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단어장

by 이상훈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선 무엇이 더 강하게 인식될까?

죽음의 공포,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통 이런 것들로 인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살아있는 어떤 것 보다 강렬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나이 60대 초반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술을 밥보다 더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가끔 소화가 안되신다며 『노루모 산』가루를 매일 한 술씩 드셨다. 그러다 정도가 심해지셨고 가족들의 지청구에 못 이겨 병원 검사를 받았는데 최종적으로 췌장암 4기 진단이 내려졌다. 당시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수술이 어렵다며 아버님께 좋은 음식을 많이 해 드리란다. 길어야 6개월 정도밖에 못 사실 것이라고...


아버지는 인생 초반을 거칠게 사셨다. 유아시절 친어머니를 세상에서 잃으셨고, 한국전쟁시기를 세상에 혼자 남겨진 소년 같이 지나오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몇 달 전 어느 날인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아버지의 후배 지인이 집으로 찾아왔다.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이와 그이의 가족에게 아버지가 도움을 주셨노라며, 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고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켰다며 사람답게 살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덕택이란다. 손주도 보고 좀 평안한 삶을 살다 보니 가끔 예전의 아버지가 생각이 나 시골을 오가는 때에 아버지의 고향을 일부러 찾아보았다며, 아버지의 지인들을 수소문해 병석에 누운 즈음에서야 이렇게 오게 되었다고 말씀을 한다.


아버지께서 지금의 시골에서 산 데에는 백조부의 역할이 컸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결혼할 당시만 하더라도 백조부에게는 대를 이어갈 자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진단 후로 대략 1년 정도를 더 사시다 돌아가셨다. 임종이 가까워 올수록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약성 진통제가 없으면 더없이 힘들어하셨다. 가끔 허공으로 손을 내 저으시기도 하셨다. 우리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까마귀 소리가 들리거나 검은 옷을 입은 사자가 자주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이 몸짓과 혼잣말로 형상화하셨다.

좋은 음식이라는 것도 건강할 때 드셔야 맛있게 드실 텐데 아프시니 아무 소용이 없다. 돌아가시기 전 대세를 받으신 아버지는 매주 찾아오는 성당 레지오 단체에게 크게 감사해했다.

거친 성품은 성장과정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고, 엄한 표현 방식은 삶 전체에서 항상 그러했다. 어린 시절에 새어머니를 맞으시고 아래로 다섯 남매를 더 두셨으니 편안하기를 기대하는 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한국전쟁을 겪고 이곳저곳의 친척집을 전전하시면서 미군 군무원 생활을 하시다 결혼을 하셨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칠게 보낸 아버지의 인성은 황량한 들판에 거친 소나무 같았다. 전쟁으로 약육강식이 된 서울 변두리의 거친 사내들 틈에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끔 영남이나 남도지방 친구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쏟아냈던 지역 사투리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러기에 그의 삶을 ‘나쁘다’ 혹은 ‘좋다’라고 이분법적으로 정의해 버리는 것은 안타깝다. 자식을 사랑할 줄 몰라서라기보다 거칠게 자라온 환경 탓에 적확한 단어의 사용이나 아이들이 가졌어야 할 따뜻한 가정환경에 대해 충분한 지식이 없었고 무조건 엄하게만 하면 혹은 무조건 이웃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했던 듯하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보고 듣고 해왔던 것들은 장년기의 삶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아버지가 죽음을 경계에 두고 계실 때이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퇴화되고 정신도 혼미해져 혼자서는 화장실 가기도 버거울 무렵 병환 중에 잠이라도 들면 온갖 것들이 정신을 어지럽혀 놓던 그때. 젊은 시절 각별했던 지인 분 앞에서 뼈만 앙상한 앙상한 아버지가 퀭한 눈으로 이불 위에 누운 체로 말씀하셨다. “더 살고 싶다”

슬픔조차 내색하기 힘든 모습이셨음에도 아버지 몸에 작은 경련이 생겼다. 아버지의 눈물이다.

그건 인간 본연의 삶에 대한 애착이고 늦게 찾아온 자기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속에서 슬픔이 복받쳐 오른다. 붉은색의 울음이 머릿속으로 울려나갔다.

많은 날을 그렇게 죽기를 간절히 바라셨는데...

제발 그런 말씀을 그만 거두시라 했는데...


어린 시절 나는 보라색 표지에 코일로 편철된 단어장을 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일어난다. 아버지가 보던 영어 단어장이다. 내가 영어 단어장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첫 단어는 autumn [˄́ːtəm]이다.

가을이기도 하고 인생의 황금기를 내려 놓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autumn은 영국식의 발음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한글로 발음을 병기했다. 농군이셨던 아버지가 영어 공부를 했다는 게 믿기지도 않았다.

요즘은 유치원도 가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는데 당시엔 초등학교 고학년이더라도 영어 알파벳 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영어로 표기된 제품이나 포장지도 흔하지 않아 눈에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포켓판 영어 단어장에 관심을 잠시 보이니 아버지가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물론 당시에 무슨 말이었는지도 몰랐다. 1973년이란 단어가 박힌 벽에 걸린 달력을 보시고 “일천구백칠십삼 년” 즉 “원사우전드나인헌드러드세븐트쓰리”라고 읽지 않고 “나인틴세븐티쓰리”라고 십 단위로 끊어 읽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매일 검불 탑세기를 머리와 목에 두른 수건 그리고 겉옷에 수두룩하니 묻히고 다니셨던... 신발이라도 벗을라치면 그 안에서 온갖 흙먼지를 토해냈던 아버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얼마만큼의 단어를 가지고 얼마의 시간만큼 이야기했을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시간의 총량은 얼마나 될까?



나의 졸업식 중 아버지가 와 주셨던 것은 대학 때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대학 합격자 발표 때도 함께 하셨다. 당시엔 학교 게시판에 합격자를 붙여 놓았는데 거기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기뻐하셨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



존재만으로 좋든 싫든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산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사람이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혹은 잘 못해준 것만 기억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봄이 오면 많은 죽어 있는 것들은 봄 즉 생명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다.



삶은 그렇게 태어나고 결실을 맺으며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어둠에 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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