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by 김수혁

“남자가 야동 보는 게 당연하지” 흔히들 들어볼 수 있을 말이다. 우리의, 이 사랑하는 시대의 흘러넘치는 말이기도 하다. 맞닿은 여러 방면에서 역류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흘러가게 두는 말. 마치 재고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 거친 파고로 상념들을 휩쓸어가는 말. 부유하고 있던 어떤 앎들 위에서, 남김 없이 삼켜버릴 듯 몰아치는 말. 또, 아득하게 펼쳐진 누군가의 진실. 계속해서 철썩이며 맞닿는 이름 모를 이의 진실. 끊임없이 부딪쳐오는 말들과, 어딘가에 둘러싸여 만들어진 진실. 동시대적인 것, 그건 숨막힐 듯 범람하는 말과 진실들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그러니 재고될 여지는 충분하지 않을까. 어떤 이분법의 절단선을 긋는 개념, 인간을 양극으로 분류짓는 통념, 남자라는 단어에 유착된 행위들. 그리고, 암묵적으로 허용된 비정상성,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판타지, 사정의 오르가즘과 환상을 잇는 행위들. 그 둘 사이를 횡단하며 잇고 만들어진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이 만들어지는 조건. 비대칭적 욕망의 용례로 환원된 논리가 아니라, 그 진실들을 둘러싼 장치 중 하나에 대하여. 각자에게 맞닿으며 감각과 논리를 접붙이는, 어떤 다분하고 당연한 것에 관하여. 한번쯤은 되새김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출발선에 다시 서볼까. 적절한 거리에 놓여진 디지털 디스플레이, 구부정한 등과 살색 빛이 비치는 얼굴. 한쪽 손에는 움켜잡힌 채 조여진 남근과, 다른 손에 붙잡힌 조작을 위한 전자 기기. 수많은 반도체 소자가 뿜어내는 빛과, 움직이는 이미지를 멍하니 바라보는 눈. 시선의 끝에서 재생되는 분절된 신체, 렌즈에 닿을 듯 더 크게 맺힌 몸의 한 부분. 과장된 카메라의 시야 안에서 들썩이는 피부, 위아래로 흔드는 한 손과 사정의 순간을 조작하는 다른 손. 분출과 동시에 격발된 단체 오르가즘 연출과, 쾌락의 끝에 다다라 격렬한 피스톤질을 멈춘 한쪽 손. 경련 후의 적막.


이들이 수도 없이 행해졌다면 어떨까. 소비를 위해 연출된 장면, 그 만들어진 환상과 함께 행해진 비밀스런 의식. 유년 시절부터 수도 없이 행해진, 자위라는 말에 가려진 훈련의 과정. 사정의 감각에 덧붙여진 시각적 자극,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호기심과 취향. 정상위와 붉은 홍조와 교태에서 출발되어, 야외성교와 강간과 BDSM을 지나, NTR 그리고 스캇물과 수간 등의 장르까지. 온라인으로 전시되는 취향과 구경하며 길들여지는 것, 수음에 깊게 자리잡은 보조 도구의 노출. 제작자의 의도로 뒤덮인 수많은 취향들과, 사정 위에 올라탄 동영상의 황홀경.


어느 당연하다는 말. 그건 꽤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공평하게 주어진 성적 자유와 취향의 견고한 진리체제에서, 실시간으로 몰아치는 이미지와 소리의 소용돌이 안에서, 발기와 사정을 둘러싼 디지털 훈육의 환경에서, 다르게 상상할 수 없다는 건 어쩌면 어떤 보편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고추를 잘 놀려야해”라는 어르신들의 말. 그건 남근과 고환이 달린 신체의 조건과 결부된 진실, 발기와 사정의 시련에 반드시 갇혀 버릴 현실, 정상적인 남자라는 범주 안으로 내동댕이쳐진 사실, 그건 어떤 현시의 문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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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이란 말은 비약일지도 모른다. 상과 벌은 언급되지 않았으므로. 신체의 쾌락과 제작된 환상의 유착, 우리 시대에서 쾌락은 정당한 보상이 아니던가. 포르노에 대한 처벌은 소수에게만 이뤄지니, 누군가에겐 그저 “좋은 것”처럼 회자되지 않은가. 하지만, 조금 더 나아가볼 필요가 있겠다. 다뤄지지 않은 흔해 빠진 말들을 통해. 잊혀지고 없던 것처럼 취급되던 말들을 통해.


“야동이나 쳐봐라” 여느 남초 커뮤니티에서 보일 법한 말이다. 한창 들락날락하던 청소년기의 기억으론, 다분히 경멸에 가까운 논조이기도 하다. 물론 그 특유의 화법이 크게 퍼져있기도 했고. 속된 말로, “너도 병신이고 나도 병신이야 ㅋㅋ”라고 할 수 있다랄까. 그런 와중에 몇 안 되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나오던 이야깃거리가 있기도 했다. 교제하는 여자친구가 노출되는 맥락이라던가, 누구와 교접을 했다며 자랑스럽게 써놓는다던가. 그리고 이를 목격한지는 10년이 더 지나갔고, 지금도 크게 다를 건 없어 보인다.


이런 배경에서, 포르노를 통한 사정은 절정 후 부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감각과 오르가즘 이후 찾아오는 자각. 부르르 떨던 경련이 사라지고, 잔여감이 떠나 남겨진 자리. 시꺼먼 화면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과, 귀두 끝에 맺혀 떨어지는 방울. 쾌락의 저편으로 떨어지며, 분리되는 취향과 추락하는 현실. 아른거리는 과장된 둔부 아래의 오입질과, 자신의 손을 떠나 쪼그라드는 용두. 사정 대상의 부재 그리고 부채감, 쓸모없는 남근의 주인으로서의 자각. 또, 올바른 사정 대상인 파트너의 부재와, 들어갈 질을 찾지 못한 사정 주체로서의 현현.


훈육은 반복된다. 쾌락이라는 당근과 자괴라는 채찍을 통해. 마실수록 더 목마르게 되는 메커닉을 통해. 사정 위로 덧칠되어 분간할 수 없는 취향을 통해. 당연하다는 말, 어쩌면 그건 정말로 당연할지도 모른다. 훈육의 과정을 통해 단단히 흡착된 습관, 알 수 없이 처해지는 발기의 순간, 미디어를 통해 노출된 이미지와 연상 과정, 누군가의 생활 세계 지천에 널린 것들. 질식할 듯 옥죄이며 사정을 유도하는 현실에서, 어떤 당연하다는 말의 조건은 정말 당연한 게 아닐까. 덧씌워진 쾌락의 조건과 그 진실로 유도하는 장치, 포르노의 역할 중 하나는 이런 게 아닐까.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떤 목적에 의해? 취향을 팔아 자본을 갈구하는 이유 때문일까. 그로 인해 일어나는 재투자의 의도 때문일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장의 목적 뿐만 아니라, 어떤 실리적 이유에 의해 방치되기도 한 건 아닐까. 어떤 환경, 전통적인 이미지적 쾌락과 그를 흡착하며 커져버린 시장, 성이라는 쌍극의 진실 체계와 결합되기 직전의 자유. 그와 함께, 예상된 예외를 받쳐주는 특이점으로써, 불발된 탄알을 재장전하는 과정으로써, 어떤 영상 장치는 자연스레 뒤를 봐주고 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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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는 공공연히 말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밀스럽고 사적인 자리에서만, 익명의 가면을 쓴 자리에서만, 상담과 고백의 자리에서만, 임금님 귀에 대해 소근거리듯 말해지곤 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상스레 지내는 의식 속 평범한 도구로써 여겨지기도 한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어딘가에선 반드시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혹은 역겹고 심판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겐 일상 속 당연한 도구로써, 어딘가에선 단죄되어야 할 매체로서, 여겨지곤 한다랄까.

참 이상한 일이다. 너무나 자명히 여겨지는 것이, 너무나 배척되어야만 할 것이, 공공연히 말해지지 않는다는 건. 지천에 널린 것, 그리고 그 공적 담론의 비형성. 어떤 특이점, 너무나 많은 말들 사이에 가려져 있는. 하지만 더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저 문제라고, 혹은 고쳐져야 한다고만 하지 않고, 다르게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쌍극의 분류체계와 비대칭으로 유착된 이미지, 성과 욕망의 개념으로써 적극적인 결합의 유도가 보증된 한쪽의 극, 그 다른 쪽의 극으로 향해야만 하는 이들 사이에서 당연한 것, 그 만연한 것에 대해 행해지지 않는 공적 발화를, 발판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러운 일로 취급되곤 한다. 들키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곤 한다. 두 쌍의 다리 이미지와 신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앞에서의 수음은 비밀스레 행해지곤 한다. 그와 함께 어떤 시청에 대한 주제 역시도 침묵으로 일관되곤 한다. 방 안에서 홀로 욕구를 해소하는 것, 모범 시민으로써 상식을 지키는 것, 그 사이에서 어떤 당연한 것은 말해지지 않는다. 마치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는 것처럼, 어떤 금기에 묶여 입을 열 수 없는 것처럼. 성-적 욕망이라는 자연스레 여겨지는 개념과, 그 개념에 의해 보증되지만 잘 말해지지 않는 것, 그 사이엔 적막만이 흐른다. 말해지지 않아야 할 듯.


“언제까지 딸만 칠 순 없지” 비정상적인 상태로 여겨지곤 한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나, 아직 올바른 사정 대상을 찾지 못한 상태. 성의 개념 하에 다른 하나와 결합되어야 하나, 여전히 홀몸의 상태에서 손만 놀리는 상태. 반드시 이뤄져야만 하는 도약의 의무와, 무한히 빚지어진 성-적 경험에 목마른 상태. 취득해야만 하는 성-적 정상성 아래에서, 사정 대상의 경제 속 하방에 걸쳐진 상태. 당연시 여겨지는 성-적 자유라는 개념 안 에서, 언젠가는 떨쳐낼 수 있단 꿈과 함께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 누군가는 이를 당연하게, 그리고 해야만 할 것으로 여기곤 한다.


획득해야만 하는 것과 청산해야만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쌍극의 체계 한쪽에서, 정상성의 갈구를 공유하는 이들 각각의 차원에서 다뤄진다. 성-적 파트너와의 결합 여부에 따른,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그를 위한 운동의 과정 속에서, 감춰져야만 하는 것은 말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신분을 향해 필요한 철저한 은닉의 노력, 그건 어쩌면 정상적인 것이 되기 위해선 필수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지는 것과, 넘어야만 하는 것을 숨기는 것. 그건 어쩌면 되어야만 하는 것을 위해, 반드시 말해지지 않아야만 하는 걸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은 계속해서 파묻혀 있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혹은 어떤 감시 체계하의 침묵. 결합되어야 할 대상과 그 차단의 표지, 생소하고 역겹기도 할 수 있는 반대편의 훈육 장치. 성-적 자유 아래 적절함을 따지는 선별 과정, 그 과정을 통과해 정상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라면, 결합의 의무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넘기 위해서라면, 어떤 장치의 흔적은 말해지지 않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건 청산해야만 할 과거의 흔적일 뿐만 아니라, 어떤 목적과 실리를 위해 숨겨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쌍극의 개념 아래의 감시 체제.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암시일 뿐만 아니라, 숨어있는 실격의 가능성으로 기능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 장치는 또 다시 성-적 경제에 편입시키는 역할로써, 누군가의 진실을 확고부동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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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해보면 알어” 흔히 들어볼 수 있는 말이다. 무한히 빚지어지고 해야만 하는 경험. 은연 중에 드러나지만 반드시 숨겨지는 경험. 자신의 역사와 타자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경험. 어떠한 조건도 설명도 되어지지 않은 경험. 어떻게든 말해지지만 결코 전해지지 않는 경험. 혹은, “진리의 사바사지”라는 흔한 말. 설명되어질 것을 가로막고 방관하는 진리. 끊임없이 연결되고 매개된 세계관을 추방하는 진리. 단순한 것만을 남기고 복잡한 것을 던져버리는 진리. 처해진 조건과 시대적 맥락의 논의를 쫓아내는 진리. 어떤 경험과 진리는 당연하게들 말해지곤 한다.


경험해보면 안다는 말. 그건 부박한 표현은 아닐까. 보편으로 여겨지지만 경험이라는 말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면, 그건 오히려 경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반드시 다른 방법으로써 설명되어야 하는건 아닐까. 사람마다 다르다는 진리의 말. 그건 나머지를 뭉개버리는 표현은 아닐까. 꺼내어진 모든 현상을 진리로써 환원하는 말, 당연한 것들 외에는 무시하는 걸 정당화하는 말, 얽혀있던 시대적 맥락과 장소의 상황에 눈 감는 말인 건 아닐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그건 재고되어야 할 것은 아닐까.


여태 다뤄지고 언급된 것. 그건 단지 누군가 겪어오고 들어온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대 일반으로 심각하게 비약되어 어떤 음모론의 취급을 받아야할지도 모른다. 통념과 학문의 입장에서 오류 투성이인 망상으로 여겨져야 할지도 모른다. 일상의 문법과 엄중한 문법으로 번역되지 않은 표현, 그렇게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표현은 반드시 개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매끄럽게만 읽고 쓰는 습관, 쉽사리 잘 바뀌지 않는 이 습관은, 우리에게 동어반복과 상투어만을 당연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 당연함은 어디선가 심판의 근거로 쓰인다. 포르노를 둘러싼 우리 시대의 진리, 그건 어디선가 확고부동하게 여겨지곤 한다. 아무런 공적 발화 없이도, 아무런 경험의 설명 없이도, 포르노는 어딘가에서 단죄되어야 한다고 말해진다. 어떻게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에 맞닿는 조건이 무엇인지, 규명은 미뤄진 채 형은 집행되어야 할 듯 여겨진다.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발화의 조건, 경험이 말해지며 만들어지는 조건, 그 역시 살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즉각적인 판단과 결정 이전에, 당연한 걸 당연하게 치부하기 전에, 어떤 물음이 제기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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