누리기만 하는 건, 작금의 상황에 가장 쉬운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로써 외면받은 구조는 삐거덕거리고, 그 아래 사람들의 착취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아… 저는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원에 당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누군가를 불구덩이에 모는 방법이란 게, 대다수가 이를 개의치 않고 도덕으로써 용인하는 게 말입니다.




한동안은 잊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요. 꿈은 꾸기만 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이루기 위해선 수많은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하고 그마저도 보장되지 않으니까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해보려 했는데, 이젠 좀 지친 것 같습니다. 무리해서라기보단, 나아가야할 길 없이 앞으로 간다는 점에서요. 사람의 탈을 쓴 악령의 말을 듣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요. 포기하지 말라는 꿈과 포기하라는 비명 사이에 끼어 있기만 해서요.


이제 그만하고 싶습니다. 즐기고 싶은 건 조용한 안식뿐입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말입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더라면. 피곤합니다. 그만 자야겠습니다. 깨지 않는 잠을 잔다면 참 좋겠군요. 그러면 못다 이룬 꿈을 마음껏 꿀 수 있을 테니…




* Gang of Youths, Achilles Come Down (GO FATHER IN LIGHTNES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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