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하다. 눈이 저절로 감기진 않으니 졸린 건 아니고, 단지 부은 것처럼 뻑뻑하기만 하니 이건 피곤한 게 분명하다. 항상 첫 시작은 눈구멍 주위로 아려오는 이물감이고, 겨우겨우 눈구녕을 열고 버티다 보면 곧 몸의 곳곳에서 응답 없음으로 반응한다. 왜 맨날 눈부터 난리인 걸까? 내 뇌피셜로는 간단하다. 10년이 넘도록 모니터 속 글자를 열심히 보아온 죄 때문. 웅크려서 눈가를 찡그리기도 해보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껌뻑이기도 하지만, 시선의 끝에는 항상 흰색과 검은색으로 강조된 글씨가 있었다. 현대 의학이 소문낸 잔소리와 함께 생각해 보면, 내 구닥다리 눈꺼풀이 후져진 이유는 밤낮으로 빛을 발산하는 모니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내가 피곤하건 말건 활자는 계속 내 앞으로 제 몸을 들이민다. 별 신호를 안 보낼 때는 무던하게 지낼 만한데, 이렇게 삐그덕거릴 땐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필요한 상황은 이렇다. 수많은 글자 뭉티기 여러 짝이 눈앞에 당도한다. 그다음엔 욱신거리는 눈꺼풀을 끌어당겨서 눈을 열어 왼쪽 위로 시선을 재빨리 옮기고, 자소와 자소를 조합해 음절로 말없이 발음하고, 음절과 음절을 이어 단어 속 의미를 잠시 저장하고, 연속된 음절-단어 분석을 통해 문장의 늬앙스를 계속해서 맛보다가, 점점 쌓여가는 문장들이 만들어낸 문맥을 읽는다. 짧은 글은 몇 번의 반복 후 끝장을 보고 쉽사리 웃을 수 있지만, 긴 글은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럴 땐 위 과정을 단순히 반복해선 안 되며, 처음의 담론과 이어지는 문맥을 계속해서 이어주면서 반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선 과정들은 단순한 노동에 지나지 않으며, 끽해봐야 텍스트를 많이 본다는 트로피에 그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이뤄지는 고군분투의 핵심은, 이 과정이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 특히 심한 건 활자에서 시작해 문맥까지 이어오는 작업이다. 이 망할 중노동은 몸이 성할 때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는데, 간혹 피곤하고 졸리기라도 한 날엔 단어와 문장 사이에서 헤매다 의미가 금방 휘발되어 버린다. 코 앞에서 사라진 의미는 다시 잡을 수 없어 다시 해석 과정을 거쳐야 한다. 욕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고로 활자 읽기는 내겐 너무나 고된 작업이다. 에너지도 많이 들고 정신도 똑바로 차려야 하고 집중도 빡세게 해야 한다. 잘 안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혼자 씩씩거리다 곧 벌렁 누워버린다. 비싼 돈 주고 카페에 가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여느 현대인처럼 그 외에도 할 게 많다. 벌어 먹고살려면 야근도 해야 하고 살 비벼가면서 사람들이랑 일해야 한다. 미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과 친목도 다져야 하고 카톡도 해야 한다. 쾌락에 만연한 디지털 노예로서 유튜브와 OTT도 봐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한다. 이리도 할 게 많은데 나는 왜 읽고 있는 걸까.
이러 저러한 이유로, 책은 내게 힘겨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무겁디 무거운 활자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그 양이 방대해서 계속된 의미 사이를 계속 이어 달려야 하고, 읽는 내내 숨겨진 패턴을 위해 의미를 쫓아다녀야 하니, 이 종이 뭉치를 보기만 해도 숨이 가빠지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현기증을 동반하는 이 활자들엔 재미있는 일들이 엮여 있다. 한번 들어보시라.
주변에 흘러가는 말들은 거의 모두 쉽게 뱉어내진 말들이고, 거의 모든 인스턴트 메시지는 편리하고 쉽게 타자에게 송신된다. 쉽고 빠르게 흘러가는 대화의 맥락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굼벵이 같은 내게는 버거운 흐름이다. 그에 반해 텍스트는 독자를 위해 기다린다, 읽히던 읽히지 않던 간에 읽을 수 있는 이를 기다린다. 흥미로운 건,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찾아가지도 않는다. 정이 필요하지만 부끄러워하는 사람처럼. 그러다 그는 치열한 터널을 달려온 온 독자를 만난다. 기다린 방법은 찾아온 주체를 반갑게 맞이하고, 텍스트는 그 자체의 목소리가 아닌 독자의 목소리로 읽힌다. 그리고 나는 한참을 읽는다.
동시에 책은 내게 분명하게 주장한다. 이 안에는 명확한 시작과 끝이 있고, 충분하지 않을 순 있어도 도착 지점은 있다고. 끊임없이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다르게, 나는 최선을 다해 거짓을 없애려 했다고. 흘러가고 발산하는 수많은 말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이 자리에 멈춰서서 완결되어 있다고. 당신을 수없이 흔들어놓는 수많은 타자와 다르게, 나만이 당신의 세계 속으로 온전히 진입할 수 있다고. 수 없이 욕구하고 놓쳐버린 수 많은 대상들과는 다르게, 나만이 당신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당신을 이해한다 말하는 이들과는 다르게, 오롯이 이해된 나만이 당신 자신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고. 그렇게 한참을 떠올리다 다시 읽는다.
이런 환청이 처음부터 들린 건 아니고, 나름의 시점이 있었다.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흔들어 놓고, 범람하는 온갖 비합리의 말들을 한참을 지나온 이후에. 계속해서 스스로 물어오지만, 여전히 닫힌 의미를 가질 수 없었던 깨달음에 지친 이후에. 문득 바라본 텍스트가 내 말을 하고 있었던 때, 그때였던 것 같다.
나는 모든 것이 내게 설명되기를, 만약 그러지 못하다면 무(無)를 원한다. 그런데 마음속의 절규 앞에서 이성은 무력하다. 이 요청에 깨어난 이성은 답을 찾지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모순과 억설(臆說)뿐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러한 비합리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이 세계의 유일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 이 세계는 그것 자체만으로는 엄청난 비합리 덩어리에 불과하다. 단 한 번이라도 “이건 분명하다.”라고 말할 수 만 있다면 모든 것이 구원될 수 있으리라. *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을까? 내게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라 답하겠다. 더불어 설명되는 대부분이 억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날카로운 물음에 무너져 내려버린다. 그렇지만 근거 없는 주장들, 수많은 비합리는 여전히 유용하게 사용된다. 흔들리는 지반에서 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을 피하기 위해, 당장의 깨어지지 않을 구원을 얻기 위해.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언제나의 거짓 구원이 약속된 파란 약인지, 왜곡된 렌즈를 벗고 눈앞의 절망을 보기 위한 빨간약인지. 내 앞의 세계엔 수많은 왜곡된 평화만 가득해 보이지만, 필름 속 이야기는 지옥을 택하고 그 속의 고군분투를 그린다.
조금 억울한 점은, 내 경우엔 살다 보니 빨간약을 이미 삼킨 뒤였다. 찾아오는 고난은 전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긍정하는 것만이 옳게 된 방법이라고. 언젠가 깨어질 평화 속에만 웅크려 있을 게 아니라, 영원한 지옥 속 투쟁에 던져지는 게 맞다고. 그러니 모든 설명될 수 없는 비합리를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에 따라 나는 스스로 어디에도 지탱할 수 없는 세계관을, 어떻게든 합리만 남겨놓는 주장을, 나도 모르게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그 명확함에 대한 호소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메아리친다. *
욕망하는 정신과 실망만 안겨 주는 세계의 절연, 통일에의 향수, 지리멸렬의 우주 그리고 그 양자를 한데 비끄러메 놓는 모순이 바로 부조리다. *
이런 논리는 자신을 숨긴 채 부조리함을 밝혀냈다. 불안하지만 확실성을 거부함으로써 불안을 유지하는, 욕구하지만 가질 수 없음을 명백하게 밝혀내 갈증을 유발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휘감아도 필요하다면 버텨내는 그런 부조리. 머리가 커질수록 논리는 밝혀지지 않은 채 강해졌고, 설명될 수 없는 부조리의 감정은 꽤 오래 내 곁을 지켜왔다.
그렇지만 다수의 행동이 당연시되는 무리 속에, 이런 괴상망측한 생각은 이해받기가 어려웠다. 부정적인 감정은 부정하고 회피해야 하는 것이며, 거짓 명제라도 이를 둘둘 감싸 보호해야 하는 것이며, 어디에도 고난은 없어야 하고 행복뿐인 유토피아가 진리라는 그런 말들만 가득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좋았다.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은 긍정해야할 무리에 속해 있었으니.
이 부조리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고 나가면서 나는 이 투쟁이 희망의 전적인 부재(이것은 절망과 아무 상관이 없다.)와 계속적인 거부(이것을 포기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의식적인 불만족(이것을 젊은 시절의 불안과 동일시할 수 는 없을 것이다.)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요구를 파괴하거나 은폐하거나 교묘히 비켜 가거나하는 모든 것(그중에서도 특히 이혼, 즉 절연을 파괴하는 동의)은 부조리 자체를 파괴하고,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태도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부조리는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
<시지프 신화> 에선 부조리의 논리를 밀고 나가면서, 이를 은폐하거나 숨기는 방식을 부정한다. 거짓 구원은 희망으로써 현실 속의 어느 단면들을 부정하고, 결말로써의 자살은 부조리를 유지할 생명을 꺼트리니, 삶의 논리로써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부조리를 맞이하며 스쳐 가는 것들 모두 긍정되어야 한다는, 참으로 현대의 인간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읽힘으로써, 선망하고 바라던 모습을 동일시할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러한 모습은 긍정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얻어졌다. 읽어줄 이를 기다리던 텍스트는, 활자의 차원에서 어느 독자의 세계로 흘러 들어왔고, 그 속의 강한 염원을 끌어내고 긍정할 기회를 끌어냈다. 철학적 자살을 만류할 논리로써 쓰인 텍스트가, 어떤 독자에게 희망과 거짓 없는 구원으로 읽혀졌다.
통상의 구원, 이는 수많은 서사의 형식–고난 후의 희망을 품은 결말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 희망의 구원은 모두 거짓이니, 내게는 거부해야 할 대상이다. 앞선 이야기가 질서와 이성의 차원의 거부였다면, 이어질 이야기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거부다.
수 없이 반복되던 목소리에 설득된 독자는, 끝나지 않은 여정을 계속한다. 그를 둘러싼 세상은 여전히 다를 게 없다. 수많은 얼굴들이 둘러싸 그를 포위하고 있으며, 쉴 새 없이 바뀌는 표정들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 감옥들은 광기에 가득 찬 말을 내뱉어 홀로 서 있는 이를 얼어붙게 하며, 날카로운 주장을 던져 둘러싸인 이를 끊임없이 짓누른다. 지옥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그는, 타자들이 메어놓은 목줄에 질질 끌려다닌다. 거기에 더해, 그 휘둘리는 이의 세계 속에선 커다란 소용돌이가 거세게 분다. 이 날카로운 회오리 속에서 그는 무력하게 찢겨나간다. 끝을 향할 절망으로써의 폭풍은 멈추지 않고 몰아친다. 계속되는 패배 속으로 휘말리는 그 자신에게 생멸의 저주를 외친다. 안과 겉 그 어디에도 안식은 없으니, 그에겐 최후에의 갈망만이 유일한 희망이고 열락이다.
버티는 것조차도 사치뿐일 그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건 변하지 않을 논리뿐이다. 무너지지 않을 비합리로써의 구조, 어디에도 결함이 없는 무모순으로 이어진 명제들, 이들만이 반복되는 재앙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에. 독자는 까탈스러운 요구 사항을 들이밀고, 어느 텍스트는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그 활자로써의 거울은 그동안 독자가 지녀온 모습을 되비친다. 거울 속엔 얼굴 없는 영웅들의 실루엣이 그려져 있고, 그들은 입 없이 같은 말을 한다. “마주해야 한다.” 그 한마디에 독자는 비틀어진 몸을 꼿꼿이 세운다. 시뻘게진 눈의 시선을 무한히 펼쳐진 지옥도로 돌린다. 고꾸라질 경련에도 마주 서길 멈추지 않는다. “끝나지 않아야 한다.” 독자는 절망 대신 투쟁을 택한다. 결말로써의 희망을 거부하고, 끝나지 않을 긴장을 선언한다. 그저 자신의 말에 따를 뿐인 독자는 지금-여기에 서 있다.
“... 만약 모든 사물의 근저에 오직 어둠침침한 열광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것과 하찮은 것 등 모든 사물을 생산해 내는 원시적이고 격렬한 어떤 힘밖에 없다면, 만약 세상 만물의 저 뒤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바닥없는 공허가 숨어 있다면 도대체 삶이란 절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감정이라 불리는 것. 영 정의하기 어려운 그것엔 확실한 단서가 따라붙는다. 나를 둘러싼 타자들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 잘 발버둥 쳐봐야 모수를 줄이고 케이스를 나누는 것뿐이다. 그조차도 쉽사리 되지 않으니, 명확하지 않은 표현으로 뭉개지는 그것은 날뛸 수밖에 없다.
더욱이 타자란 내게 꽤 길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상대”였으니, 스스로를 안전하게 고립시키는 건 오랜 습관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 역시 좋은 수는 아니었다. 원래의 양상인 “타인은 지옥이다.” 뒤에 자연스레 “삶은 고통이다.”가 붙어서 그렇다. 태어남으로써 수도 없이 흔들리는 불안함을 가지고, 선택으로써 홀로 가지는 고독 속 외로움을 가진 셈이다.
그렇게 남겨진 건 절망뿐이고, 할 수 있는 건 조금 더 썩어가는 것뿐이라. 지내면 지낼수록 끝을 향할 갈증은 목을 감싸왔다. 그러니 남은 유일한 소원은 자기 파괴뿐이었고, 매일 매일의 끝엔 그저 종말을 향한 희망만 남아 있었다.
이제 죽을 것인가, 비약을 통해 문제를 모면할 것인가, 아니면 제 분수에 맞는 관념과 형상의 집을 지을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부조리의 비통하고도 멋들어진 내기를 지탱해 나갈 것인가? **
우연찮게 만난 텍스트 속엔, 유년 시절부터 그려오던 영웅의 형상이 담겨 있었다. 여러 이야기 속에서 그려지던 끊임없는 충실함(Fidélité)은 수 없이 고민했을 논리적 완결성에 녹아 있었으며, 순간적인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통찰은 명석함(Lucidité)을 가리는 열광적인 동의를 거부하는 문장에서 그려졌다. 나는 그 속에서 찾아 헤매던 영웅들의 위상을 발견했고, 그들은 내게로 읽혀와 단 하나의 제안을 건넸다. 꿈꿔오던 이상향의 유일한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나는, 목숨을 건 내기를 흔쾌히 수락하게 된다. ***
그 내기는 매일 매일의 사투였다. 끝을 향한 희망에 나는 여전히 동의하곤 했고, 눈을 감은 채 침잠하기를 반복했으니. 그 심연에 숨어있던 어둠은 웅크린 이를 응시하며,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해 차츰차츰 다가선다. 날카로운 걸음에 목이 베일 때쯤, 칠흑 같은 하늘이 찣겨지며 커다란 형체가 떨어진다. 그 철인의 피부엔 익숙한 각인들이 이어져 있으며, 보이지 않는 안광은 새카만 끈적임을 뚫고 내게 당도한다. 그의 고요한 언령은 어두침침한 세계를 지나 내게 외친다. 끊임없이 맞서라, 남김없이 살아라. 라고. 그리고 나는 눈을 뜬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매 순간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삼는다. 위험이 인간에게 반항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 반항은 경험 전반에 의식을 펼쳐 놓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
나는 호기롭게 선언한다. 삶은 고통이 아니고 타인 또한 지옥이 아니다. 어둠은 세계의 일면이지 전부가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폭풍은 예고 없이 몰아친다. 현실을 부둥켜안으려는 부단한 긴장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여전할 것임을 단언한다. 또다시 턱 끝까지 차오를지도 모른다. 다시금 체념하며 절망에 휩싸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다. 이 목숨을 건 내기가 스스로 끝나지 않는 이상, 고개를 치켜들고 부조리를 마주할 것임을. 모든 열광과 희망은 철저히 거부될 것이며, 오로지 내세울 건 살아있음 그 자체로써의 반항뿐임을.
후. 사정이 이러니 눈구녕이 후져지는 건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책 한 권만 읽고 일어난 이 일은 절대 잊히지 않을 테고, 또다시 그 경험을 할 생각에 대환장파티를 열어재낄테니. 근데 나이가 들수록 피곤한 건 심해지던데 어쩐다. 더군다나 늙을수록 근시와 노안이 합쳐져서 그냥 안 보이게 된다던데. 이야말로 어두침침한 미래 아닌가. 아. 늙기 싫다. 눈 감으면 보이는 게 내 앞날이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에이. 그러면 안 된다. 아직도 읽어야 할 게 잔뜩 남았다. <시지프 신화> 뒤쪽엔 카프카에 대한 부록도 있어서, 사놓은 <실종자> 도 봐야 하고 <성> 도 읽어야한다. <악령>은 1, 2권을 다 봤으니 마지막 3권으로 마무리해야 하고. 중간중간 언급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 봐야 한다.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를 다 보았으니 전부 이해하지 못했던 <반항하는 인간> 도 재독해야 한다. 자, 시간이 없다. 글은 마무리하고 보던 거나 마저 보러 가야겠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민음사(2016). 48p, 41p, 77p, 54p
** Ibid., 66p, 81p, 107p, 84p
*** 에릭 베르네르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변광배. 그린비(2012). 8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