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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LK Jun 23. 2018

레 블뢰: 또 하나의 프랑스 역사, 1996-2016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보여주는 프랑스 사회

4개월 만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역시나 글은 꾸준히 쓰지 않으면 쓰려고 마음 먹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 같네요. 꾸준히 글을 쓰시는 분들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그간 몇 차례 글을 써보려고 했지만 장기간 글을 올리지 않다보니, 쓸까말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하면서 이 공간을 방치해버렸네요. 3월 말을 기점으로 유럽에서 서머타임이 해제되면서, 정말 햇빛 보기 힘들었던 프랑스의 끔찍했던 이번 겨울이 끝나고, 이곳저곳 놀러다니느라 더 그랬던 것 같고요. 그래서 긴 휴지기간을 끝내고 올리는 이 글에선 월드컵 시즌에 맞춰서 축구 이야기 - 그 중에서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과 프랑스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클럽 경기까지 챙겨보는 축구팬은 아니고 국가대항전인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 정도만 관심을 집중하는 정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국가대표팀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인데요, 직업 차원에서 두 나라 역사를 제가 좋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 정말 빈틈이 없어보이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다르게 저 두 국가대표팀은 준수한 실력의 팀이지만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것 같은(?) 그런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는 점,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국제대회 성적이 널뛰기를 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뭔가 좀 더 인간적이라고 해야될까요? 그런 모습이 제 애정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섹션에서 발견했던 <레블뢰: 또 하나의 프랑스 역사, 1996-2016 Les Bleus: Une autre histoire de France, 1996-2016>를 더욱 재미있게 봤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상징색인 푸른색을 딴 애칭인 "레블뢰"가 20년 동안 겪은 영광과 굴욕의 역사가 곧 현대 프랑스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기도 하다는 것인데요, 다큐멘터리는 크게 네 부분 - 신화 (1996-2000), 추락 (2001-2006), 혼돈 (2006-2011), 단합 (2012-2016)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 네 부분의 제목은 바로 그 자체로 20년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파란만장했던 역사를 보여주지요.  

          1부 “신화”는 1998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 대회 즈음,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의 초대 대표였던 장 마리 르 펜Jean-Marie Le Pen (이 사람은 지금 당수인 마린 르펜Marine Le Pen의 아버지인데요, 국민전선을 좀 더 대중적이고 온건하게 바꾸려 했던 딸과 정치적 불화를 빚다가 명예당수의 위치로 물러나고말죠)의 발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국가대표팀에 “외국인” 출신이 너무 많다며 이들을 프랑스 대표로 만드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이냐고 반문하지요. 그러나 실상 프랑스 영토 밖에서 태어난 외국인 출신 선수는 가나 태생의 마르셀 드사이Marcel Desailly 한 명 뿐이었습니다. 르 펜은 단지 팀 내에 유색인종이 많은 것을 보고 지레짐작했을 뿐이죠. 이 논란은 그렇게 커지진 않았습니다. 대표팀 감독이었던 에메 자케Aimé Jacquet가 “우리는 자유의 나라”라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1998년 7월 12일, 프랑스가 브라질을 3:0으로 패퇴시키고 안방에서 첫 우승을 거머쥐며 저런 논란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죠. 당시 샹젤리제 광장에는 1944년 나치로부터의 파리 해방을 기념했던 때 이후로 최다인 15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프랑스의 우승을 자축했을 정도로 열광적인 분위기가 넘쳐났습니다. 2000년 유로 대회 결승에서 이탈리아를 연장전 끝에 골든골로 꺾고 우승하자 프랑스 사회의 열광은 최고조에 달했지요. 저도 고등학생 때 새벽녘에 이 경기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론과 대중은 모두 흑인-백인-아랍인이 함께 하나의 프랑스팀을 이뤄 우승했다며 (여기서 아랍인은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국가 출신인 북아프리카계 프랑스인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프랑스 공화국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칭송했지요. 그러나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프랑스의 흑인 배우 오마 시Omar Sy는 이러한 표현이 당시 현실을 지나치게 앞서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월드컵 우승만으로 프랑스 사회에 내재해있던 인종문제를 단번에 고칠 수는 없었던 것이죠. 다큐멘터리는 아랍 계통으로 추정되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전통적인” 프랑스 이름에 비해 구직 인터뷰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무려 대여섯 배나 적다는 연구결과를 보여줍니다. 축구로 인한 일시적인 열광과 행복감은 이러한 현실을 결코 영원히 가려줄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러한 축구와 현실의 괴리감은 2001년 프랑스와 알제리의 친선경기가 경기장에 난입한 군중들로 인해 순식간에 엉망이 되며 중단된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했던 식민주의 시대의 악행은 아직도 프랑스 사회에서 진지한 반성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고 (지금 대통령인 마크롱이 선거 레이스 당시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악행을 사과한다는 발언을 하자 나머지 대선후보들은 좌우파 가릴 것없이 마크롱이 국가를 모욕한다며 비난을 퍼부었죠), 게다가 북아프리카계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2등시민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또한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일삼던 극우후보 르 펜이 무려 4백50만표(17%)를 얻으며 좌파 후보인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을 제치고 결선투표 진출에 성공한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었죠. 다큐멘터리의 두 번째 부분인 “추락”은 공교롭게도 그렇게 프랑스 사회의 인종문제가 폭발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적도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지요. 이어서 2005년 북아프리카계 프랑스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파리 교외지역에서 벌어진 폭동은 프랑스가 공화국의 정신이자 모델로 내세웠던 “통합”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부와 언론은 이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라카이racailles (영어로는 lowlifes - 이른바 “밑바닥 사람들” 또는 “하층민”으로 번역할 수 있는 굉장히 경멸적인 어감의 단어입니다) 라고 부르며 강경한 대응을 천명합니다. 특히 당시 내무부 장관이자 후일 대통령이 되는 사르코지Sarkozy는 이들을 “청소해버리겠다”는 표현까지 동원하지요. 1998년 월드컵 우승 멤버이자 프랑스의 카리브해 영토인 과들루프Guadeloupe 섬 출신의 릴리앙 튀랑Lilian Thuram은 라카이라는 표현은 유년 시절 불량배들이 자신과 같은 이민자 혈통이나 유색인종, 또는 빈곤계층의 아이들을 괴롭힐 때 쓰던 표현이라며, “누구를 청소하겠다는 건가? 청소되어야 하는 대상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날선 어조로 정부와 사르코지를 비판합니다 (튀랑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제국이 유색인을 이른바 “인간 동물”의 카테고리로 동물원에 전시했던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회의 큐레이터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는 2006년 월드컵에서 은퇴를 앞둔 지단의 맹활약으로 결승까지 올라가지만, 그 위대한 지단도 결국 결승에서 자신의 가족을 놓고 가해진 언어폭력을 참지 못하고 상대방 이탈리아 선수를 머리로 들이받고 퇴장당합니다. 지단이 빠진 프랑스는 이탈리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고 말았죠. 후일 그 발언은 지단의 누이를 성적으로 모욕하는 발언이었음이 드러났고, 2005년의 “라카이" 논란과 더불어 위대한 축구선수인 지단마저도 알제리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서 저런 언어폭력으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3부 “혼돈”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최악의 난장판이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동시에 프랑스 사회도 경제적 불황과 정치적인 보수화로 휘청거리게 되고, 평소같으면 공화국의 상징으로 찬사를 아끼지 않았을 대표팀의 다양성은 점차 “나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지요. 지단이 은퇴한 이후의 프랑스는 2008년 유로 대회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으며, 대표팀 감독이었던 레몽 도메네크Raymond Domenech는 선수 기용과 경기 운영은 차치하고서라도 기괴한 발언과 행동을 일삼으며 팀을 막장으로 몰고 갑니다. 게다가 선수들을 통제하고 팀의 단합을 이끌 수 있었던 정신적 지주인 지단이 은퇴하자 국가대표팀 내에서 선수들끼리의 불화와 내분은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지요. 급기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대회에서는 선수였던 니콜라 아넬카Nicholas Anelka가 라커룸에서 부적절한 언사를 도메네크 감독에게 했다는 이유로 협회가 그를 팀에서 제명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번엔 선수들이 단체로 아넬카를 지지하며 훈련을 거부하고 항명을 하게되지요. 서로 단합하여 열심히 훈련해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말까한 큰 대회에서 이런 “콩가루” 집안과 같은 추태가 하루가 멀다하고 언론과 국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프랑스는 결국 2008년 유로 대회에 이어 2010년 월드컵에서도 1승도 올리지 못한 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굴욕을 맛봅니다.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망신을 당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8년 월드컵 우승 멤버였던 로랑 블랑Laurent Blanc을 감독으로 영입하고 엉망진창이 된 대표팀을 재건하려 노력합니다. 블랑은 선수들에게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가사를 숙지할 것을 요구하면서 대표팀 선수로서 책임감과 애국심을 가질 것을 주문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역설적이게도 1998년 당시 르 펜의 발언 - 대표팀 선수들 중 “외국인”이 많으며 그들은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니다 - 을 증명해준 셈이 되어버립니다. 선수단 식사 메뉴에서 할랄 푸드를 제외시키는 등, 블랑은 유색인계 선수들을 자극할 행보를 계속하지요. 가장 치명타는 이중국적 선수에 관한 협회와 로랑의 대화가 유출되어 기사화된 것이었습니다. 비밀리에 녹음된 이 대화에서 프랑스 축구협회는 아프리카계 이중국적자가 협회의 유소년 트레이닝 센터에 과도하게 많으며 이 수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블랑 감독에게 말하고, 블랑은 이를 지지하지요. 이어서 블랑은 우리가 딱 하나의 유형의 선수 - 힘세고 강한 선수 - 만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는 이런 힘세고 강한 선수는 바로 흑인들뿐이라고 말하며 스페인은 흑인 선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없다고 끝을 맺지요. 어느 면으로 봐도 인종주의적인 소지가 다분한 발언이었습니다. 블랑이 결국 공식적으로 사과했을 정도로 이 발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프랑스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공화국 정신의 상징이라 추켜세우던 축구계 내부에서도 인종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죠. 프랑스는 2012년 유로 대회에서도 결국 8강에서 스페인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더불어 대표선수였던 사미르 나스리Samir Nasri가 언론에 상스러운 발언을 내뱉고, 라커룸 싸움이 또 터졌다는 기사가 나왔죠. 레블뢰의 부활은 요원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지막장 “단합”은 1998년 대표팀 주장이었던 디디에 데샹Didier Deschamps이 새롭게 감독으로 부임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데샹은 가장 먼저 대표팀이 프랑스 국민들의 애정을 얻어야함을 강조합니다. 팬들에게 항상 인사하고, 사인 요구를 받으면 거절하지 않을 것, 그리고 라커룸 내부의 일을 바깥으로 가져가지 않을 것 - 이 세 가지를 주문하지요. 데샹 감독 부임 이후에도 크고 작은 잡음들이 있었지만 대표팀 내의 기강이 잡히면서 프랑스는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유로 대회에서 이전 대회의 끔찍했던 면모와는 완전히 달라진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특히 지단 은퇴 이후 훌륭한 젊은 선수들로 팀을 세대교체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명되고 있지요. 프랑스 방송에서도 연일 1998-2018이라는 헤드라인을 걸어서 대표팀 소식을 내보내는 것을 보면 20년 만에 대표팀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큰 것 같습니다. 그만큼 1998-2000년 당시 프랑스 축구의 선전이 프랑스인들에게 가져다준 행복감이 대단했다는 것이겠죠. 물론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듯 그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프랑스 대표팀의 잔혹사는 또한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인종문제와 차별이란 어두운 면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했습니다. 레블뢰는 참혹했던 굴욕의 시절을 뒤로 하고 20년 만에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지금 프랑스의 주력 선수들 중 다수가 바로 유년시절 자국의 첫 월드컵 우승을 보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온 이들이라는 점도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지금 프랑스 대표팀은 이른바 1998 키즈들인거죠. 프랑스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다면 1998년부터 이어진 신화-추락-혼돈-단합, 이 극적인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레블뢰의 역사를 시작하는 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역사가 프랑스 사회의 인종문제를 은폐하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면하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과정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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