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사장이 있는 해안가 마을의 아이들은 모래로 놀이를 하고 넓은 평야를 껴안듯이 들어온 灣 주변의 갯벌을 가지고 있는 우리 동네 아이들은 갯벌 웅덩이에서 검은 갈색 빛이 도는 벌 흙을 가지고 놀았다. 모랫벌이나 갯벌이나 태양은 같았지만 바다색도 아이들의 입성도 많이 달랐다.
70년대 灣의 아이들은 자연이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도 灣 안쪽 갯벌에서 놀던 그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말이다. 우리의 뇌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 그 말이 딱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灣의 환경 밖 시선에서만 보면 박수근 화백의 그림 속 아이들처럼 혹은 어느 도자기 만드는 도예공의 아이들 인형처럼 순박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루 온종일 흙을 가지고 놀았음에도 핸드크림을 사용한 적이 없기에 아이들의 손은 가뭄 속의 논두렁만큼이나 갈라져 있었다. 뭐 물론 바셀린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피부에 신경을 쓰는 그런 사회는 아니었다. 놀이할 것이라고는 흙 이외에는 전혀 마땅한 게 없었던 그곳에서 놀이기도 하며 부모님의 일손을 줄여 주는 것은 진흙 놀이를 하며 개흙 속에서 조개류를 찾아내는 것이 여러 면에서 이득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놀이는 주로 진흙을 모아 탑을 쌓거나 두 손으로 살짝 진흙을 움켜쥐어 누르면 겹쳐진 엄지손가락 틈 사이로 진흙이 가래떡처럼 흘러나오게 하는 것들이다. 이때 진흙의 촉감은 모래 해변에서의 모래놀이와는 사뭇 다르다. 매끈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드러운 촉감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놀이가 끝난 다음이다. 모래는 다만 툴툴 털고 일어나면 그뿐이지만 갯벌 흙은 아이의 얼굴에 진흙 팩을 발라놓는다. 흡사 보령 해수욕장의 머드팩 축제에서와 같이 진흙을 전신에 묻히기도 한다. 진흙 팩을 하고 집에 들어온 아이를 당시 엄마들은 어찌했을까 한 번 상상해보시라 그래서 아이들은 뻔한 꾸중에 대비하여 갯벌에서 잡은 조개 등 갑각류를 들이민다. 빨래의 수고에 대한 대가인데. 유효한 방어벽이 되어 주기도 했다. 아마 그 시절 머드팩이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바다 풍경도 지금에서 보면 고즈넉하고 멋진 풍경인데 당시엔 매일 반복되며 보여지는 것이어서인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의례히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많았다. 지금 같았다면 SNS 등을 통해 우리 동네 灣의 엄청난 풍광에 합당한 평가를 하고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렸을 텐데 말이다.
가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무인도 독거노인들의 자연관찰 사진들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슈퍼 문같이 큰 달덩이가 지구에 가장 근접할 때의 만조 바닷물일 때나 겨우 물맛을 느끼는 땅은 평소에는 바닷물을 접할 기회가 적어 갯벌 흙에서는 수분이 빠져나가 말라 버린 머드팩과 같이 갈라지고 하얀 소금기를 내뿜는다. 그 땅에는 함초나 칠면초 등의 염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는데 가까이 보면 염생식물의 색깔이나 줄기 모양만 그저 그렇게 보다가도 와이드 한 항공사진으로 보면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지는지를 아마 모두들 알 것이다. 절기상으로 백로를 지난 늦가을 저녁이면 석양의 조명이 구름 사이에서 퍼져 내려오고 기러기 때라도 줄지어 날아오르면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런 감상을 그 시절엔 갖지 못한 것이다. 아마 감상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을 것이고 그런 느낌은 아마 어른들의 전유물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다만 그냥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인 듯 무심했다. 환절기 때까지 아이들의 입성은 마음만큼이나 변화가 없었다.
가을 낮은 덥다.
콩잎이 시들기 시작한 신작로를 지나고 논둑길을 돌아 갯둑에 이르면 보았던 풍경
함초나 칠면초가 멀리까지 피어 끝이 없어 보였던 그곳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붉게 펼쳐진 갯벌에서 난닝구를 입은 몇 아이의 움직임은 그저 자연일 뿐이다.
자연 속 어린 아이는 늘어난 난닝구를 입은 심정 마냥 당당한 것도 없었고 당당할 법한 것도 찾기 어려웠다. 사고와 감성의 기운은 아무데도 없었던 듯 싶다. 어쩌면 아이에게는 언제쯤이면 이 늘어난 난닝구를 벗고 색다름을 다양함을 멋짐을 경험해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 않았을 까 싶다. 자연의 일부인 그저 잘 찍힌 사진 속의 아이에게 굳이 개성을 부여하자면 말이다.
난닝구가 변화없음이나 고단함을 함축하는 의미 말고 굳이 다른 실체적인 의미를 찾자면 가성비 좋은 난닝구가 개흙을 가지고 놀이하는 데는 제격이었다 정도였을까!
메리야스가 아니 난닝구에 대한 기억이 그래서 좋지가 않다.
길게 늘어나 앙가슴이 다 보일 정도였던 흰색의 난닝구.
땀에 절고 개흙이 덕지덕지 붙은 방학 시절의 평상복이었던 난닝구.
방학을 맞아 타지에서 낯 모를 여학생이 놀러 왔어도 나의 그 난닝구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난닝구와는 다르게 나의 쑥스러움 끝도 없이 자랐던 것 같다.
마을 아이들은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바다내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그리고 난닝구가 평상복의 전부인 줄 안다.
다만 비구름이 몰려올 때는 늘어난 난닝구 사이로 더 많은 시림도 함께 극복해야 하는 당연한 것으로 안다.
만의 바다는 누렇다.
가끔 아버지와 함께 쪽배에 몸을 싣고 외가를 찾아 나설 때 뱃머리에 부딪히던 누런 빛깔의 바닷 물색이 전부 그런 줄 알았다.
그때는 바다색이 그런 줄 알았다.
오염된 저개발국가의 아이들이 하늘색을 회색으로 알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다 달력에서 본 이국적인 바다 색깔에 내가 살고 있는 곳과 감정 이입을 하고 비교를 한다. 쪽빛 바다, 쪽빛의 하늘, 쪽빛의 이국 지붕이 부유해 보인다.
그러면서 황토 빛 바닷물이 모래가 아닌 갯벌이 왜 그렇게 가난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그런 기분이 드는 날이면 조개껍질에 발바닥이 베이기도 하고 손톱에 낀 개흙도 잘 빠지지 않는다.
다리가 놓이고 길이 닥이고 물산의 흐름이 번잡해지면서 만도 변해 갔다.
변한 만큼의 나의 마음이 가난에서 벗어 낫는지는 모르겠다.
에머럴드빛 풍경에 대한 동경은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