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구이

by 김수혁

“꾸루룩”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위장이 보내는 비명이다. 이놈의 소화 기관들은 왜 이리 날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지. 오늘도 역시 시도 때도 없이 난리 치는 이들은 찌르르 울리는 신호를 보낸다. 보통 두 가지 이유로 보내는 것 같은데, 잘 느껴보면 쓰레기 배출 협박 아니면 굶주림 해결 요망 문자다. 전자는 사실상의 명예 살인 예고라고 볼 수 있는데, 대충 24시간 필리버스터 경력자로서 크게 걱정할 건 아니다. 후자는 긴급 출동할 이유는 없지만, 생각보다 기력이 빨리 쇠하므로 적절히 응답할 필요가 있다. 일종의 전력 고갈 위험 신호랄까. 그리고 나는 방전되기 직전이다.


위급한 상황이다. 위험 신호는 보통 4~5시간 정도의 공복 상황 후에 오는데, 지금은 7시간이 넘었으니 진땀이 나는 게 맞다. 대충 찾은 곳을 향해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혹시 모르니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들을 주시한다. 산뜻하게 부는 바람에 노상을 깔아놓은 가게들이 많다. 얼근하게 취할 생각은 없으니 차갑게 외면해 준다. 유리창 너머로 하하호호 웃는 연인들도 보인다. 저런데는… 안간다.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러다 지도를 다시 보니, 목적지와 빨간 내 위치가 가까워졌다. 주린 배를 부여잡은 채 한발한발 숭덩숭덩 내디딘다. 가까워지니 목적지의 유리 벽 뒤로 투명하게 비치는 주방과 메뉴판을 확인한다. 바로 입구 앞으로 가서 문을 밀려는데, “재료 소진”


이런. 빠르게 몸을 뒤로 튼다. 당황한 만큼 발을 더 강하게 민다. 건물들은 뒤로 지나가는데 들어갈 곳이 없다. 단체 손님으로 떠들썩한 고깃집은 보내주고, 요즘 짬뽕을 많이 먹었으니 중국집도 보내준다. 사람들이 낑겨있는 곳도 외면하고, 먹고 싶지 않은 종목도 내팽개치며 지나간다. 내 몸 하나 뉘일 곳 없소. 하며 배를 문지르다, 어느 입간판에 시선이 간다. 먼저 시선이 마주친 입간판이 내게 되뇌인다. “이보시오. 식사 하실 곳이 필요하시오? 바로 여기요.” 끌리는 메뉴에 솔깃한 눈빛을 보낸다. “보아하니 혼자 오신 듯싶은데, 여긴 얼마든지 환영이오. 냉큼 오시오.” 가게 안을 슬쩍 흘겨보니 사람 간의 간격이 꽤 넓다. “거 목구멍이 포도청이신거 같은데, 급하시지 않으시오?” 저녁 시간 번화가에 이렇다고? 이건 못 참지.


새카매진 하늘을 뒤에 두고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딛는다. 드문드문 피어있는 이야기꽃을 피해 앉은 자리는 여백의 미가 낭낭하다. 만발한 목소리 속 한적한 자리에 앉아 굶주림과 흥분을 달랜다. 메뉴판을 잠시 보다 주문하고, 곧바로 내 앞에 물병이 놓인다. 생긴 게 재미있다. 아무런 손잡이도 입마개도 없는 통짜 유리병인데, 퍼렇게 틴트를 씌운 투명함으로 안을 내비친다. 모양은 소주병과 비슷하면서도 더 큰데, 곡선으로 유려하게 좁혀지는 병목이 우아하다. 난데없는 매끄러운 청량함의 등장에 한참을 바라보고 나니, 후끈했던 발바닥이 식어있다. 두 컵을 시원하게 비운 후 잠시의 여유를 즐기며 주변을 둘러본다.


땅거미가 진지 한참이 지난 바깥과는 다르게, 가게 안은 흩뿌려진 노을빛을 담고 있다. 발원지의 모양도 참 흥미롭다. 군데군데 알알이 매달린 전구는 아래가 잘린 구형의 볏짚이 횡으로 감싸져 있는데,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주황빛이 은은하다. 어스름하게 비추는 것이 황혼 무렵을 연상시키며, 하루 끝을 알리는 안식으로 채워주는 게 참 좋다. 한낮의 치열함이 가라앉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차분히 내려앉은 공복만이 남아 있을 무렵, 주방에서 나온 그릇이 하나씩 쟁반에 옮겨지는 게 보인다. 그 쟁반은 양손에 들려진 채 내 쪽으로 한발씩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온 쟁반을 흘긋 쳐다보니, 몇 안 되는 소박한 상차림이 보인다. 올 것이 왔군.


목재 테이블 위에 먹을 것들이 하나씩 놓인다. 여느 식당에서나 쓰는 철 그릇에 담긴 쌀밥. 작은 찬그릇에 담긴 빨간 배추김치. 시큼한 초록 빛깔에 잘려진 미역 초무침. 고춧가루와 깨 그리고 약간의 참기름으로 변주를 준 단무지. 작은 쪽파와 팽이버섯을 넣은 가쓰오부시 장국. 그리고 고등어구이. 소박한 한상이라도 즐기기 나름이니, 최선의 유희를 위해 놓여진 그릇들을 재위치 시킨다. 마지막을 장식할 장국은 옆으로 치워놓고, 흰밥을 가슴과 입에 가장 가까운 곳에 놓고, 새하얀 철 그릇을 중심으로 고등어구이와 찬들로 둘러싼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지. 얼추 준비를 끝내고 스댕 그릇 오른쪽에 놓여진 젓가락을 든다.


들려진 두 막대기의 끝이 움직인다. 그 끝이 향한 곳엔 넓게 우묵한 원목 접시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반을 잘라 펼쳐놓은 어설픈 데칼코마니의 실루엣이 머리 없이 누워 있다. 한쪽엔 꼬리에서 길게 이어진 등뼈가 노릇노릇하게 익은 살코기와의 만남을 가로막고 있고, 다른 한쪽은 번들거림 없이 구워진 생선 살의 자태를 단백하게 드러낸다. 두 꼭짓점은 무방비의 살코기를 향해 민첩하게 움직이고, 꼬리였던 부분의 살을 껍질과 함께 비틀어 한입 크기로 찢는다. 반복의 과업 중 가장 어려운 순간을 무사히 넘기고, 젓가락은 덩어리를 굶주린 이의 입으로 가져간다. 갈색의 단면에서 연상되는 건조한 딱딱함과는 달리 입안에서 결대로 뭉개지는 질감은, 수없이 씹어온 퍽퍽-단백 사이에 위치한 꼬릿살의 식감이다. 동시에 구워진 고등어 특유의 향이 위로 넘어온다.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것이, 꼬릿살과 같이 들어온 구워진 껍질의 존재감이렸다. 코로 넘어오는 익은 생선의 향취, 저작 활동에서 느껴지는 부서지는 조직의 촉감, 뭉쳐진 생선 살을 한 입 거리로 만들기 위한 젓가락질, 그리고 이들이 한데 모이는 지금. 익숙하면서도 가끔 찾게 되는 감각의 총체다.


고등어구이. 어린 시절 많이 접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부담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훌쩍 커버린 아이의 술안주가 가능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도 코 아래와 턱이 거뭇거뭇해지는 지금은, 새로운 자극보다 익숙한 음식을 더 많이 찾곤 한다. 어른이 되어서는 주로 혼자 지내곤 했는데, 수많은 잡음과 차가운 표정들 천국인 도심에서 편히 있고 싶었던 것 같다. 낯설게 느껴지는 감각을 피하게 되고, 알 수 없는 장르들에선 소외를 느끼곤 했던 것 같다. 그러니 무엇을 하던 편하고 익숙한 것 하나쯤은 있어야 했었다. 익숙한 공간에 서 있거나, 익숙한 활동을 하거나, 익숙한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거나. 수많이 먹어온 고등어구이는 어디든 매개할 수 있는 통로 중 하나였고, 낯선 것들 사이에서 잡을 수 있는 버팀목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누가 그랬는데, 누구든 어린 시절의 추억에 기대게 된다고. 어릴 때의 난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커보니 별 다를 바 없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 아저씨는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젓가락질을 계속한다. 저작 운동이 남긴 생선의 잔재를 날리기 위해, 레몬 옆 노란 생강 초절임을 집어 입안에 넣는다. 몇 년 전만 해도 강하게 쏘는 느낌을 참 싫어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와그작와그작 씹어 달콤 쌉싸름한 향을 터트린다. 자세히 보아하니 한 그릇의 겉 질감과 색상이 잘 구성된 것 같다. 과하게 익은 고동색의 등뼈와 노릇하게 갈색의 가루가 덮인 생선 살들, 이를 받치고 있는 고동색의 나무 텍스쳐의 그릇, 이들이 처음부터 일관된 톤을 이루고 조금 밝은 고등어구이를 강조한다. 그리고 어두움 사이의 레몬과 노란 초절임은, 보기에 톡 쏘는 느낌을 주어 미각-시각의 통일감을 준다랄까. 여기에 찣겨져 드러난 보드랍게 흰 속살은 “다음은 여기야” 하는 것 같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을 한 입 거리로 찢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한다. 중요한 건 반복의 과정이다. 단지 그 잠깐의 순간이 아니라, 찢고 씹기를 반복하며 그 과정에 머무르는 것이랄까. 그러다 보니 생선의 꼬리를 넘어 뱃살까지 가는 건 금방이다. 근데 좀 이상하다. 원래라면 뱃살 위에 있어야 할 긴 갈비뼈가 탐닉을 방해하는데, 내 앞에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뱃살 위엔 아무런 방해물이 없다.


가시 같은 뼈들이 취식을 방해한다. 생선의 가장 큰 맹점이다. 그래서 육고기와는 달리 가시를 바르는 과정에서 수고가 든다. 조리 전에 바르던 먹는 사람이 바르던 누군가는 해야 한다. 거의 대부분의 생선 취식 경험에선 뼈가 그대로 붙어 있었고, 먹는 누군가가 직접 발라야 했었던 것 같다. 가장 곤란한 기억은 고등어구이가 급식으로 나올 때인데, 워스트 케이스는 뱃살 토막이 걸릴 때였다. 전부 밀가루에 튀겨져 나왔는데, 뱃살 아래의 길쭉한 갈비뼈를 바르기 굉장히 힘들었다. 그래서 가끔 그냥 씹어 삼키다, 이물감에 켁켁하다 밥을 꿀떡하고 넘기던 기억이 난다. 나중엔 뱃살 토막이 걸리면 그냥 안 먹었다. 그렇지만 이런 불편한 기억보단, 마음 놓고 먹었던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 자아가 생길 무렵의 기억들 중,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선구이를 먹었던 장면은 꽤 많다. 엄마는 밀가루를 살짝 뿌려서 튀겼고 아빠는 그냥 통짜로 튀겨 내오던, 주로 갈치, 조기, 고등어가 도자기 접시 위에 놓여져 있었다. 그렇게 한참 발라먹다 김이 식고 묻은 식용유가 느끼해질 무렵, 잘 먹는다는 칭찬과 함께 발려진 생선 살이 내 밥그릇 위에 놓여 있곤 했다. 그땐 먹는 와중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았는데, 당신들의 담백한 애정이었겠다는 생각이 이제서야 든다.


느끼하다. 보통의 고등어구이 막 입을 삼키고 나면 드는 감상이다. 처음엔 프라이팬의 열기로 이런저런 감각을 감추고 있다가, 그 열정이 식으면서 묻어온 기름이 부각되기 때문. 동시에 시장기의 콩깍지도 같이 벗겨지기 때문에, 진정한 평가는 끝에 가서야 완성된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보조하는 친구들이 중요한데, 시큼한 찬이 세 개나 나온데엔 이런 이유가 있는 듯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뱃살을 찢어 넣고 씹는다. 어금니로 빻다 보면 조금 짠 비릿함이 올라오고, 잠깐 즐기다 삼킨 후 곧바로 시큼이들을 들인다. 전통의 강호인 김치는 여기서도 활약한다. 부서지는 배춧잎 속에서 올라오는 매콤함 그 뒤를 잇는 신맛은, 입안에 감돌던 생선의 비릿한 소금기를 쫓아낸다. 또 다른 새큼이들은 어떨까 싶어 씹어보니, 미역 줄기는 텁텁해서 답답하고 단무지는 참기름과 고춧가루로 나름의 균형이 있다. 입가심보단 전채 혹은 밥반찬에 가깝겠다. 그 다음엔 한 숟갈 퍼서 입에 넣는다. 반찬 다음엔 밥이 국룰이지. 그렇게 줄타기를 반복하다 보니, 한참을 익어 갈변했지만 번들거리지 않는 등뼈가 눈에 띈다. 혹시 싶어 등뼈를 들어 아래의 껍질을 보니, 건조하게 불태워진 껍질이 보인다. 기름기가 없네. 하며 되뇌이다 깨닫는다. 어쩐지 잘 들어가더라.


한 발 내디딘 가을바람이 두 뺨을 스쳐 간다. 지난한 열기에 지친 마음이 산뜻하게 식혀지니, 입가엔 작은 미소가 편히 머무른다. 한참이 걸릴 귀가 시간을 보고도 몽글몽글한 기분은 여전하다. 두 발이 가볍다. 저벅저벅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속을 간질거린다. 방금 전 일을 쓸 생각을 하니 히히 하고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쓸까 고민하며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하철에 탑승한다. 다시 떠올려보니 우연히 만난 섬세함이 계속 입안에 감돌고, 이를 되새김질 하다 보니 부담스럽지 않은 포만감이 맴돈다. 원래라면 좀 느끼해야 했을텐데 말이지. 문득 바라본 승객들 뒤의 유리창 너머로,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의 희미한 윤슬이 옆걸음치며 사라진다. 마치 귀신같이 사라지는 휴일 같다. 내일 또 콩나물 시루에 낑겨갈 생각에, 갑자기 속이 불편해질랑~말랑한다. 아. 몰라. 오늘 잘 먹었으니 이걸로 땡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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