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안갑의 살인> ●●●◐
지난번 <시인장의 살인> 리뷰에서 수준급의 추리와 어울리지 않는 저속한 대사를 호되게 비판했었다. 불쾌한 나머지 다음 편을 보지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초현실과 논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설정과 난해한 문제, 참신한 트릭을 생각하니 도저히 두 번째 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택은 옳았다. 몹시 다행스럽게도 <마안갑의 살인>에서는 전편에서 날 뒷목 잡게 만들었던 저급함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탐정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는 주인공 청년은 변함없이 그녀를 지켜주고 싶어 안달하지만, 그의 속내를 표현한 문장이 전작보다 훨씬 점잖았다. 이제야 성인물 말고 보통의 소설에 나오는 평범한 남녀 같아 보였다.
피드백을 신속하게 수용한 모습을 보고 작가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데뷔작부터 대박을 쳤으니 어지간해서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겸손한 행보를 보인 것이 의외였다.
두 번째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대뜸 주인공이 탐정에게 모닝콜을 해주길래 둘이 정식 연인 사이라도 된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가끔 달달한 대화를 주고받고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며 대놓고 붙어 다니긴 해도 공식적으로 교제하지는 않는 상태. 누가‘썸’의 사전적 정의를 시연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듯한 행태였다.
둘의 애매한 관계를 독자들도 이상하게 여기리라 예상했는지, 작가는 애꿎은 주변 인물에게 둘이 왜 정식으로 만나지 않는지 물어보라고 시켰다. 그랬더니 청년이 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이 편이 피차 서로에게 좋아.
이건 또 뭔 좀비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마음에 둔 여자가 있고 그녀 역시 내게 호감이 있는 게 눈에 보이며 둘을 가로막는 요인조차 없는데 저런 생각을 할 남자는 현실에 없다. 난 분명 국어시간에 소설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는데 저 대사엔 개연성이 전혀 없다. 작가가 모종의 이유로 둘을 이어주는 일을 미루고 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무슨 꿍꿍이인 줄 모르겠으나 아무튼 둘은 아직 선후배 사이일 뿐이라는 어색한 사실을 머리에 넣은 채로 소설을 읽어 나갔다.
제목에 쓰인 마안魔眼은 마술적인, 요사스러운 눈을 의미하며 갑匣은 상자를 일컫는 글자로, 마안갑은 1편 시인장을 이어 비현실적인 무엇이 존재하는 집(건물)을 뜻한다. (일본에는 유독 건물과 관련한 미스터리 소설이 성행해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館 시리즈, 그것을 오마주한 아오사키 유고의 관 시리즈 등 유명한 연작이 많다.)
외부와 차단된 환경이라는 설정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작위적이고 올드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게 단점이지만, 한 편의 연극처럼 솜씨 좋게 연출된 느낌을 풍기는 것이 클로즈드 서클의 매력이다. 철저하게 통제된 무대와 등장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꼭두각시 인형 다루듯 하는 전지전능한 작가.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하여 잘 정제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준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등장인물의 숫자가 확 줄어든 것이다. <시인장의 살인>에는 열 명이 넘는 인물이 나오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일본어 이름에 익숙지 않은 입장에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번번이 등장인물 소개란을 되짚어가며 확인하기 귀찮았었는데, 마안갑에 모인 사람들은 훨씬 적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추리는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지 않은 대신 임팩트가 있으며, 문제풀이의 열쇠가 되는 핵심 가설과 트릭이 한 개씩 존재한다.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독자라면 범인을 맞힐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작과 비교해서 단순할 뿐 이마무라 마사히로는 절대 쉬운 문제를 내는 작가가 아니니 방심은 금물이다. 특히 매우 전통적인 증거물을 이용해서 새로운 단서를 창조해 낸 대목은 감탄을 자아냈다.
전편에서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주역이 좀비였다면 이번엔 ‘예언’이다. 소설 속 초능력자들은 과연 진짜일까, 사기꾼일까? 그들의 예언은 적중할 것인가? 그것이 살인 예언이라면? 독자들은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될 때마다 예언의 실현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예고의 역할은 오컬트적 분위기나 스릴감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세계관에서 초현실적 존재는 인간들의 본성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인간이 예언에 대해 본능적으로 가지는 경외심을 과감하게 파고든다.
우리가 예언자를 찾아다니는 주된 이유는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어떤 대비책도 소용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의 비극을 막기 위한 모든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고, 예언자의 입에서 나온 재앙의 언어가 악마 같은 비웃음을 흘리며 우리의 허를 찌르고 지나간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선지자를 우러러볼 것인가, 아니면 파멸시키려 할 것인가.
마안갑의 죽음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그것이 이 작품이 소포모어 징크스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충격적이었던 데뷔작과 비교해서도 시시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