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는 종강 파티를 위해 학교 근처 피자가게에 모였고, 원하는 만큼 피자를 먹고 소다를 마셨다. 누군가가 피잣값을 걷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한 명도 빠짐없이 제 몫의 값을 치렀다. 아직도 고등학생의 티가 역력하게 남은 그들 속에 나는 따라 나온 교생선생님처럼 어색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오늘 발표된 과제이야기를 하고, 새로 개봉하는 애니메이션과 전시 정보를 공유한다. 나이는 숫자에게 불과하고 겉도는 외모는 개성일 뿐이다. 어느 순간, 한 공간에서 다 같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만으로 이런 것들은 잊히고 별로 중요한 사실도 아닌 것이 된다. 삼삼오오 덴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나를 힐끔 보며 코리아타운에서 파는 호떡을 한 번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유독 한국에서 온 별미 겨울 간식으로 호떡이 자주 TV 예능 프로에 소개가 되었다. 나는 통 크게 언니가 한 번 쏠 테니 다음에 다 같이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다들 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이런 순수함이 또 얼마만인지 나는 반달눈을 하고 그들을 향해 활짝 미소를 짓는다. 그러면서 또 반짝 떠오르는 아이디어 - ‘ 대모님 가게에 디저트로 미니 호떡 같은 걸 만들어 팔면 좋겠다 는 생각…’ 직업병이다. 그래도 눈을 반짝이며 기뻐할 그녀를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났다.
대모님이 가게는 크리스마스 전 오픈을 목표로 준비 중이다. 꼼꼼한 아버님의 지휘아래 간판부터 메뉴 선별, 가격등이며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실내 인테리어는 고대로 권리금을 내고 쓰기로 하고, 들어오는 맥주며 야채나 식재료는 점장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장 고심을 해야 했던 것은 주방을 책임질 이모님이었는데, 이미 한류가 정점에 올라 일 손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손도 빠르고 음식 솜씨도 좋고 이왕이면 심성도 좋은 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당의 어머님들이 발 벗고 나섰지만, 누군가 지금 있는 곳을 그만두고 나오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다. 주방이 멈추면 가게를 멈춰야 하는 것이 식당이니, 상도덕상 잘 있는 사람을 부추겨 그만두고 나오게 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대모님이 어떻게든 자신이 요리를 배워 주방일을 담당해보려고 했지만, 점장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해서는 가게문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문제가 생기고, 어떤 이유든 한번 실망한 고객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했다.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12월은 모임이 많은 날이고 혼자 먹기에 부담스러운 한국 음식은 삼삼오오 함께 오거나, 단체 모임이 많았다. 이것저것 푸짐하게 다 시켜놓고 조금씩 맛보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장사 경험도 없는 어머님이 그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해내기에는 만무했다.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 필요했다. 점장은 자신의 아는 이모님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다. 최근에 주인과 트러블이 있어 잠시 쉬고 있는 분이 있는데, 이미 오라는 곳이 여러 곳이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자신의 직접 찾아가서 사정을 해보겠다며, 부디 연결이 잘 되면 그녀가 원하는 조건을 잘 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대모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꼭 그분을 모셔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점심때를 막 넘기고 대모님과 차를 마시는데, 점장과 이모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갸름한 얼굴에 금테 안경을 쓴 제법 인상이 날카로운 이모님은, 우렁차고 걸걸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대장부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자신만 믿으면 이제 이 가게는 문제없다고 단박에 부산 토박이임을 알게 하는 사투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자신은 부산의 큰 음식점에서 오래 일을 했고, 식당을 운영했고, 도쿄에 온 지도 3년이 넘어서 일본 사람들 입맛도 잘 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주방으로 들어가서는, 순부두 찌개와 김치 부침개, 팔뚝 만한 계란말이와 매콤한 닭강정을 만들어서 차례차례 내왔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음식들은 조미료 맛이 강했으나 모두 맛있었다. 이만하면 일본인들이 좋아하고도 남을 맛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모님을 보았고, 대모님도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모님은 주방을 나와 옆 테이블에 덥석 앉으며 말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 가 오픈을 하자고 했다. 사람들 반응도 보고, 일하는 시스템도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간판과 메뉴판이 이번주에 완성이 되니 문제없을 것이라고 점장이 거들자, 이모님은 자신의 아는 식재로 가게의 전화번호를 건네며 이곳에 전화해서 필요한 재료를 주문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순간, 카운터에서 계신기 기를 점검하던 아버님이 눈이 반짝였다. 사업가다운 촉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면접하러 온날부터 아는 거래처를 내미는 것이 좀 수상해 보였을 터였다. 그러나 순진하고 사람 잘 믿는 대모님은 어련히 좋은 곳을 소개했겠냐며, 당장 필요한 식재료들을 메모하주면 자신이 다음 날 주문을 넣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아버님을 불러 이모님의 급여에 관해 세분이 제법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이모님은 그녀의 뒤를 눈으로 좇는 나를 향해 어쩐지 싸늘한 미소를 짓고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아버님은 솜씨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좀 성급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하며, 3개월만 일단 해보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자 점장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러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진다고 했다. 어머니는 일단 이모님의 조건을 모두 맞춰주기로 했으니, 일을 하면서 조율하면 어떻겠냐고 했고, 약간은 불편한 기류가 세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러다 장사만 잘되면 문제가 없는 것 아니겠냐는 어머님의 말과 적당히 타이밍에 대화에 끼어든 나의 부추김으로 오늘이 협상은 종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구직 광고를 보고 찾아온 아랍계 외국인인 H가 주방보조로 점장과 이모님의 면접을 통과했다. 드디어 가 오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