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by 김수혁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삶을 사랑한다”라거나, “자기 자신의 전부를 마지막까지 소진”한다는, 순진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건. 오히려 반대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짐을 떨쳐내고 싶다”라거나, “자기 자신의 전부를 두고 뛰어내리고 싶다”라던가. 어쩌면 애써 외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손에 닿았던 진실은 모두, 오직 다른 이들의 말과 글뿐이었으니. *


어떤 습관이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흐릿한 자기 자신과 무목적의 투사, 갈취하는 독자와 찢겨진 텍스트, 채우려는 이와 반드시 불충분할 단편들, 그 사이의 습관이. 그러니 감수해야만 했을 테다. 결코 동의할 수 없던 말들 사이에서, 잘라내고픈 것들이 한 움큼 있었으니. 그때의 토막들을 모은다면 이런 모양새가 되겠다.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그 아무에게도 희망을 비추지 않은 채, 자기 자신의 진실로서 자족할 수 있는가.


뚜렷한 용기와 희미한 진실, 그 사이의 문제였을지도. 명료한 누군가의 서사 속 영웅과, 놀랍도록 불분명한 거울상. 어떤 시련이 닥쳐도 달려드는 모습과, 휘말리기만 하는 모호한 그림자. 이미 완성되어 주어져 있는 인물과, 어느 형태도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의식 과잉이라는 말과는 반대로, 어느 테제도 성립할 수 없는 상태였다랄까. 손에 잡히는 진실만이 전부라면, 어느 것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랄까.


분명한 게 있긴 했다. 성년을 한참 지나와도 들끓는 기억, 자꾸만 상연되는 어린 시절의 죽음, 곧 죽어버릴 엄마와 각자 슬프기만 했던 우리 집. 이어지던 사람들 사이의 불화, 울분에 못 이겨 불타는 어른들, 방치되어 이글거리던 불행의 화마. 지나왔지만 어떻게든 또 다시 펼쳐지던, 언제든 튀어나와 휩쓸어 태워버리던, 피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불을 붙여야만 했던, 형용할 수는 없으나 반복되던 장면들. 꺼낼 수 없어 파국으로 치닫던 것들.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글거리는 기억을 가리켜야만 했던 건. 유일하게 또렷한 기억과, 눈을 감으면 찾아오는 일렁이는 환영에. 그러니 납득할 순 없었을 테다. 언제 어떻게든 주어지는 시련과, 그저 엎드려 있기만 하던 자기 자신에 대해.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였던 듯싶다. 끝을 향해 투신할 용기를 지니거나, 끝나지 않을 기억을 향해 몸을 던지거나. 당연하게도, 용기는 스스로 생기지 않았고, 해야 할 건 하나뿐이었다.


단순한 회상만으론 부족했다. 단지 주변을 겉돌며 바라보기만 할 게 아니라, 주어진 화마에 기필코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그러니, 말하지 못했던 기억을 어떻게든 꺼내려 했던 듯싶다. 타자에게서 훔치고 빌려오기만 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빚어내야만 한다며. 그러니까, 어떠한 구원에도 호소하지 않고, 희망이 주어지길 바라지 않는 것. 그건 이글거리는 장면 속으로 파고들어가며, 보고 들은 걸 스스로 빚어내야만 한다고. 여긴 게 아닐까 싶다.




이야기는 끝나고, 삶은 계속된다. 반드시 되살아날 듯하던 불길, 그건 이제 보이지 않는다. 이제 목적은 완전히 상실해 버렸고, 남은 건 몇 자 쓴 것들과 잔기술뿐이다. 나아가야 할 곳은 이제 없다. 마치 내던져진 모두의 조건처럼. 아, 뭔가가 더 남아 있긴 하다. 흔히들 자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 이제는 잔뜩 적혀 있는 낙서장 같은 것. 그리고, 전처럼 다른 이들에게서 훔쳐올 필요 없이, 스스로의 진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


다시 떠돌아야만 했다. 단순히 읽고 쓴다는 점은 여전했지만. 물론 달라진 게 있긴 했다. 그저 자기 자신만이 중심에 놓이던 시야에, 다른 게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 것. 자기 인식의 외연과 경계에서, 더 오래 골몰하고 있게 된 것. 특히 눈이 가는 텍스트들이 바뀐 듯싶다. 자기 자신을 비춰 볼 만한 것들보다, 다른 이들을 경유시킬 세계관을 그릴 재료들에 손이 더 간다랄까. 갈취와 동일시의 대상으로 보이던 것들보다, 지나가며 깎여질 만한 것들에 더 시선이 간다랄까.


그중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진실이 조직되는 과정을 비추는 개념. 어떤 저자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론들을 꺼내며 진실 진술의 체제(le régime de la vérité)라는 일반화된 개념 도구를 꺼낸다. 적정 혹은 공정가격을 진실의 척도로 삼고, 교환이 일어나는 시장을 참과 거짓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삼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정식화를 진실을 생산하는 체제로서 언급하기 위해. 살아 있는 자들의 통치가, 어떠한 진실의 생산에 결부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


직후의 이론적 발전들을 짧은 예시로 든다. 불평등한 경쟁의 원리로서 재조직된 질서자유주의, 사회보장으로서 시행된 부의 소득세 기획, 인적자본론을 위시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고전 비판. 특히 마지막이 기억에 남는다. 노동자와 노동을 단순히 가격으로 추상화하기만 하지 않고, 노동자를 소득의 흐름을 발생시키는 인적 자본의 소유주로서, 그리고 노동과 직결되는 소득을 관리하는 기업가로서, 언급되는 어떤 진실의 원리들이. ***


반세기 전쯤 언급된 것들은, 여전히 모습을 비추는 듯싶다.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서 사는 것, 그 당위로서의 담론과 자기 개발의 논리. 태어나진 이유로 참가해야만 하는 경제 게임, 그에 빌붙은 경제적 자립이라는 환상. 두 인적 자본으로서의 합병인 결혼, 그 게임의 쓸만한 플레이어를 선별하는 절차. 살기 위한 기초로서 자리 잡은 것, 그 의심되지 않는 현실에 관한 조건. 그 고안된 체제와 생산된 진실들은, 지금도 유효한 코딩이지 않나 싶다.


이에 대해 비관 없이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진실은 만들어진다. 그로부터 삶의 양식은 태어나진다. 무목적의 삶은 어떤 양식을 향유할 수밖에 없다. 또, 어떤 진실은 생산되기도 한다. 여러 진실 진술의 체제들에 의해. 과정은 이럴 테다. 수많은 학문 분과들과 그를 집행하는 단체들과 복제되는 진실, 둘러싼 담론과 발화의 조건이기도 한 것들. 그리고, 어떤 진실은 다르게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자신의 궤적을 스스로 빚어내고, 그를 현실의 조건 하에 내보인다면. 그건 가능한 게 아닐까.




각자는 무력한 개인처럼 여겨지곤 한다. 가능한 건 부조리에 침묵하는 것뿐이라 말해지곤 한다. 세계는 언제나 불투명한 블랙박스이므로, 주어진 진실에 순응해야 한다고들 여기곤 한다. 원리로써 의무와 권리를 지닌 국가의 주인은, 언제나 피해자임과 동시에 언젠가 도래할 메시아만을 상상하곤 한다. 자기 자신과 타자가 공유할 수 있는 진실, 그 현실의 조건인 진실과 앎에 대한 정치는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 여겨지곤 한다.


작금의 당연시되는 무능력함은 조금 이상하다. 벌어지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진실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거와 미래는 다르나 각 시점의 진실은 같다고 여기는 셈일 테다. 과거의 무능력함으로써 바라본다면, 이전에 지녔던 무능력함이 앞으로 여전히 동일하다 여겨지는 셈일 테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겠다. “나는 미지의 일들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나는 아직 무엇이든 극복해낼 용기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용기는 마법처럼 주어지는 걸까. 실존의 양식이 진실로서 만들어진다면, 가지지 못한 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주어질 구원과 희망을 바라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진실로서도 빚어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진실 진술의 체제와 그 원리에 기반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역사와 현실로서 제작될 수 있는 건 아닐까. 흔히들 갑작스레 생겨야만 한다고 호출되곤 하는 용기는, 진실로 꿰어진 궤적으로서 불러질 수만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 아직은 순진하다 해야겠다. 잠시나마 용기라 지칭될 수 있는 것. 그런 건 아직 보여내지 못했기에. 참조할 만한 게 있긴 하다. 여러 영웅들을 둘러싼 이야기의 파편들, 그러나 삶의 진실로서는 현시될 수 없는 기억. 또, 자기 자신에게 부과한 죽음을 상기해야만 하는 시련, 이글거리는 열락에 취해 적어냈던 어떤 기억. 하지만 이들은 단지 재료들일 뿐이다. 아직까지 정련되지 못하고, 견고하게 벼려지지도 못한 것들.


뭐가 더 필요한 걸까. 이야기 속 영웅의 상징들, 지나온 도취와 열락의 인장. 이들로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떠돌며 세계와 나의 그림을 조망하는 지금, 어떤 앎과 진실을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말해질 수도 없었고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 그를 어떤 구원과 희망 없이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흔히들 믿고 자명하다 말해지는 진실과 체제에, 자기 자신의 진실로서 맞부딪칠 수 있지 않을까. 그로써 하나의 형상을 빚어내고 담금질할 수 있지 않을까.


헛된 일일 수도 있겠다. 깨뜨리고 부수기만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리킬 목적이 생긴다는 것, 그건 맡겨진 짐을 잠시나마 들 수 있는 일은 아닐까. 끝날 때까진 뛰어내리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아주 만약에, 멀고도 먼 어느 미래에, 용기라 칭할 수 있는 게 쥐어진다면, 만들어낸 걸 스스로 용기라 부를 수 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잠시 살 만했다고 여겨볼 수 있지 않을까.







* 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김화영. 책세상(1989) 18p,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민음사(2016) 85p

**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심세광·전혜리·조성은. 난장(2012) 55-67p

*** ibid, 312-3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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