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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쇼핑을공장에서 Jun 05. 2019

ABOUT : 잘 알지만 잘 모르는 고흐

SHOGONG MAGAZINE

선명한 색채를 좋아했던 그의 과거는 복잡했다



빈센트 반 고흐, 1853 - 1890, 네덜란드 출신, 후기 인상주의 작가, 생전에 그가 팔았던 작품은 한 점에 불과했으나 사후에 그는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하며, 미술 전공과 비전공을 떠나 고흐라는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20세기 미술학계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어둡고 추웠던 불운한 시기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베투스 사이에서 여섯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사실 고흐는 형이 있었다.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에 사산이 되었다. 형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빈센트라고 지었다. 그러나 사산의 아픔이 가시지 않았고 죄책감이 있었던 어머니 안나는 고흐에게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면서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는 게 흔한 풍습이었다. 남동생 테오 역시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지었고, 여동생 안나는 어머니 이름을 따라 지었다.


고흐는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지어 주면서 자신이 항상 형을 대신해서 살고 있다는 압박이 있었고, 이러한 환경은 그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항상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며 살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성격은 가족의 관심까지도 동생들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항상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과 애정결핍을 느끼며 자랐다.


고흐는 스스로의 유년시절을 "어둡고 추웠던 불운한 시기"라고 말했다.



유년시절의 빈센트 반 고흐




정신적 불안감

고흐 집안에는 정신적 불안감, 즉 정신병을 앓던 사람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초래한 문제도 있겠지만 유독 정신 질환이 많은 집안이었다. 고흐의 어머니인 안나는 만성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여동생인 빌은 조현병이라는 정신적인 문제로 죽기 전 마지막 생을 요양원에서 보내고, 다른 동생 코르는 고흐가 죽은 지 10년 후 자살을 한다. 고흐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경제적, 정신적 지원자였던 동생 테오는 고흐가 죽은 뒤 6개월도 안돼서 죽게 되는데, 고흐가 죽은 뒤 갑작스러운 정신적 불안감이 그의 아내 요한나와 아들 빈센트에게 학대라는 방법으로 잘못 표출이 되었고, 그로 인해 병원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어머니 안나의 만성 우울증으로 인해 분명 자식들이 정신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유전에 의한 집안 내력일 수도 있겠지만 집안의 분위기와 환경에 의해 분명 자식 모두에게 정신적인 피해가 지속되어 모든 자식들이 우울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흐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인 교인의 집안이었지만 신앙의 힘도 정신적인 질환을 이기지는 못했다.




왼쪽이 고흐 동생 테오의 자화상, 오른쪽이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고흐의 영원한 친구

사랑하는 테오

이제 우리가 같은 직업을 갖고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어 기쁘구나

우리 자주 편지를 나누자꾸나

우리 서로 사랑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삶의 경험이 우리를 더욱 단단히 이어주도록 노력하자

서로에게 강직하고 솔직한 사이로 남자꾸나

만물이 오늘을 견뎌내듯 비밀 없이 지내자

1872년 12월 13일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고흐가 테오와 떨어져 지냈을 당시 서로 주고받은 편지만 무려 700통이며,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의 내용을 보면 고흐와 테오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좀 더 자세히 엿볼 수 있다.

 

고흐는 테오 말고 다른 동생들과도 친하게 지냈지만 11살 때 기숙학교로 보내지면서 내성적인 성향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고, 그때부터 다른 동생들과의 사상 차이로 인한 거리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심하게는 가족인 고흐를 싫어하는 여동생도 있었다. 고흐의 예술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예민해지면서 다른 동생들은 고흐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멀리했다.

하지만 테오와는 끝까지 각별한 사이로 지내는데 그 이유는 미술과 관련된 일을 같이 하고 있었고 예술에 대한 열정과 사상이 닮았기 때문이다.


고흐는 생전에 그림을 그려서 돈을 번 적이 없다. 유화 한 작품과 작은 그림 몇 개를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는 하지만 생계를 꾸릴 만큼의 금액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흐는 본격적으로 화가라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 이후 평생을 동생 테오에게 의존하며 살았다. 그림을 그리는 비용뿐 아니라 의, 식, 주 등 생계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부분을 테오에게 상당히 의존했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



고흐가 테오에게 물질적인 의존을 한 만큼 테오 역시 형 고흐를 굉장히 존중하며 따랐다. 그의 예술적 고집과 신념을 존중했으며, 고흐가 작업에 충분히 몰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해준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90]라는 작품은 테오의 아들 빈센트의 탄생을 축복해주기 위해 고흐가 그린 선물이다. 테오는 아들 빈센트가 형 고흐처럼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 이름을 따라 지었고, 편지까지 남겼다.

훗날 실제로 이 작품은 테오의 아들 빈센트의 침대 위에 걸려있었다.



고흐가 사랑했던 여자, 시엔



부족함은 또 다른 불안감을 만든다

정서적 불안감, 애정결핍 등 고흐의 정신상태는 고흐가 만났던 여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당시 가족과 떨어져 지냈고, 가족으로부터 외로움을 느꼈던 고흐는 심각한 애정결핍으로 인해 어머니를 닮은 이성에게 집착을 하기 시작한다. 보통 나이가 많거나 과부, 매춘부 출신들로 어머니와 비슷하거나 자신의 상황처럼 복잡한 여성들을 만났다.


고흐의 첫사랑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촌 케이의 스토리 역시 자주 등장한다. 케이는 당시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자식을 키우고 있는 과부였다. 개신교 목사 집안의 집안에서 사촌인 케이와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케이를 향안 고흐의 짝사랑은 점점 집착으로 변질되었고, 관심도 없던 케이의 반대에 상처받은 고흐는 스스로 손을 초에 지지려고 하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을 연출하였다지만, 오히려 고흐의 부모와 케이의 부모 모두에게 비난을 받으며 이루어질 수 없던 사랑은 끝이 난다.


상처 받은 고흐는 그림에만 집중하겠다며 길거리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고, 부랑자처럼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사창가에서 병들고 임신까지 한 나약한 매춘부 시엔을 만나게 되면서 다시 말도 안 되는 사랑에 빠지게 된다.


고흐는 시엔을 거두어 집에서 동거를 하게되고 1년 넘는 연애를 하다가 결혼까지 생각을 했지만 역시나 부모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고흐와 시엔의 만남을 반대하는 이들은 고흐의 부모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던 테오 마저도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를 했고, 고흐와 평소 친분을 쌓았던 몇 안 되는 지인들도 시엔과의 동거를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시엔과의 사랑은 1년 넘게 시간을 끌었지만 양가 부모의 반대와 시엔이 결국 다시 매춘부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예정되었던 사랑은 끝이 난다.


이후에도 죽기 전까지 고흐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사랑만을 찾게 되는데, 첫사랑부터 자신과 동거한 여인들, 몇 차례 본 적 없는 매춘부에게 자신의 자른 귀를 전달해주는 등  어머니와 비슷한, 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대로부터 결핍을 채우려고 했던 불안한 정신상태를 볼 수 있다.



귀를 자른 자화상, 1889




자학의 이유

고흐는 정신적 불안감이 극에 달했을 때마다 자학적인 행동을 보였다. 크게 세 번의 자학적인 행동이 기억이 되는데, 사촌지간인 케이와 부모 앞에서 자신의 손을 촛불에 지지려고 한 일, 고갱과 다툼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일, 그리고 자살로 알려진 밀밭에서의 총을 쏜 일이 있다.


세 번의 일들을 살펴보면 단순하게 불안했던 감정을 표출했다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핍은 곧 정신적 불안감을 낳고 부족했던 결핍은 다른 곳을 통해 안정감을 취하기 마련이고 고흐는 결핍과 불안감을 분노 표출로 나타내었고 그때마다 상대의 관심이 곧 고흐에게 안정감을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 했을 때,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뒤, 상대방의 관심을 얻는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이다. 만약 정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표출을 했다면 자신의 손을 불에 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귀를 자르지 않았을 것이고, 권총의 총구는 복부가 아닌 다른 곳을 향했을 것이다.


자학적인 행동을 통해 관심을 받고 관심을 받게 되고, 관심은 분노를 잠재워주고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삼나무가 있는 밀밭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이 고흐에게는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각 작품에서는 당시의 기쁨과 슬픔, 분노 등 모든 감정을 그림에 볼 수 있고, 고흐의 그림만 봐도 한 사람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표현되었다.


정작 본인은 평생을 결핍을 채우기 위해 쫓아다녔고, 가족은 물론 본인 스스로에게도 최악의 선택을 할 만큼 힘들고 괴로운 정신적 싸움을 하다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마지막까지 고뇌했던 모든 감정을 작품에 표현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인정을 받는 것 같다.

 

진정한 화가로써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본인을 스스로 연구하고, 그 과정을 작품으로 표현할 줄 아는 고흐야말로 진정한 화가가 아닌가 싶다.




Writer : 박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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