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

by 김수혁

예비군 훈련이 끝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6년 차로써 필요한 향방작계훈련과 기본 훈련 일정을 다 마쳤고, 앞으로는 훈련 없이 신분만 유지되는 2년이 남았다는 뜻이다.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위해 5년을 날려버린 나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다. 왜냐하면 어릴 적 몇몇 친구 놈들이 병역의무를 1년 9개월 만에 해치우고, 이런 개소리를 지껄였기 때문. “야, 아직도 안 끝났냐?” “나 같으면 자살했다” “눈앞이 캄캄하다 캄캄해” 어휴. 한때 군복무가 인생 포트폴리오였던 그놈들은, 잊을 만하면 미필의 옆구리를 찔러댔고 나는 부들부들하며 눈알을 뒤집곤 했었지. 이러니 공식 훈련 일정이 끝났다는 자각은 사시나무와의 작별을 고하는 의식인 셈이다.


예비군 6년 차의 또 다른 의미는, 복무가 끝난 지 6년이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도 친구들도 모두 철없을 수 있는 시절은 흘려보냈고, 남은 건 나사 풀린 몸뚱아리와 각자 짊어질 책임들뿐이다. 의미 없는 쌍욕과 경험을 즐겁게 나누던 그 시절의 친구들은, 이젠 X 같았던 그 시절의 향수만을 되새길 뿐. 가장 무거운 국방의 의무를 해결한 듯싶었는데, 이제는 살아있음으로써의 무거움이 각각을 짓누른다. 그조차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겉돈다. 각자의 시간 속으로 갈라진 우리에게 남은 건, 이 거지 같은 군역을 무사히 해냈다는 정체성뿐이다. 욕설과 자조와 자기혐오가 한데 뭉친.


쌉싸름함은 여전히 입안을 맴돈다. 멸칭으로의 정체성이 싫었던 걸까.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회한인 걸까. 흩어진 조각들 속에서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다. 확실한 게 있긴 하다. 대체 복무를 마치고 난 후 대학에 복학한 나는 궁금했다. 나는 왜 군역을 해결하기 위해 불안해했으며, 우리는 왜 멸칭으로써의 자조에 머물러 있는 걸까. 헌법 재판소의 기각 사유에선 왜 온 국민의 국방의 의무와 남성의 병역 의무를 분리해서 보는 걸까. 왜 군 복무를 마친 대부분의 남성은, 겨우 핏덩어리가 아니게 된 애들을 부조리 가득한 군대로 내모는 걸까. 북한과 남한은 어떤 이유로 전쟁을 시작했고, 왜 지금까지도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를 유지하는 걸까. 미결의 의문은 순식간에 부풀어져 있었고, 무능한 청춘은 입을 닫고 있기만 했다. *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부조리는 삼키는 게 맞다고 여겼으면. 여태 이러고 있진 않았겠다. 그렇지만 막 복학해 에너지가 넘치던 젊은이는, 한 학기짜리 교양 강의를 통해 실마리를 쫓을 수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라는 제목의 강의로, 커리큘럼은 간단히 몇몇 사건들을 추적하는 형식이었다. 초반의 요지는 간단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의 현대사는 모두 전쟁과 맞닿아 있다는 것.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이어, 냉전 시대가 남기고 간 톱날 전쟁, 한반도에 그어진 군사분계선. 그리고 전쟁이란 거대 담론에 가려 잊혀진, 호랑이의 등에서 갈리고 흩뿌려진 살점과 핏물들. 강의는 어떠한 큰 흐름만을 보여주지 않고, 자세히 파고들어 가 그 안에 내던져진 인간들을 하나하나 조명했다.


더불어 이어진 군부 정치는 작금의 몇몇 기반들을 세워놓았으나, 그 기반들은 국민들을 향한 수많은 착취로 세워진 것이라 교수는 주장했다. 박정희 군부 시절 살아난 대한민국의 경제는, 국가가 조장한 미군 위안부의 성 노동과 월남전 파병의 피묻은 대가로 자란거라고. 중요한건 거대한 흐름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상세를 꿰뚫어 보는 것이라고. 교수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 승리자의 사료만을 주워 먹는 사학은 한계가 있고, 시대에 가려져 말할 수 없는 서발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나마 주체적인 사학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헛것을 들었다. 우리는 수많이 지나온 여러 전쟁의 참상과 국가권력의 잔인함을 추적함으로써,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사학을 만들 수 있는 거라고. ** ***


그래서 시험공부 중에 이를 찾아봤고, 화면 속 글자를 잠시 보다 껐다. 설명에 나온 마르크스주의 워딩 때문. 총을 맞대고 있는 위쪽의 이념은 마르크스주의가 원조이고, 북한은 여전히 우리가 척살해야 할 주적이었고, 빨갱이들의 이념은 곧 배척해야 한다는, 무의식 속 점층 때문에. ****


언제든 맞서야 할 주적. 빨갱이 같은 멸칭은 안 쓰였지만 훈련 속 영상 자료에선 주적이란 단어가 항상 등장했다. 정신 교육이란 목적하에 영상을 틀어주곤 했는데, 언제나 빠지지 않는 동어 반복이 거슬렸다. 잘 생각해 보면 당연하긴 하다. 전쟁은 언제든 재기될 수 있고 그땐 먼저 총구를 겨눠야 덜 죽을테니. 그래서 사격 훈련 역시 빼먹은 적이 없었다. 지면에 바짝 엎드려 부동의 표적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신호가 떨어지면 몇 발을 쏴서 맞추는 짧은 순간. 실력 증명은 수거된 종이에 거칠게 뚫린 구멍이 서로 모여있을 때 되었고, 탄착군이 잘 형성된 표적지는 훈련 날의 유일한 트로피이기도 했다. 목표한 부위를 정확하게 쏴 죽일 수 있다 칭찬하는, 언제든 재개될 비극 속의 명예 훈장 같은.


나는 예비군 훈련이 싫었다. 적게는 두세 번 많게는 여덟 번 정도의 시수를 빼먹어야 하는데, 그 시간에 강의를 제껴버리니 참으로 난감했다랄까.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는 입장에서 난감했던 건, 그래서 어쩌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내가 일정을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군인인데 훈련을 빠질 수도 없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한 폐렴이 한참을 휩쓸어 모든 것들을 마비시켰고 예비군 훈련은 온라인 교육으로 대체되었다. 그동안 나는 얼씨구나 하며 대학 졸업과 취직을 했다. 갑작스레 통보되는 훈련 일정 때문에 골머리 앓을 필요가 없으니 좋았다. 당장 눈앞에 놓인 일들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부 잊어버리고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모두가 그렇듯.




그때부턴가. 샛길로 빠지기 시작한 게. 누군가의 산책로이자 누군가의 조깅 코스를, 탄창 없는 소총을 어깨에 메고 걷던 그때. 불규칙적으로 저벅이는 군화 소리가 들리며, 투명하게 흐르는 강물을 하릴없이 바라보던 그때. 청명한 하늘 아래 2열 종대로 떠다니는 철모 무리 속에서, 느즈막히 흘러가는 청둥오리 떼를 지켜보던 그때. 한가로이 걸어가는 할머니를 스쳐 가며, 군복과 일상복 사이의 이질감이 보였던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이 일상이 전부 깨어져 버린다면, 이 모든 평화가 휩쓸려 쓸려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청명한 하늘은 초음속의 소리에 찢겨나갈 테지. 그게 어떤 생명을 꺼트리든 상관없이. 그 아래 천천히 흘러가는 핏물은 하릴없이 흘러갈 테고. 아니면 폐허에서 내려온 흙탕물이 지나갈 수도. 그 옆의 좁은 강변 길에는, 철모를 쓴 군인들은 적을 먼저 쏘아 죽이기 위한 무기를 든 채 걷고 있겠지. 여분의 살상 기회를 허리춤에 꽂아 넣은 채. 거리에 나뒹구는 과거의 생기는 수많은 군화에 짓밟히겠지. 죽은자는 말이 없을 것이다. 그게 누군가의 친구던, 누군가의 연인이던, 누군가의 가족이던 간에.


상상 속에 빠져 있다 보니, 그날의 향토방위 훈련은 금방 끝났다. 산지에서의 방어 작전을 익히기 위해 반 시간의 행군을 마친 후, 짧은 식사 훈련과 동대장의 필수적인 정보 공유는 그리 길진 않았다. 대부분의 정보와 이야기는 흘려들었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별반 차이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몇몇 정보들은 훈련마다 반복되어서, 멍한 눈의 예비군에게도 조금은 주입되긴 했다.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는 부재자 등록을 하지 않은 이상, 총동원령이나 부분 동원령이 떨어진 후 6시간 이내에 집결지로 향해야 한다고.


어느새 마지막 훈련이 다가왔다. 처음엔 여태까지 계속 별반 다를 바 없던, 시덥잖은 TTS 음성으로 만든 영상 자료를 먼저 틀어줬다. 한참을 졸다 보니 영상은 끝나 있었고, 뒤이어 동대장은 마이크를 들고 어느 PPT를 틀었다. 옛날 군대 이야기도 나름 들은 만 했었어서, 또 시작하려나 보구나 하고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동대장은 여태까지 하던 말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동대가 전시 상황에 처해지면 어떤 상황을 겪게 되는지, 소대 편성으로 인한 역할이 어떻게 나눠지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되는지에 대한.


처음에는 매번 강조하던 입영 대응 시간으로 시작되었는데, 난데없는 질문에도 영혼 없던 사람들은 빠르게 정답을 외쳤다. 곧이어 보급되는 장구류에 대한 말들이 이어졌고, 지급되는 수류탄과 탄환의 개수를 추가로 강조하며 보급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 다음엔 우리 동대가 어떤 작전에 투입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여태 거칠게 이뤄진 작전 설명은 이번엔 꽤 구체적으로 지시되었다. 그 중 첫 번째는 향토방위 훈련이란 이름에 걸맞게, 내 거주지역에서 펼쳐지는 방어 작전이었다.


한국전쟁의 수많은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동대의 지역 방어 작전 또한 산지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매번 향방 훈련 때마다 산등성이에 쌓여진 모래주머니는, 대대적인 작전 계획 속 지도에 표시된 참호 마크로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 속 화살표는 새삼 다르게 보였다. 저게 잠시나마 내 목숨을 지켜줄 것이란 게, 동시에 적들을 효과적으로 사살하기 위한 수단이란 게. 동시에 참호 속에서 바라본 트인 풍경은, 그나마 덜 죽을 가능성의 유리한 전장이라는 것도 상기시켰다. 만약에 내가 거기에 있었다면, 내가 그곳의 전투에 휘말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공기를 찢어발기는 비명. 탄환이 발사되는 소음과 그게 옆을 지나가는 소음은 다르다. 순간의 플래시를 내뿜으며 총구에서 나는 건 팡과 펑에 가깝게 울리는 소리이고, 살갗을 파고들기 위해 회전하는 탄환이 지나가는 흔적은 쐐-액에 가까운 찣겨지는 소리다. 그리고 주변에서 울리는 발포의 함성과 귀 옆에서 공기를 찢는 경고는 아무리 고지 속 모래주머니 안에 숨어 있다 해도 계속되겠지. 그렇지만 지휘관은 고래고래 소리칠 것이다. 죽기 싫으면 대응 사격을 하라고, 적들이 올라와서 아군 모두를 쏴버리지 못하게 하라고. 그러니 적군의 총알이 내 머리통을 뚫고 지나가더라도, 나는 일어서서 적군이 등반하지 못하게 발포를 해야 할 것이다. 같이 떠들던 동료를 죽게 내버려두느니, 침략 작전을 벌이는 빨갱이 새끼들의 핏물을 흩뿌리는 게 났겠지. 근데 저들도 원해서 자살 작전에 투입된 걸까? 죽이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 걸까? 물음이 들겠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닐 거다. 적들도 아군도 나도 모두 죽지 않으려면 다른 살덩이를 향해 총을 쏘고 칼로 찌르는 게 더 중요할 테니까.


개중에는 겁에 질려서 쌓여진 모래주머니에 등을 붙이고 덜덜 떠는 놈도 있겠지. 죽음이 두려워서 온몸을 노출한 채 무차별로 총탄을 흩뿌리는 놈도 있겠지. 소총의 반동과 소음은 모든 감각을 지배하기 적절해서, 두려움을 감추기엔 썩 괜찮은 방법이 될 거다. 그렇다고 죽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미디어 속 영웅 같은 군인은 어디에도 없고, 내 옆의 전우들은 두려움이 모든 것을 앞서겠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죽음의 위기를 뚫고 적들을 학살하는 게 아니라, 무심코 고개를 위로 내밀었다가 눈먼 총알이 몸을 관통해 죽겠지. 옆에서 바라본 전우의 죽음은 어떨까. 흩뿌려진 뇌수 위에 고꾸라진 군인의 시체는 나를 어떻게 만들까.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누구처럼 벌벌 떨면서 숨어 있던가, 누구처럼 제한된 탄약을 잊고 무차별로 쏴제끼던가. 죽지 않기 위해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할 텐데, 그게 말처럼 되는 건 기적에 가까울 테고. 적들이 더 몰려오면 총보단 수류탄이 효과적일 거다. 그러니 허리춤에 있던 걸 꺼내 안전핀을 뽑고 탄착 지점을 확인하는 순간, 총탄이 내 입구멍을 꿰뚫고 회전하며 뒤통수를 구멍 내버리겠지. 호 안에 수류탄, 그리고 나의 시체.


산지에서 펼쳐질 지역 방위 작전에 대한 설명을 마친 동대장은, 뒤이어 두 번째 작전인 개활지 방어 작전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역에 있는 개활지는, 근방에 있는 방어 병력만으론 충분하지 않으니 우리 동대의 대부분이 차출되어 그곳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이 또한 예전에도 간략히 이야기되곤 했는데, 그때 확인해 본 바론 내가 차출되는 쪽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니 여태 지루하게 반복되던 이야기들과는 달리, 반강제로 수행할 임무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하며.


요지는 간단했다. 한국전쟁 시절 북한이 기용하던 천으로 만든 소련제 헬기가 있는데, 재질 때문에 레이더에도 감지되지 않으니 중요 착륙지점에서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개활지니 착륙하니 좋아서 그렇다나. 그 말을 듣고 갸우뚱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저렇게 공격 작전을 펼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을 생각해 보면 이렇다. 전선 뒤에서 수도권을 휩쓸 수 있는 적절한 중단거리 미사일을 전선 뒤쪽에 배치하고, 주요 타격 지점과 수도에 집중 포화한 직후 초토화된 수도를 향해 진격하면 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 현역인 게 총알받이가 될 이유죠.” 누군가의 아이가 왜 전방에서 먼저 죽어야 되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겠다. 어차피 부조리한 삶인데 죽는 순서도 정해질 법 하지 않은가? 반면에 나는 후방에서 등따시고 배부르게 경비병 놀음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개죽음을 당하고 싶진 않으니 자원해서 갈 생각도 없을 테고. 그러니 내 앞에서 그딴소리를 하는 놈도 같을 것이고, 역겨운 위선자에게 이렇게 쏘아붙이는 건 당연할 테지. 내가 지켜야 할 개활지는 전방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고, 그러니 아무리 전시 상황이라 해도 살만할 거다. 달라진 건 개 같이 출근하던 삶이 개 같이 나라를 지키는 것뿐. 그리고 예비군 부대는 기존 사단과 합쳐지지 않는 이상, 인근 민간인들의 협조를 받아서 운영될 가능성이 크겠다. 회사 밥보다는 퀄리티가 구리겠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은 하겠지. 한식뷔페 정도면 크게 만족할 만하다. 솔직히 말해서 울상인 군인만 보는 게 아니라, 활력있는 인근 상인과 부대끼는 게 훨씬 났겠지. 노예처럼 끌려왔는데 사람들 마주하는 기분이라도 좀 좋아야 할 것 아닌가. 있으나 마나 한 작전 속에 있으니 밥이라도 맛있어야지. 전방에서 누가 뒤지던 말던 나만 편하면 장땡인 거 아닌가?


누군가가 꿰뚫리고 짓밟히며 죽어 나갈 동안, 누군가는 멍하니 서서 창밖에 하늘이나 바라보고 있겠다. 거대한 발사체가 저 푸르른 하늘을 순식간에 가르고 파열음을 내기 전까지는. 고막을 터뜨리는 굉음과 무차별하게 흔들리는 지면의 진동이 다리를 잡아끌기 전까지는. 지상에 떨어진 파괴의 천사들이 선사한 사람들의 비명을 듣기 전까지는. 그러니 나는 멀쩡한 두 다리를 사용해 그곳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다. 어느새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겠지. 아마도 군용 막사로 개조된 초등학교 같은 곳에서. 살기 위해선 달려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죽기 전의 작은 단말마도 들리겠지. 무너진 잔해가 온몸을 바스러지게 눌러, 반쯤 으깨진 사람의 살려주세요 하는 신음 섞인 말을. 그렇지만 한가롭게 누군가를 구할 시간은 없겠다. 방법도 없겠거니와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떨어지는 포탄과 무너지는 잔해가 내 몸을 짓이겨버릴 테니. 그러니 매몰차게 두발을 내딛으며 출구로 향한 나는, 그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목도하겠지. 부서진 건물의 틈 사이로 메케하게 올라가는 연기. 시꺼멓게 타버린 바닥과 곳곳에 널부러진 피떡. 그걸 밟고 포격의 사정거리 내로 달려가는 사람들. 뒤이어 다시 찾아오는 굉음과 울림. 도망쳐서 도착한 곳의 아수라장.




동대장의 마지막 당부와 수고했다는 말이 끝나고, 나는 군복 무리 속에 섞여 동사무소를 빠져나왔다. 횡단보도 앞에는 수많은 군화들이 멈춰 서 있었고, 평상시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습관은 여전했다. 이르게 나와 노을이 지지 않은 하늘은, 흐리멍텅하니 어딘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안경을 고쳐 써도 마찬가지. 곧 초록빛 신호가 켜지고 군인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 속에서 나는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이제 군복을 입을 일이 없겠다며. 예비군 훈련이 끝났다.








* 케이스노트, 헌법재판소 2010. 11. 25. 선고 2006헌마328

** 위키문헌, 브라운 각서

*** 대법원 2022. 9. 29. 선고 2018다224408 판결 [손해배상(국)] [공2022하,2163]

**** 위키피디아, 서발턴

작가의 이전글고등어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