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자신감이 있더라도 외형적으로 나를 낮추어 내보이고 상대를 높이는 것이 겸손이나 겸양이라면 자격지심은 상대에게 무한한 겸손을 가진 것처럼 보이나 기실 자신감 없음에서 비롯된 자기 비하 혹은 상대에 대한 의탁과 같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학교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실습이 전체 수업시간의 1/3이나 되는 공업고등학교다. 하루 종일 실습실에서 뷰렛이나 비커를 세척하고 시약 방울이나 세곤 하는 것이 일과이다시피했다. PV=M/W×R×T였나 공식도 열심히 외우고 자격증 준비를 하며, 실업계고에 진학한 것을 후회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 듯하다.
학년 초 자취는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친구와 한방에서 생활을 했는데 그 친구가 보기보다 쾌활했다. 같이 자취를 결정하게 된 것도 그 친구 때문인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는 잘 알지 못했던 친구였는데 같은 고등학교에 전공만 다르게 진학하면서 알게 됐고 서로 타지에서의 학교생활이었으므로 많은 의지가 됐다. 한참 후에 알게 됐지만 부모님들끼리는 서로 안면이 있는 터였다. 그 친구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숙기가 유난히 좋아서 인근 여학교에 다니는 여자애들에게도 먼저 아는 척을 곧잘 했다. 지금 보면 참 좋은 장점을 가졌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때는 그 친구가 왜 그리 낯간지럽게 느껴졌었다. 어릴 적 생각으로는특별한 것도 아닌데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 싶으면 말을 걸어 보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학교 학생들은 팥죽색 보다 좀 더 짙은 붉은 기운이 도는 치마와 재킷을 입고 다녔다. 나도 가끔 등하교 길에서 마주치기도 하며, 등하교 구간이 겹쳤던 몇백 미터 골목길을 같이 걷기도 했다. 또 그 여학생들이 내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옆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기도 했다. 그런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런 외면이 자존심이나 자격지심에서 나온 것일 듯싶은데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힘들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행동양식이 편했을 수도 있지 싶기도 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조금만 숙기가 있었다면 참 재미있는 학창 시절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그게 무슨 커다란 자존심이나 되는 양 상대가 말을 걸어오지 않으면 절대 먼저 다가서지 않았다. 아마 그때 생각으로는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하숙하고 있는 그 친구에 비하여 자취하고 있는 내가 내세울 것도 변변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몰랐다. 물론 인문학교에 다니는 그 애들과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나와의 비교도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같은 반에 물론 여자 동급생들도 많았다. 그 친구들은 내가 특별히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이기심이 가득한 나를 받아주고 그들 스스로가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 때문인지 같은 반 친구가 아니면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 집 앞에 있는 슈퍼마켓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말을 걸어야 겨우 대답을 하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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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들의 최대 고민은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반찬 만드는 법도 몰라 가장 쉽게 했던 것이 계란 간장 비빔밥 정도다. 요리 도구도 변변하지 않아 양은 냄비 한두 개와 도마 그리고 칼이 전부였다. 제일 많이 먹었던 것 라면이지 싶다. 연탄 화덕과 석유곤로를 이용해 식사 준비를 했는데 부엌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만한 크기였다. 요즘 외롭게 지내는 독거노인들이 지내는 그런 규모와 시설이다. 당시 시설로는설거지를 할 수 있도록 수도꼭지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고, 연탄보일러 통과 화덕 그리고 그릇을 보관하는 조그마한 찬장과 연탄을 쌓아 놓는공간이 전부였다. 주인집 부엌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가는 문과 부엌의 크기가 이 조금 컸을 뿐이었다. 세를 놓는 집들 대부분은 구조와 크기가 비슷했다. 셋집에는 인근의 속옷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누나들과 전문학교에 다니는 형들도 살았다. 나름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신혼살림을 해나가는 가정도 있었다. 집집마다 경제규모가 달랐지만 사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다. 셋방 구조는 부엌 겸 집 입구로 통하는 출입문이 각각 있었는데 송판으로 조악하게 만들었거나 학교 교실문 같이 점방 유리문을 가져다 붙인 문이 달려있기도 했다. 어느 집 문은 여닫이 어느 집 문은 미닫이로 같은 라인에 일렬로 붙어 있는 집이라도 똑같지는 않았다. 한 집에 그런 방과 부엌이 하나씩 딸린 구조로 되어 있는 룸이 보통 서너 개씩 되었다. 다만 그 안에는 부엌과 방을 구분하는 띠살문이 또 있었다. 가재도구도대략 소재와 무늬까지 비슷비슷했다. 대부분 학생들이 살던 셋방에는 비닐로 된 옷장과 책상 그리고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알루미늄 소재의 둥근 밥상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사각형 밥상이 있었다. 천연목재로 짜인 가재도구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공간이 적어 가재도구를 들여놓지도 못했지만 비싼 가구를 살 형편도 안되었다. 당시 월세가 아마 2만 원인가 했다. 화장실은 밖에 하나가 있었다. 시골 똥둣간 같은 것이었는데 주택에 사는 모든 이가 공용으로 사용해 아침이면 방문을 열어놓고 화장실을 계속 주시해야 일을 볼 수 있었다. 공동화장실 옆 마당가에는 빨랫줄과 수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신혼살림을 하는 방의 새댁이 제일 자주 빨래를 했다. 어느 날 휴일 아침인가 새로 지어진 2층에 거주하는 신혼집 부부가 요즘 오징어 게임에서 등장했던 세 줄무늬가 그려진 체육복을 입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 모습이 근사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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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행하는 주택가 골목길은 어디서 주워다 깔았는지 보도블록이 깔려 있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흙바닥이어서 비가 오면 질퍽거리고 운동화는 유명 브랜드가 가려져 친구들 간의 간극이 없어지기도 했다. 그 당시 유명 브랜드였던 프로스펙스와 나이키는 많은 아이들이 선호했고 자주 분실되는 품목이었다
짧은 3년간의 자취생활이지만 같은 공간에 많은 이들이 떠나고 새로 들어와 살았다. 같은 학교 아이들은 입지조건을 따지면서 매년 새로운 집과 같이 동거할 이들을 찾았는데 나는 무슨 조화였는지 그 집에서 3년을 내리 보냈다. 그 집은 대지가 높아서 밑으로 아랫동네의 셋방 집들의 지붕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여름날이면 마당 한껸 벽에 호박넝쿨이 가득했다. 그 여름날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 신랑은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고물상을 운영한다고 했다. 입방식을 한다고 한밤중에 콜라와 스낵 과자류를 가득 사들고 주인집 방 앞쪽의 마루에서 시끌벅적하게 세입자들끼리 떠들던 장면이 떠오른다.
셋방에서 자취하는 학생들은 매주 토요일이 되면 용량이 큰 가방에 빨래 감과 김치 통을 담아 들고 고향 집으로 향했다. 반찬이래야 김치밖에 없어서 김치를 가져오지 않으면 맨밥을 먹는 다고 봐도 무방하다. 간혹 주인아주머니가 과하게 만든 반찬을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그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내가 세를 살았던 집은 큰길 옆 파란색 대문 집이었는데 집 위아래로 슈퍼마켓이 있어서 찬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단지 내가 어렸기에 무얼 만들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가 살 던 셋방 집의 위쪽과 학교 주변에는 비슷한 집들이 많았고 부모님 집을 떠나 올라온 많은 아이들이 자취를 했다. 그 친구들은 간혹 여자애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했다.
어느 날 강원도 원주에서 5명의 대가족이 단칸방 셋집으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남학생 한 명, 중학교에 다니는 여학생 한 명 그리고 대학에 다니는 형님 한분과 그 집 중년부부 등 다섯이나 한방에 살았다.
중학교에 다니는 그 아이는 매일 아침 마당 수돗가에 나와 맨살이 드러난 민소매를 입고 세수를 하거나 머리를 감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무엇이 답답한지 매일 밤늦게 까지 쏘아 다니는 게 일상인 듯했다. 그 집에 사는 남자애들이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겨울이면 많은 양의 연탄쓰레기가 가구마다 쏟아져 나왔다. 혹여 빙판길이라도 되면 길옆에 쌓아 놓은 연탄재를 깨뜨려 길바닥에 뿌려놓기도 했다.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시 구절이 떠올려지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