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언제나 특별했어

함박 스테이크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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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느 집에서나 특별한 날에 먹는 외식 메뉴가 있지 않을까? 우리 집의 경우는 함박스테이크였다. 우리가 자주 갔던 곳은 시내에 위치한 웨딩 홀만큼 널찍하고 실내장식이 화려했던 경양식을 파는 레스토랑이었다. 언제나 단정히 나비넥타이를 매고 검정 슈트를 입은 나이가 제법 지긋한 지배인 아저씨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문을 활짝 열어 주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엄마는 가족들의 생일날 이라던가, 시험성적이 부쩍 오른 날 이라던가, 새 학년의 반장으로 뽑힌 날 이라던가… 우리를 위해 축하해야 할 날이면 퇴근길의 아빠를 졸라 외식을 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 어울리는 단정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아빠의 도착을 알리는 인터폰이 울리면 재빨리 아파트 입구로 내려가 다 함께 차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갔다.


나는 단골 메뉴인 함박스테이크보다 레스토랑에 가는 게 더 좋았다. 지배인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는 것도 남달랐고 실내에 들어서면 한편에 놓인 동그란 간이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와 딸그락딸그락 속삭이듯 귓가에 맴도는 접시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마냥 가슴이 들떴다. 마치 내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근사한 파티에 초대된 듯한 황홀한 기분이 들었고, 집에서 본 적 없는 고급스러운 접시와 그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반짝이는 은빛의 스푼과 포크, 나이프는 오늘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 차려놓은 듯했다. 나는 제일 먼저 식탁 위에 차려지는 볼록한 접시에 담긴 토마토 향이 진한 야채 수프가 너무 좋았다. - 나는 심지어 시큼하고 달큼한 이 야채 수프가 너무 먹고 싶어서 시험공부에 열을 올렸던 적도 있었으니까 - 함박스테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도톰한 고기 위에 올려진 노란 계란 프라이를 얌전히 터뜨린 후 최대한 고기를 조그맣게 썰고, 바닥에 흥건하게 뿌려진 향긋한 데미그라스 소스를 듬뿍 찍어, 고기 맛보다 소스 맛으로 먹었다. 그리고 함박스테이크의 절반은, 나에게 기꺼이 자신의 야채 수프를 양보한 동생에게 엄마 몰래 덜어주고, 접시에 납작하게 눌러 담은 하얀 밥을 남은 소스에 쓱쓱 비벼 먹었다. 빵과 밥,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이 소스에 어울리는 건, - 이렇게 비벼먹는 환상적인 맛을 즐기기 위해서는 - 무조건 밥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후식으로 나온 허리가 잘록한 투명 유리잔에 담긴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나는 깜찍한 티스푼으로 영화‘로마의 휴일’의 여 주인공인 양 우아하게 떠먹었다. 갈 때마다 나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던 함박스테이크 - 이렇게 생각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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