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by 김수혁
나는 기억한다. 창문 너머로 하얗게 내리앉던, 고요한 거리에 홀로 서서 비추던, 시리도록 어두운 밤이 내보이던 광경을. 설레이던 발걸음과 재촉하던 옷가지들. 그리고, 칠흑으로 점철된 하늘의 끝에서, 한가로이 낙하하던 순백의 먼지들과, 흰 거리에서 두 팔을 들고 춤추던 그림자. 꾸준히 덧칠되는 아스팔트와 식어가는 몸짓. 또, 검은 머리카락 위로 쌓인 얼음 꽃, 티 없는 길 위에 남겨진 발자국,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잘 지내십니까. 날이 많이 춥습니다. 무탈한 겨울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에 첫눈을 맞이했습니다. 계신 곳에선 어떠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동여매셨을 수도,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셨을 수도 있겠군요. 아니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고 계셨을까요. 모쪼록 평안하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얼어붙은 지면에 미끄러지기도 하고, 희뿌연 시야에 조금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잠시 넋이 나갈 수는 있었지요. 간만의 절경에 말입니다.


한때는 참 좋아했었습니다. 아무런 말 없이 두둥실 가라앉는, 자고 일어나면 보드랗게 쌓여있는, 찾아올 때도 찾아온 후에도 시선을 뺏기는, 그런 일 말입니다. 아무리 갑작스레 찾아온 일이라도, 기쁘고 즐거우면 환영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차가운 바람이 갑자기 분다 한들, 또 그건 환하게 웃을 일이기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두려운 일이 닥쳐온다 한들, 품을 수 있다면 어디로든 헤쳐 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 사라지더군요. 눈을 뗄 수 없던 광경은 금세 멈춰버리고, 구름들도 금방 날아가 버렸습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듯, 모든 게 하룻밤의 꿈이었다는 듯 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겁니다. 무엇이던 영원히 남길 수 있다고, 잡고 있는다면 그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모든 순간들은 단지 꿈이 아니라, 잊을 수 없는 현실로써 현현할 거라고. 저도 믿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자꾸 의구심이 듭니다. 마치, 사라지는 건 사라지도록, 놓아야 할 건 놓아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더 환해졌습니다. 외로이 길을 비추던 가로등 뿐 아니라, 자그마한 빛알들이 곳곳에 맺히기 시작했지요. 또, 뻣뻣한 초록 잎의 나무 거인이, 빨간 장신구들을 두른 채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마치 한참 남은 이름 모를 이의 탄생일을 위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을 감싸듯 말입니다. 모두 마땅히 기뻐할 일들이라 여기는 듯 싶습니다. 품에 감싸질 일원이 된다는 것, 누군가와 잠시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인 듯 말입니다.




어찌 지내십니까. 계신 곳은 따뜻하신지요. 모쪼록 포근히 머무르시길 바랍니다. 저 밖의 한기를 피해, 쉴 수 있을 곳을 찾으셨길 바랍니다. 매해의 끝 무렵 들리는 종소리와, 곧 얼어붙을 입김은 함께 있지 않겠습니까. 어딘가엔 온기를 나누려 맞잡힌 두 손이 있고, 어딘가엔 한파를 피해 각자 숨은 두 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연시 될 사람들의 온기 속에 계시지 않다면, 어느 고요함들과 함께 계시길 바랍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헤메이지 않게, 자리를 찾아 피해 계시길 바랍니다.


저는 피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다른 이들처럼… 아, 꿈 같은 건 꾼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넋놓고 바라 보기만 하던 절경과, 언젠가는 녹아내릴 하얀 세상처럼, 누군가와 함께할 어떤 꿈에 대해서 말입니다. 당연히 관계하며 온기를 누릴 수 있고, 자명히 주고 받으며 기뻐할 수 있고, 단단하게 깨지지 않을 그 신기루에 대해서 말입니다. 형식이 없고 현실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품고자 하면 품을 수 있는 것 말입니다. 떠올리면 웃음이 나오는 그런 일을, 막연하게나마 그려보곤 했었습니다.


곧 그리던게 현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가질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것으로써, 그러나 어디에나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마치 손 끝에서 녹아내릴 눈처럼 말입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이의 빈자리를 견뎌내다, 또 다른 이와의 끝을 그리게 될 쯤이었을까요. 혹은, 스스로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혼자라는게 당연하다 여길 쯤이었을까요. 그도 아니라면, 갇혀있던 기억 밖에서 보이던 광경, 누군가의 당연한 장면이 꿈과 겹쳐질 쯤이었까요. 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있습니다. 아득하게나마 보이던 건, 제 현실에선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잔인한 날들 아니었겠습니까. 거리에서 웃음과 온기를 나누지 못하고, 그저 숨죽이며 기억을 되새김질 하던 그때는. 하얗고 선명한 사람들 사이의 축복이 아니라, 어둡고 시릴 곳에 희뿌옇게 있어야만 했던 그때는. 화목하거나 애정어릴 곳에서 함께 있는게 아니라, 꿈의 결정들이 몰아치던 광경 속에 홀로 있어야만 했던 그때는. 그러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 멀리에서 내리던 첫눈은 제게, 때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눈보라처럼, 때론 날카로운 파편으로 휘감던 칼바람처럼, 여겨져야만 했던 건 아니겠습니까.




평안이 곁에 머무르길 바랍니다. 마지막에 다다르지 않으셨길, 혹은 자리를 지켜내실 수 있길 바랍니다. 꼭 무너져내릴 터널 밖에 계시길, 혹은 너무 오래 버티시진 않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영원할 건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게도 끝은 오기 마련일 뿐만 아니라, 막아내는 와중에도 예고는 계속되면서, 흩뿌려지며 사라지는 걸 봐야만 하는 건 말입니다. 당도하지 않아 무한히 뻗어나가는 허구들 사이에서, 그 세차게 부딪쳐오는 싸라기눈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위태롭게 버텨내야만 현실에 잡아둘 수 있는 건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안됩니까. 저는 단지 두려웠을 뿐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볼 수도 없던 것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 다가온 후에. 건네지고 만들어진 자리에서, 감싸안기도 몰아치기도 하는 절경 앞에서. 꾸준히 그려오기도 했으나 밀쳐내어지곤 했던, 누군가에겐 당연시될 현실이 말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그런게 당연하단 말입니까. 어찌 그 모든게 젊은 날의 치기로, 그저 버텨내기만 하면 만들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다다를 수 없는 것이 말해지는 현실이라는 건, 제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단지 사과를 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찌되었든 제게 건네어진 소중한 것, 어쩌면 온 힘을 다해야만 전해질 수 있었던 그를, 마치 없는 것 취급하고 부셔버린 걸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과정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누군가의 꿈을 무너뜨리고 그건 불가능하다고, 내 꿈 속에선 당신은 추방되어야 마땅하다고, 그리 여기는게 어찌 잔인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그 끝 없는 추위로 다시 돌아가라고, 그 당신이 그리던 건 안된다고 말하는게, 어찌 당연하고 소중한 꿈일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그려 봅니다. 지켜지기만은 할 수 없는 것. 당연하지만 부서져 내릴 수도 있는 것. 넋을 놓고 보게 되기도, 몰아치며 떨 수 밖에 없기도 한 것. 그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쩌면 단지 안부를 전하는 것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짧은 인사를 건네는 것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켜질 수 없는 자리에서, 다다를 수 없는 곳에서 바라보며 말입니다. 결국 첫눈은 아직 내리지 않았고,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인 듯 싶습니다.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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