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큰 딸,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을까?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첫 수업이 끝나고 꺼내 본 핸드폰에 반가운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벤트에 당첨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메시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답신을 쓴다. “ 그럼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저녁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요.” 이렇게 만날 반가운 사람이 생긴 것만으로 오늘이 소중한 선물 같아진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대모님과 만나기로 한 신오쿠로 역으로 향했다. 한류의 붐을 타고 요즘 가장 핫한 곳이 된 이곳은 초저녁부터 인파로 북적인다. 나는 역 앞에서 대모님과 조우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짱을 끼고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대모님은 나의 하루를 묻고 그녀의 하루를 답한다. 나는 이전에도 가끔씩 이렇게 대모님과 평일 데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오전 수업이 없는 날, 학교 근처에 있는 일본 성당에서 오전 11시 미사를 함께 본다. 감촉이 부드러운 담요를 덮은 것 같이 포근한 일본 신부님의 목소리는 그저 귀 기울여 듣는 것 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롯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한 겨울에 온기 같은 큰 축복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미사 후에는 그녀와 함께 간단히 점심을 먹고 ' 늘 기도하고 응원한다'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남은 하루를 씩씩하게 보내곤 했다. 그런 날이면 그림이 술술 그려졌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내가 있는 것처럼…
대모님과 나는 한국 음식점이 줄줄이 들어선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대모님은 성당에서 소개를 받았다는 한국 음식점에 앞에 멈춰 서서 간판의 이름을 중요한 암호를 외듯 내뱉는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음식 냄새가 맛있게 섞이며 코를 자극하고 허기를 부른다. 대모님은 이 집의 간판 메뉴라고 소개받은 세트 메뉴를 시키고 내가 따라놓은 물을 한 모금 삼킨 후 나와 정답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 실은 우리 아저씨가 이제 연세가 많아서 회사를 접기로 했거든. 그래서 내가 한국음식점을 해보려고. 요즘 한국 음식이 엄청 인기라잖아… 내가 요리는 잘 못해도 맛은 기가 막히게 보니까, 솜씨 좋은 주방 아주머니만 찾으면 될 것 같아서… 일단 시장 조사 차원에서 여기저기 가서 좀 먹어보려고. 우리 큰 딸하고 이렇게 오손도손 얼굴도 보면서…” 역시 언제나 말끝에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법을 거는 우리 대모님이다. 대모님은 이미 이곳에 적당한 가게를 물색해 놓았고, 장사 경험이 있는 지인들의 의견도 충분히 들었다고 했다. 성당에는 이곳은 물론이고 롯폰기, 아사쿠사 등등 번화가에 있는 한국식당의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 어머님들이 많았다. 그분들 중에 평소에 친분이 있는 분에게 주방에서 일할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말해 놓았다고 했다. 나는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것 같은 대모님이 쉽지 않은 음식장사를 할 결심을 한 것이 의외였지만,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초심자의 설렘 같은 것이 그녀의 표정과 말에서 느껴졌기에, 나는 무조건 응원한다고 그녀의 결심에 자신감을 더했다. 나는 밥을 먹는 내내 광고회사의 경험을 살려 메뉴판이며 간판 등등 디자인에 관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내며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곧 겨울 방학이 시작되니 대모님의 가게 오픈 준비를 돕겠다고 자청했다. 식사를 마치고 대모님은 곧 그녀의 가게가 될 가게로 가 그곳의 점장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고, 나를 위한 생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시켰다. 그리고 생맥주를 따르고 있는 점장을 곁눈질하며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 저 사람이 이곳에서 줄 곧 일했던 점장인데 당분간 함께 일하기로 했어. 괜찮은지 한번 잘 봐죠. ”동글동글한 얼굴에 제법 덩치가 있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점장은 능숙하게 손님들을 응대하고 음식을 날랐다. 이 바닥에서 제법 잔뼈가 굵은 티를 내는 그의 말투와 본새를 보며 걱정이 살짝 앞섰지만, 환하게 웃을 때 보이는 아이 같은 선한 얼굴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가볍게 몇 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은 것 같다는 신호를 보냈고, 대모님은 마치 숙제 검사에서 합격점을 받은 듯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상상도 못 했다. 그와 그가 소개한 대단한 인물들로 인해 앞으로 격게 될 초보 사장님의 파란 만장한 사건들을 말이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