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불이 많이 났던 시절

by 이상훈


며칠 전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어 놨지만 따뜻한 기온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과 지붕 위에 내린 눈이 다 녹으며 논길과 신작로는 질퍽해져 한발 한발 움직이기 힘든 만큼 통행이 크게 어려워졌다. 갯벌만큼 빠져드는 것은 아니지만 디딜 곳을 잘 선택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이처럼 모든 길이 진흙탕으로 변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길 보다 벼꼬투리가 남아 있는 논 바닥을 요리조리 건너 친구 녀석 집을 갔다 오기도 한다. 가끔은 길 옆 마른풀 더미를 발견하고 밟고 지나는 행운도 가져보고, 마늘밭에 덮어 놓은 지푸라기를 밟기도 하지만 걷기 지옥이 된 마을에서 정반합 마냥 어디선가는 보폭보다 훨씬 넓은 진흙탕 국면을 맞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밤이 되고 온 세상이 칠흑같이 되면 땅도 꾸덕꾸덕 얼기 시작하는데 낮의 진흙탕은 사라져 부담 없이 마실 갔던 친구 집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땅이 꾸덕해진 늦은 날 귀가는 흔하지 않은 일이고 밤길은 누구나 약간의 무서움을 동반하기에 낮 동안의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신발과 바지 특히 나이 어린 친구들의 꼴은 말이 아니게 된다.


북풍이 계속되고 건조한 바람이 땅을 말리다 보면 하늘에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는 날도 맞는다. 그날의 빛은 방안의 초롱불 보다 밝았다. 논이나 밭에 마늘을 심고 그 위에 보온용으로 짚을 푹신하게 덮어 놓은 곳은 낮동안에도 도움이 되지만 휘영청 밝은 보름날 주변 밤에도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기도 한다. 물론 어른들의 짚 밑의 마늘싹이 다치지 않을까 하는 큰 걱정은 아랑곳없다. 달 밝은 그런 날 이웃집 형님 누나들과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 보다 훨씬 큰 그곳에 편을 나누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기도 하고 달빛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숨을 죽여 은폐를 해 보기도 한다.


그런 겨울날의 밤이었다. 모두가 불내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부모님 몰래 자기 집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가 참을 청할 때 마침 어디선가 “불이야” “불이야”하는 소리가 들린다.

분주히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 이웃동네로 연결된 논과 들길 위를 다급히 쫓아가는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을 끼고 집밖으로 나왔는데 건너편 집 창고 처마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다행히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와 불은 금세 진화가 되었다.



불을 낸 사람은 누구일까?

또 불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렇게 쉽게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집 창고는 전소가 되었을 듯싶다. 당시에 화장실은 모두 집 밖에 있었다. 화장실을 가던 이가 목격했을 가능성이 제일 높고 그 소리에 이웃집들이 모두 나와 불을 진화하는 데 도움을 줬다.

불이 난 집의 큰 아들은 범을 쫓기 위해 부지런히 달렸지만 마을 경계를 넘어 도망가는 수상한 자를 잡지는 못했다. 흰 눈에 덮여 있는 논은 대부분 쟁기로 엎어 놓아 잘못하면 발목을 다치기가 예사다. 어느 날 밤에는 그 집으로부터 몇 채 건너의 집에서 비슷한 일이 생겼다. 불이 난 집 모두 집의 규모가 크다. 사랑채가 있고 안채가 있고 중간에 다목적 건물이 이어져 있다. 불은 바깥쪽 창고에서 주로 발생했다. 아마 인명피해를 줄 의도는 없었던 듯싶다.

그 먼 타지까지 와서 불을 내고 도망가는 심리는 무엇일까?

누가 왜 무슨 불만이었을까? 하는 생각은 지금에 와서 갖게 됐다. 불을 내고 도망가는 이를 밤길에 쫓아갔다 돌아온 이의 말도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당시 가끔 1년 단위로 계약을 맺고 바깥사랑채에서 머슴으로 일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어쩌면 품삯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 와서 생가해 보면 무슨 의도를 갖지 않고는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불을 내고 도망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다가 겨우내 불감으로 사용하거나 소먹이용 사료로 쓸 짚을 태우기도 했고 "이 자리에 없는 아이가 불을 낸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윤석렬이 검찰총장시절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다 “라는 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주면서 말이다. 낮의 불은 대부분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늦은 밤의 화재는 원인을 밝히기 쉽지 않다.



그날 가마틀이 놓여 있던 그 창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먼 타지까지 와서 불을 내고 도망가는 심리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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