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에 의지해 사는 사람인가?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왠지 자주 심리적 불안정성에 빠지기 때문이다. 화가 몸 안에 가득하다. 화를 빼고 온유를 담아야 하는 나이에 나는 왜 이토록 화를 달고 사는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나의 심리적 불안의 기저에는 딸아이가 여전히 학생이고, 어머니가 연로하시며 넉넉하지 않은 경제형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기술적으로 우월해야 할 시기는 지난 것 같다. 그러므로 이제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잘되어야 하는 것도 욕심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한 것들이 내 안을 채운다. 그것들은 자주 내 몸에 화로 쌓인다. 물론 화를 낸다고 이러한 문제가 순식간에 해소가 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하던가 나의 소심하고 조급한 성격은 한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적 교감 능력이 증가하면서 조금은 개선된 듯 보여도 나와 관련된 일들이 정상적으로 풀리고 이득을 얻지 못하면 여전히 감추어진 본성이 몸 안의 한구석에서 삐죽거린다.
그래서 나의 말을 들어주는 좋은 이들을 옆에 두어야 한다.
대게는 의지하는 이가 무던하면 나도 비슷하게 무던한 성향을 가지기도 한다. 좋은 멘토를 두고 있는 이는 그만큼의 값이 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해 왔던 것들은 몸에 배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본능이 이고 또 하나의 DNA이다. 몸에 배어 있는 바람직한 것들이 행복이 되고 귀감이 된다.
불행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보통 사람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불행이다. 가족, 일, 주변인과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못해도 신체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도 인간은 불행해질 수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이와는 반대로 함께 할 가족이 있다는 것, 먹고살만한 일이 있다는 것, 소통할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 병사(病死)의 고통을 당장은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일 수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어느 순간 잃을 수도 있고 좀 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과 내 삶의 어느 분야에서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고 타자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 것도 행복을 연장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결과적으로 행복해지려면 타자와의 좋은 관계, 종교에 대한 의탁 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것에도 에너지는 필요하다. 종교와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보통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열성을 다하는 것이 동반된다. 무념무상인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죽음뿐이다.
인간 대부분은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대부분의 인간은 교육 등에 의해 본능을 억누르고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삶에 불만이 없는 경우에는 가면의 얼굴이 진짜 내 얼굴인 냥 살아가지만, 삶에 불만이 생기면 감추어진 본성에 충실해진다. 그런 때에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모국어(부모님의 언어)”라고 한다.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불편한 순간이 되면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가 되어 본인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 한순간에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어쩌면 나는 정말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다.
인간은 강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자기 자신이 나약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위로해 줄 것을 찾던지 아니면 초라해지지 않을 무언가를 갈구하면서 자신을 가꾸어 가면 결국 그 가면이 내 얼굴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류의 것들 중 중요한 것이 종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내 마음은 어떤가?
나의 마음은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는 항상 상대방과의 교류를 필요로 한다. 나의 마음은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마음은 넉넉함과 무엇이 나를 넉넉하게 해 주는지도 잘 알고 있다.
나를 넉넉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로 돈이다. 부족한 통장잔고는 나를 우울하게 한다. 그렇다고 생기지도 않을 돈을 “돈돈돈”한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돈 벌 궁리를 해본다 한들 쉽게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부족한 통장잔고에서 생겨난 불편한 마음은 불편한 말들을 쏟아내게 하고, 상처를 안긴다.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대신 채워 놓아야 할 것들이 필요하다. 비슷한 입장의 많은 이들도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이렇게 날것의 본성대로 불편한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간다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가?
말 하나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말인데 정말 말뿐인데 말로 이렇게 치유될 수 있는데 왜 나는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말은 얼굴과 같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관계가 좋으면 답답할 일이 별로 없을뿐더러 얼굴색 또한 밝고 아름답다.
부족한 것은 줄이면 가능한 일일이다.
서로 간에 부족하다는 교감을 이해하면 그뿐인데 서로 간에 경쟁심이 생기고 질투로 바뀌면 삶은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경쟁으로 더 나은 삶을 가지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다. 효율적이고 풍성한 이익을 가짐으로써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인간의 욕심은 수만 년 전 인간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해서 집안을 건사하고 아이를 낳아 학교에 보내고 의식주를 해결하다 보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하고 있는 행동 및 소비패턴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에 허덕이고 만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교가 주는 위안보다 경제적 해방을 더 많이 꿈꾼다. 50년대 이후 IMF시절까지의 불안정한 시절에는 부의 대물림이 크지 않았지만 2천 년대 이후 선진국에 진입하면서 계층적으로 이동이 적어지고 불안한 계층의 삶은 대물림되었다. 이러하기에 돈에 대한 집착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계층에서 하나의 종교 이상의 굳건한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돈이 예수고 돈이 부처다라는 말들도 여기서 나온다.
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은 더 나은 삶을 기대했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고단하다. 물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법도 모르고 절대 돌아갈 수 있는 환경도 아니다. 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물질문명을 포기하고 60~70년대의 삶을 살아가라 하면 그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유발하라리가 지은 ‘사피엔스’를 보면 인류초기 수렵채집인들이 어쩌다 발견한 밀을 재배하면서 보다 나은 생활을 설계하고, 동시에 정주 생활을 시작하지만 정주 생활이 가져오는 단점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주생활은 더 많은 노동력의 필요, 전염병, 부양가족의 확대와 그리고 늘어난 가족이 먹을 만큼의 많은 농지 등 끊임없이 해야 할 이들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익숙해진 정주생활에서 다시 수렵채집생활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익숙해진 농업생활과 역사의 단절 등이 원인이 됐다. 현대사회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생활 때만 하더라도 멋진 가정생활을 꿈꾸지만 고비용의 주거비, 고가의 차량 구매비용, 세탁기, 건조기, 청소기 등 각종 가전제품 등 사치품들이 주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과다한 대출을 함으로써 금수저가 아니라면 행복한 삶이 은행에 저당 잡혀 있는 형국이 된다.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조금 참조해 보면 인간이 초기 수렵채집생활 때 만 하더라도 필요한 경우에 한해 수렵과 채집 생활을 했고 한 곳에 정주하지 않은 특성으로 아이를 3~4년에 한 명꼴로 가졌다고 한다. 수렵채집생활의 이점은 그로 인해 전염병 등으로 인한 아동사망률도 크지 않았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이동을 통해 필요한 만큼의 양을 충분히 사냥 채집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농업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태어나는 아이의 수가 많아졌다. 아이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모유를 수유할 기간도 짧아졌고, 물론 이유식을 만들 수 있는 밀이 있다는 것은 좋은 점이지만 면역력을 길러주는 모유 수유를 짧게 함으로써 질병에 걸려 사망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고 여성의 수태가 늘 진행됨으로써 노동력 감소를 불러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태어나는 아이 수는 수렵채집 때보다 더 많아졌으므로 그만큼의 밀 수확량 증대가 필요하게 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성인들은 수확량 증대를 위해 개간을 하고 재배방법을 개선하는 등 수렵채집 때 보다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했다고 한다.
삶의 패턴을 아는 것과 삶을 되돌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요즘과 같이 몇 달 만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시절에도 그러하거늘 수십 년에 걸쳐해 오던 일을 갑자기 중단하고 옛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삶은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더 열심히 살아나가야 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런 삶이 수렵채집생활에서 농업혁명(농업 정착 생활) 이루어지면서부터 인간의 삶이 더 심각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주장이다.
인간만이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외로울 수 있고 의지할 무언가가 필요해졌다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얼마만큼을 포기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