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수제비
‘승부욕’… 운동선수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도 이 승부욕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승부욕이라는 송곳은 잘 감춰두고 꼭 필요한 순간에만 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쑥 내 주머니를 뚫고 나온 날카로운 바늘 끝이 되어 나부터 찌르고 만다.
막 차장 승진을 한 나는 두려운 게 없었다. 누구나 인생의 한 번쯤은 한없이 머리가 명석해지고 앞이 또렷하게 보이는 시기가 있다고 했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온 듯했다. 회의시간에 브리핑을 받으면 그 해결책의 단초들이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였고 노트 위에 급히 써 내려간 아이디어들은 그것들의 뼈대와 날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부터 나는 이미 확신에 차있었다. 입사한 후 처음으로 일하는 게 즐거웠다. 아니 짜릿했다. 나를 중심으로 떨어진 볼륨이 크지 않은 프로젝트들을 나는 막힘없이 해냈다. 그러자 본부장님은 나에게 좀 더 강도 높은 일들을 경험해보라며 옆 팀으로 나를 보냈다.
다들 10년 차가 넘는 베테랑들로 구성된 그 팀에서 나는 차장이라는 직급에도 불구하고 막내였다. 팀의 브레인은 곧 부장 승진을 앞둔 차장 선배였는데 성실과 끈기 그리고 냉철한 완벽주의자로 회사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팀장님은 전적으로 차장 선배를 신뢰했고 모든 일의 진행을 그에게 의존하는 듯했다. 그리고 답답하리만큼 모든 일에 팀원들이 다 동원되었고 대충 넘어가도 그만 일 작은 일에도 꼼꼼히 따져가며 디테일에 목숨을 걸었다. 나는 슬슬 이런 프로세스에 짜증이 났다. 회의실을 나오는 팀장님을 잠시 멈춰 세우고 나는 이제 나 또한 차장급이니 선배와 일을 나눠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언제나 웃는 표정인 팀장님은 말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어쨌든 그 양반이 선임이니까 그분과 상의하도록 해요.”
선배와 나는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나눴고 최종 시안을 넘기기 전에 둘이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나는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다시 신입 때처럼 사수에게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의 승부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자료를 모으고 며칠간 야근을 하며 머리를 짜냈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기세 등등하게 내민 나의 아이디어들을 선배는 특유의 완벽한 문장과 아나운서 못지않은 정확한 발음으로 요목조목 질문을 하고 문제점을 집어냈다. 어이없이 기가 꺾인 나의 승부욕은 서슬 퍼런 오기가 되어 선배와 신경전을 벌리며 나를 거칠게 몰아 쳤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한 건의 일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나는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만 했다. 퀴퀴한 일주일의 땀냄새가 배어있는 사무실 속을 걸어가 내 자리에 앉자 어디선가 소곤소곤 속삭이듯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선배는 무언가를 열심히 써내려 가고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서 울리는 그 소리는‘네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의 답을 나는 이미 푸는 중’이라고 선배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시간은 저녁 10시를 넘겼고 선배는 한사코 만류하는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며 자신의 차에 태웠다. 집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나서는 안될 두 사람이 우연히 한 공간에 던져진 듯한 어색함이 흘렀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이 차문을 열고 집으로 뛰었다. 그러다 어둠 속의 돌 뿌리에 걸려 쿵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접진 듯한 오른쪽 발목에 심한 통증이 있었지만 나는 선배가 뒤에서‘이런 셈 통이다’하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내 모습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다시 뛰었다.
다음날 오른발은 신발을 신을 수 없을 만큼 퉁퉁 부어 있었고 발목의 통증은 심각했다. 나는 팀장님께 조금 늦겠다고 전화를 하고 병원으로 갔다. 한 시간을 기다려 치료를 받고 절뚝거리며 회사로 출근을 했지만 팀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자리는 모두 텅 비어있었다. 내 자리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인 투명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파일을 열어보니 지금까지 내가 선배에게 보여줬던 이이디어들이 전부 프린터 되어있고 각각의 아이디어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점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혹시 선배가 어제 회사에 나와서 한 일은 이게 아닐까? 어느새 자리로 돌아온 선배는 괜찮으냐고 나에게 물었다. 선배는 팀원들은 모두 외근 중이라고 하며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선배와 나는 감자 수제비집으로 갔다.
뿌연 연기가 나는 수제비를 앞에 두고 선배는 말했다. “어제 그 밤에 네가 갑자기 넘어져서 얼마나 놀랬는데… 걱정이 돼서 차에서 내렸는데 네가 다리를 쩔뚝대며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가더라. 순간 내가 얼마나 미안했게. 그동안 내가 널 참으로 불편하고 힘들게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숟가락을 들다가 스르르 다시 놓고 말았다. 미안한 마음에 가슴은 먹먹해졌고 나의 철없는 승부욕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 후로 말없이 선배와 나는 수제비를 먹었다. 선배의 마음처럼 따뜻했던 감자 수제비- 나의 철없는 승부욕을 반성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