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굴뚝귀신>
이 앞에 좌절하는 날이 많은 요즘 나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지만 우리의 결혼과 양육의 시간도 뭉뚱그려보면 희극이고 잘게 쪼개어 부분을 보니 비극이었다.
후회를 잘하지 않는 나는 아이의 탄생과 함께 따라왔던 '선택'의 시간들을 지금에서 후회하고 있다. 그때 그러지 말걸, 그때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후회를 하면 우울해진다. 우울함을 선택하지 않으려 지나간 일을 되새김질하지 않는 편인데 지금의 상황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날의 선택에 있다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은 어떤 불문율처럼 견고한 나의 의지였다. 출산을 하고 아이와 함께 있을 때도 생경한 시간 앞에 우왕좌왕했었다. 빨리 아이를 시댁에 보내고 일을 해야지. 이 생각만으로 아이의 첫돌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사실 그전에 아이는 지방에 있는 시댁에 이미 보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아이는 시댁에 가 있었다. 처음이라서 모든 게 처음이라서... 미숙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물론 어머니 아버님은 까탈스러운 아이를 정성과 사랑으로 소중하게 키워주셨다. 아이를 떨어뜨리고 온 그날 방탈출에 성공한 대학생처럼 흥분했었다. 그러나 설렘과 노란색 흥분은 잠시고 주말마다 지방에 내려가는 번거로움과 매번 아이와 떨어질 때 느껴야만 했던 죄책감과 슬픔으로 며칠은 아파하다 또 그렇게 주말을 맞이했다. 솔직히 말하면 떨어져 있던 1년 동안 아이와 이별하는 장면이 인증숏처럼 머리에 새겨져 있다. 그 일 년 동안 나 자신은 얼마나 커리어를 쌓고 성장했는지... 또 무얼 했는지 사실은 남은 게 없는 듯했다. 나처럼. 아이도 어린 시절의 잦은 이별의 경험으로 엄마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동안 헤어져 있으면 회복의 시간이 3 배수가 걸린다고 하던데 진짜로 그랬다. 나는 엄마인데... 아이와 교감하는데 참으로 많은 노력이 들었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모든 과정이 어렵고 지난했다.
<굴뚝 귀신>은 아끼는 그림책이다. 일종의 '발견'을 하고 작가의 다음 책을 기다렸는데 지난해 <여름,>이라는 새 그림책으로 다시 만났다. 목판화가 주는 묵직함이 메시지와 잘 어우러진 탁월한 선택 같다. 키티 크라우더 <메두사 엄마>가 생각났지만 '엄마 사람'에게 죄책감은 덜한 책이다.
유서 깊은 대저택의 굴뚝에 살고 있는 굴뚝 귀신은 세월이 흘러 쓸모를 잃은 굴뚝처럼 동굴 안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가 위에서 떨어진 '알'에서 태어난 아기 비둘기를 키우며 바쁜 시간을 보낸다. 비비(아기 비둘기)는 성장하고 굴뚝 귀신이 그린 그림을 보며 세상 밖의 일에 호기심을 키워간. 굴뚝 귀신은 비비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지금의 나처럼 책으로 가르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 엄마
엄마는 왜 날지 않아요?
왜 나만 날아서 굴뚝 밖으로 나가야 해요?
나는 것도
밖에 나가는 것도 싫어요.
엄마도 무서워서 여기 숨는 거면서. "
굴뚝 귀신의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고는 벽에 있는 모든 그림을 지운다
" 나도 이제
처음부터
다시 그려볼까 해 "
키티 크라우더 그림책 <메두사 엄마>보다 성숙한 어른의 면모가 여기서 느껴진다.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잘못된 방향임을 인지했을 때, 바로 나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회복탄력성'이라고 했다. 건강한 어른이라면 이 '회복탄력성'이 있어야 한다. 굴뚝 귀신은 비비의 비난이 아팠지만 바로 생각을 전환하여 갇히네기만 한 지난 삶에 변화를 시도한다.
나는 요즘 자주 불안하다. 나의 큰 특징이 불안이 신체화되어 나타난다. 자주 호흡이 가쁘고 깊은 한숨을 쉬지 않으며 가슴이 조각날 것 같다. 아이에게 쏟는 비난은 앞으로 아이의 그렇게 부정적으로 성장하게 될까 봐. 그런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한 루저가 '내'가 될까 봐 불안한 걸까. 요즘 나의 불안을 직면하는 중이다
새로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이성적이고 지혜로운 사춘기 엄마의 자세로 다시 세팅하고 그동안 나에게 집중했던 마음을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바꿀 때가 지금이 아닐까 한다. 작품에서는 비비가 세상을 향해 힘찬 날갯짓을 할 때 비로소 굴뚝 귀신이 굴뚝 밖으로 나와 비비를 응원하는 장면으로 끝나지만 굴뚝 귀신의 발 한쪽은 굴뚝에 넣은 채 나오지 않는다.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굴뚝 귀신의 이런 면도 너무 좋다. 굴뚝 귀신은 밖에 나오면 사라지는 존재다. 자신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하고 시선을 확장한 것이다. 결코 굴뚝 귀신은 비비를 위해 소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있어야 아이들도 세상도 있는 법이다.
나의 자리는 굴뚝임을 알고 새끼 비비가 세상을 향해 잘 가고 있나 세상 구경하러 가끔 위로 나오겠지. 나는 10층 귀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