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찰관의 말에 따르면, 제가 사는 동네는 참 평화로운 곳 같다 하더군요. 인구수 대비 경찰 인력이 적다나요. 나쁜 일을 봐야 하는 사람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제게 물어본다면, 걸으며 보이는 인상은 잔잔하다고 하겠군요.
보통의 아침들은 출근길로 하루를 밝히곤 하는데요. 현관을 나와 역사까지 가는 길에 꽤 많은 미소를 짓곤 합니다. 미소와 함께 출발한 시선들은 전부 아이들에 멈춰있죠. 펭귄마냥 뒤뚱 뒤뚱 걸어가는 아담한 폼새, 길을 걷는 와중에도 이리저리 돌아가는 고갯짓, 가끔 머물러 있던 시선과 교차하는 작지만 맑은 눈망울. 이때가 가장 중요합니다. 바로 궁금하다는 양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찰나의 텀을 두고 좌우로 흔들하면, 작은 눈이 커지고 줏대 없던 시선이 잠시 제게 머뭅니다. 금세 마주 걷는 순간은 지나가고, 머금었던 미소는 아침의 거리에 녹아들곤 하지요. 하지만 거리의 여유는 단순히 아이에게서 오는 게 아닙니다. 꺄르르 웃으며 달려가는 아이 뒤에서 저와 같은 미소를 지닌 아버지의 뜀박질이, 앙증맞지만 다른 크기의 두 손을 나무마냥 양손에 놓지 않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아침부터 서럽게 우는 아이를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의 보듬는 말들이, 매일 매일 반복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지요. 이러니 제게 사는 곳이 어떠냐 물어보면, 당연히 잔잔하다는 인상을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갑자기 이게 떠오른 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낸 시집 때문인데요. 그냥 시집이 아니라 동시집이라 하더군요. 아이(아동)들을 위한 시집인데, 최근 나온 인터뷰를 보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좀 많이 놀랐습니다. 여태 보아온 그의 시에선 전혀 알 수 없기도 했고요. 이러나저러나, 동시집도 시집이니 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가서 표지를 넘겼습니다. 여덟 살 딸의 말을 재구성했다고 하던데, 참 귀여우니 일부를 남겨야겠습니다.
아빠는 만날
“민재야, 내일 해줄게”라고 말해요
왜 내일은 만날 만날 있죠?
미운 내일이
만날있는 게 문제에요 *
귀엽지 않습니까? “맨날” 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만날” 로 말하는 것도 그렇고, “미운 내일이/ 만날있는 게 문제에요”라고 말하는 아이를 그려보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더불어 이런 투정을 받으며 딸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도 그려지고요. 흔들리는 전철 속에 손잡이를 잡고, 그의 여섯 번째 시집에서의 장면들을 그리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군요. 눈치는 좀 보였지만 어쩌겠습니까.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서점으로 향한 보람이 있습니다.
한참을 소리내어 웃다가 마지막 장면을 넘겼고, 다음엔 아이들을 위한 메시지가 담겨있더군요. 겁내지 말고, 마음껏 상상하고, 세상은 여러분 것이라는 흔히들 하는 덕담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단호하지만 상냥하게 말할 시인이 모습이 그려지더군요. 귀여운 모습입니다. 그에 반해 제 눈앞은 금방 흐려졌고, 여느 날의 잔잔함이 녹아들 듯 제 입꼬리도 금세 내려갔습니다. 웃다가 울상이다가 아주 지 멋대로군요. 흔히들 하는 말인데 저는 왜 이랬을까요. 애들도 아닌데 말이죠.
이런 장면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건 요즘 들어 조금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근처에서 많이 보여서 그런 건지, 근래에 심경 변화가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이죠. 이런 점에선 상황에 들어맞는 시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수도 없이 흔들렸던 것들이 모호한 표현의 조합으로 나타내어지는, 여태 있기만 하던 것들이 박차고 나와 자신을 주장하는, 정체를 드러내고자 여태 쫓던 것들이 순식간에 정렬되는 것들 말이죠. 자연스레 시선이 쏠리는 장면이 있다는 건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그저 미소 지어진다는 점이죠.
더불어 보이는 장면들에 단순히 기뻐한다고 하기엔 의심되는 면들이 조금 있습니다. 잠시의 미담이 끝나고 녹아내린 미소가 뚝뚝 흘러내릴 무렵, 때론 저 아래로 파고 내려가기도 했고, 때론 마주 보고 있던 제 문제들이 불거지기도 했거든요. 미소가 전부 흘러내리지 않고 있을 때도 있었지만 항상 같은 잔여 감을 느낀 건 아니였습니다. 저 깊은 우물 아래로 내려갈 때도 있었죠. 보통은 그런 어두운 날들을 위해 외딴섬에 서 있곤 했습니다. 저는 여태 기쁘고 웃음 가득한 날들에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침잠하던 날들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래 있던 만큼 닮아간다는 걸 알아챈 후에는 쉽게 되돌릴 수 없다는 것만이 명확했습니다. 보고 있던 이야기들은 전부 저 멀리에 있는 듯했습니다.
여느 사람이 그렇듯, 제 일부를 나눌 곳을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만을 찾아다니던 이들이 거의 전부였고,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는 깨달음뿐이었습니다. 자꾸만 벌어지는 불일치는 저를 다시 저 수면 아래로 내려가게 했고, 자연스레 미소에 취해 떠다니던 이들과는 멀어졌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이곳저곳을 헤매며 끌어안을 무언가를 찾아다녔습니다. 다행히도 여태까지 끝나지 않은 여정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들을 여럿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저 하늘에 떠 있던 것이 제 품으로 떨어지고, 끌어안은 각각의 파편과 제 심장의 모양이 닮았다는 걸요. 온전히 기뻐하기만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앞선 묘사는 그 별의 파편 중 하나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신기한 일입니다. 제가 쓰지도 않은 것이 저를 말한다는 게. 재미있는 건, 이 시구를 쓴 이는 시는 그저 세상을 해롭게 하는 방식으로 기여한다며, ‘시인’이 자랑스러운 호칭이 된 것에 구역질이 난다고 하곤 했지요. 저는 그런 점에서 그의 시를 좋아합니다. 그저 나쁘기만 한 장면들은 제가 지닌 모습이기도 했거든요.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라며 외딴섬이 되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도 했죠. 나쁘고 처연하게. 제가 참 좋아하는 방식입니다. **
이 나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걸 천사에 빗대어 그리기도 했습니다. “허우적거리다/ 진흙탕에 처박히는 천사.”, “진흙에 범벅되는 하얀 인조 깃털/ 그 난처한 아름다움” 고결하게만 그려졌던 천사가 진흙탕에 빠져버렸네요. 시 쓰기를 고통받는 삶의 형식으로 택한 화자는, 이런 천사들만 봐왔어야 할 겁니다. 스스로 택한 자해의 방법을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물을 파내던 저의 예전 모습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더불어 이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말하는 게 참 재미있습니다. “천사가 있다고 믿는/ 나는/ 천사가 비 천사적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상상해 왔다.” 눈앞의 부조리를 마주하는 모습에서, 꽤 멋있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정교한 쾌락주의가 만연한 요즘, 외롭게 샛길로 가는 이를 처음 보았거든요. “가까스로 매달린 채/ 엉덩이를 내보이며/ 날개를 추스르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을요. ***
하지만 비 천사적인 순간을 바라는 남자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걷는 아이를 보고 안타까워했죠. 겨우 12살짜리 아이가 여태 자신의 이름이 걸린 시집을 보아왔고, 죽고 난 엄마와 한 약속을 주제로 <약속>이라는 시집을 낸 것에요.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습니다. 슬픔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인’이 앞으로는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요. 때론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라 하기도 하고, 때론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가네” 라고 하는 이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표현을 끊임없이 쏟아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고름이 계속해서 들이차서 숨이 막히지 않으려면 말이죠. 시우는 그것을 필요한 때에 해낸 것이고,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시인’으로써 살아야 할 수도 있겠구요. 저도 어느 ‘시인’ 덕택에 몇 글자 쓰기도 했었고, 지금도 그렇거든요. 어쩌면 사람은 때론 자신의 분신을 목격해야 하는, 그런 “절창”을 노래해야 할 운명을 지닌 것일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몇개월 전인가요, 구슬픈 구절들을 한동안 뒤적거렸습니다. 오래된 노래부터 최근의 가락까지 읽었고, 다섯번째 시집을 마지막으로 덮었었습니다. 첫 만남이 떠오릅니다. 다섯번째 시집이 나온지 얼마 안되었었죠. 그 중 기억나는 건 남겨진 이승에 대한 스케치였는데요. “전광판 숫자는 끊임없이/ 누군가 흙이 됐다고 알려주고”, “분골실 옆 벽에 기대/ 소녀 하나 울고 있다” 여러 것들이 지나 가더군요. 빨간 동그란 불이 모여 떠나간 이를 불태웠다 하지만, 남은 자는 유리창 너머 조각을 보며 입을 뻐끔뻐끔. 고인의 형제를 기다리며 싸구려 커피를 마시다, 간혹 크게 들리는 소리 때문에 굳게 닫힌 입술. 생기 없이 짙어진 냄새는 가라 앉았던 조각들을 다시 떠오르게도 했죠. 하지만 그뿐. 저는 무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단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불쾌한 냄새 뿐이라 넘기곤 했습니다. “종일 울던 바다가/ 다른 세상으로 가고 있었다.” 애써 넘길 수 없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구요. “보낼 수 없는 옛날이/ 흰 운동화를 신은 채 흐려졌다.” *****
자꾸만 생멸의 순간들을 뱉어내던 이는, 수많은 자책들을 남기기도 했었죠. 가족이 부여한 사제의 길을 사랑 때문에 저버린 그는, 훗날 몇몇 노래를 남겼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미와 안개를 섞은 내 사랑은” “바람에 거꾸로 들린 내 사랑은 결국 한 다발의 사라진 시원(始原)” 연인 덕택에 시집을 읽고 시를 쓰던 그는 쫓아내 버린 사랑을 자신의 시작이라 하며, 그마저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이라 자꾸만 긁어내곤 했습니다. “슬픈 집에서 태어나 슬프게 살았지만” 집에 놓고 온 것들이 떠올라서 그랬던 걸까요, “자꾸만 멀어지던 너무나 당연한 사랑의 방법들”이 떠올라서 그랬을까요. 이래저래 떠올리다, 끝내 지나가 버린 사랑들이 함께 피어오르기도 했습니다. ******
한동안 그의 지독한 노래들을 뒤적거리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자꾸만 눈앞의 당신과 저를 일치시키려다 좌절하던 순간에, 늘 나만 있어 아찔해하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자꾸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눈물에 어쩔 수 없이, 웃고 있던 사람들과 반대편을 바라보던 때가 그려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먼저 끝나버린 이들을 정리하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던 침묵이 드러났습니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책하는 것뿐이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두고 온 게 전부 상스럽게 굳은 흉터들뿐이라, 마주한 것들 전부 “어디에도 희망은 없었” 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노래들을 듣고 있어야만 하지 않았나 싶군요. 그래도 ‘긍정’이라고 칭할만한 게 있긴 했습니다.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진 않았다”는 다짐이랄까요. 어느 ‘시인’의 말처럼요. *******
자,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 아이들을 위한 시를 쓴다니요. 놀랄 법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딸의 표현을 가져다 사용했다고 해도 말이죠. 그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무슨 동시냐 내 안에 동심이 없는데”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딸이 곁에 있어 작업하게 되었다고 하죠. 허무주의자의 동시집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품어왔던 시의 말들과는 제목부터 다르다고 느껴졌거든요. 이어서 놀란 점은 아이에 대해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였죠. “사람이 사람 때문에 대신 죽을 수 있겠구나” 라고 처음 느끼게 되었다고도 하고, ‘스텔라’ 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고 ‘얘는 어느 별에서 왔을까’ 하며 경이롭다고도 하고, 자장면 한 그릇과 군만두 한 접시를 자연스레 나눠 먹는 시를 쓰기도 하는, 그런 별을 품고 있던 보통의 날들 속의 “나쁜 소년”을요. ********
오랜만이었습니다.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말입니다. 왜냐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보통날과 제 우물 속 머무름 사이의 괴리들 덕인지, 이미 잃어버린 어린 날들을 그리워해 버린 탓인지, 더 이상 저런 그림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되뇌인게 문제인지 말입니다. 아니면 그 동일시 했던 ‘나쁘기만 했던 시인’이 즐거운 보통날에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저는 도무지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확실한 건, 어느 ‘아버지’가 새로운 시집을 내었고 그 덕택에 저는 면죄부를 받았다는 겁니다. 이제 나쁘기만 한 사람이 아닌, 찬란하고 온전하게 빛나는 별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아주 희망적이신 분이라고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노래할 수 있겠습니다.
차가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갈 땐 항상 혼자였습니다. 죄송하게도 난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슬픈 집에서 가지고 나온 연민과 내가 서 있는 샛길이 전부였습니다. 들키지 않은 채 절반도 감기기 전에 끊어진 청춘.
내 사랑은 나를 넘어뜨리고 달려가 버린 것들 중에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제 그것들은 내 눈에서 흐르지 않습니다. 지겹게 내뱉었던 인사말.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팔꿈치가 저렸습니다.
간직하기에 너무 힘든 나는 섬이었고, 결국 섬은 내 마음 밖으로 나가 주질 않습니다. 무덤덤하게 몰아쳤던 시퍼런 파도야 잘 있거라. 허전한 기억들아, 당신에게조차 가기 힘들었던 겨울이었습니다. 잊기 힘든.
고맙습니다.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 *********
* 허연 『내가 고생이 많네』 비룡소(2024) p20 「내일이 만날 있는 게 문제에요」
**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2008) p14「안에 있던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 허연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사(2012) p58「내가 원하는 천사」
****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2020) p71「절창」,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25「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사(2020) p72-p73「발인」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80 「나를 가두지마」, p82 「내 사랑은」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79「진부령」,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2008) p23「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6
******** 시인 허연 ①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시인 허연 ② 허무주의자가 성실한 이유
*********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2014) p42, 「최근에 만난 분 중에 가장 희망적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