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컥해야 할까!
아버지 생의 마지막은 암이라는 치명적 질병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던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가끔 친구가 찾아오면 더 살고 싶다는 속내를 내비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 놀랍고 정말 안타까움에 눈물 흘린 적이 있다. 그런 기억으로 인해 삶이 고통스러워도, 삶을 마무리하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수의가 입혀진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제야 떠올랐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장 한 벌 제대로 사드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런고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넓고, 그 사이엔 설명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감정들도 한편에 남아 있다 해고,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시 누구에게서 ‘아버지로 사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그분의 선택과 침묵, 서툼의 일부가 조금은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이 세운 학교를 다녔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어 친척집으로 보내졌다. 전쟁통에는 거리를 떠돌았고, 군대를 다녀왔으며, 그 모든 시간을 버텨냈다. 목숨은 질기게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던 삶이었을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눈에 ‘가족’이라는 풍경은 낯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듯싶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음식을 담은 박스를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던 모습이다. 그때의 나는 ‘돌아가셨다’는 말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나이였다.
또 하나의 기억.
아버지가 술 한 잔을 하고,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시신을 꽁꽁 동여매는 염을 치르는 동안, 곁에서 통곡하며 “아버지를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라고 말하던 모습이다. 그 말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의 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새어머니보다도 더 너그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분은, 아버지에게 단 하나뿐인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가치관이나 행동규범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채 살아오셨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통과해 여기까지 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제야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