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개장 사발면
헐렁한 힙합 바지를 입고 듀스의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던 스물네 살의 나게 맡겨진 첫 번째 광고주는 다름 아닌, 아이가 한둘은 있고 드라마 속 현모양처를 꿈꾸는 주부들을 위해 갖가지 식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두뇌에 좋다는 참치 통조림을 시작으로 핫도그의 영원한 단짝인 케첩, 야채들을 맛있게 둔갑시킨다는 마요네즈, 사계절 간식의 대명사 냉동 만두, 그리고 어머니들 손맛의 최고봉인 김치까지… 내가 날마다 광고 아이디어를 위해 고민해야 할 품목들은 한상 가득했다.
어느새 책상 위에는 내 나이에 어울리는 영화나 패션잡지 대신‘주부 생활’ 같은 여성 잡지가 쌓였고, 웬만한 요리책은 종류별로 다양하게 이미 소설책을 밀어내고 책꽂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부의 마음을 뼈 속 깊이 알 수 없었던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건 김장철마다 기사형식으로 전국 팔도의 김치 맛을 소개하는 특집 코너였다. 혼자 지방으로 내려가 하루 종일 어머님들을 따라다니며 배추를 고르고 소금에 절이고 양념 소를 만들어 김치를 버무리는 과정을 메모하고 녹음하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면, 어느새 허리는 욱신거렸고 온몸에는 젓갈이나 김치 냄새가 배였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일을 하려고 내가 광고회사에 힘들게 들어왔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어쩔 수 없이 이 김치 투어에 익숙해졌고, 취재 후에 챙겨주시는 맛깔나는 장인의 김치를 팀원들에게 나눠주며 직접 보고 들은 김치 담는 요령을 떠벌리기도 했다.
종류별로 다양한 식품 광고 덕분에 우리 팀의 사물함에는 언제나 먹을 게 넘쳤다. 일 때문에 회사에 나온 휴일의 오후에는 누군가 반드시 우리 팀 주위를 서성였다. 그러다가 내가 사발 면을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사물함 속 매운 참치 한 캔을 따면,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사발 면을 들고 우리 팀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이쯤 되면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인 불쌍한 동지들을 위해, 냉장고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다음 달에 출시될 볶음 김치 몇 봉지를 과감히 뜯고, 촬영 소품이었던 냉동 고기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시작했다. 내 자리를 기점으로 은근슬쩍 퍼진 마성의 사발 면과 시큼한 볶음 김치 그리고 고소한 고기만두의 냄새는 순식간에 사무실을 장악했다.
몇 분 후, 쌓이기만 하는 스트레스로 휴일의 점심을 잊은 그도, 밥과 국이 있는 한 끼를 고집했던 그녀도, 동네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던 그분도… 딱딱한 결재 서류철 위에 얌전히 사발 면을 올려 넣고 쭈뼛쭈뼛 우리 팀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모두의 소박한 브런치 타임이 시작되었다. 누군가는 꼬들꼬들 한 면 위에 참치 덩어리와 복음 김치를 올려 후루룩 한입에 먹었다. 또 누군가는 만두를 반으로 쪼개 소를 풀어 헤치고 고기와 야채가 라면 국물 속에 적당히 스며들면 면을 국물과 함께 먹었다.
나의 통 큰 인심 덕에 더욱 푸짐해진 모두의 소박한 브런치, 사발 면 – 지금은 도통 나지 않은 그 맛을 그리워하며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