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얘기 2
우리 가족은 15년 동안 D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고작 5층짜리였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빌라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80년대에는 꽤 좋은 아파트라는 소릴 들었고 단지 규모도 큰 편이었다.
동은 총 다섯 개로 가나다라마 동으로 불렸다. 내가 살았던 라 동과 옆의 다 동 사이에는 경사가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좁은 평지 너머로 작은 하천이 흘렀다. 하천은 심하게 오염되어 근처에만 가도 고약한 냄새가 났다. 우리는 그곳을 똥물이라고 부르며 터부시 했는데, 더럽기도 했으나 굉장히 위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땅과 물의 경계가 수십 미터나 되는 낭떠러지였던 까닭이다. 쇠울타리가 세워져 있긴 했으나 낡고 높이마저 낮아 그다지 미더워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없었다면 나는 이 글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화창했던 어느 날, 나는 혼자 세발자전거를 타러 밖에 나왔다. 끽해야 유치원생이나 1학년이었지만 그땐 걸어서 20분 걸리는 학교도 혼자 다녔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운동신경 없고 겁은 많았던 나는 라 동 앞 평지에서만 뽈뽈거리며 놀곤 했는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용감하게 내리막길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곳엔 아무도 없이 눈부신 햇빛만 내리쬐고 있었다.
비합리적인 충동이란 어린아이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감정인지,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났는지도 모르게 나는 자전거를 탄 채로 냅다 아래로 내달렸다. 예상을 넘어서는 빠른 속도와 거센 충격에 당황한 나머지, 그나마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양발조차 땅에서 떼 버리고 다리를 날개처럼 활짝 펼쳤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어진 바퀴 세 개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리막을 미끄러졌고, 이윽고 똥물을 가로막은 울타리 바로 앞에서 탑승자를 내동댕이치고는 몸체와 함께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인적 드문 길에 가차 없이 내팽개쳐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 높여 엉엉 울어대는 것밖에는 없었다. 통증도 심했겠지만 놀람이 더 컸을 것이다. 꽤 오랜 시간 움직이지도 못하고 엎어진 채로 울부짖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홀연히, 정말 난데없이 누군가가 나타났다. 양산을 쓰고 우아한 인상을 한 아주머니였다. 우리 동네 분은 아니신 듯했다. 아주머니는 나를 발견하고는 침착하게 다가와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물었다. 다행히 나는 엄마 아빠의 철저한 교육으로 두 가지를 다 외우고 있었다.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양산을 쓴 채로 나를 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나는 아빠의 등에 업혀 우리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아빠는 내 울먹거림을 듣고는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는데, 아빠의 그 웃음을 듣고서야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이 녀석 귀엽네,라는 듯 웃는 아빠의 태도는 내 부상이 크게 걱정할 정도가 아니며, 이제는 괜찮을 거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 같아서였다.
중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완전히 삭제되어 버렸지만 분명히 아빠는 나를 구조하자마자 병원에 데리고 갔을 테다. 병원에서 처치가 잘 이루어진 후였기에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날 내 오른팔이 부러졌다. 아빠 등에 업혔을 때는 팔에 이미 초록색 ‘기부스’를 감은 상태였음이 틀림없다.
하필 다쳐도 오른팔을 다치는 바람에 나는 몇 달간 상당한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글씨를 잘 쓸 수 없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딱딱한 기부스 속에 갇힌 팔은 날이 갈수록 근질근질거렸다. 이마에도 찰과상을 입었으니 엄마는 여자아이 얼굴에 흉이라도 질까 봐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그 사고를 쳤음에도 혼났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크게 다친 탓에 걱정만 샀던 게 아닐까 싶다.
신기하게도 3년 후에, 나보다 3살 어린 동생이 다쳐서 왔는데 부위와 정도가 나와 똑같았다. 오른팔이 부러지고 이마에 상처가 난 것이었다. 사고가 난 원인은 달랐으나 어쩜 그리 다친 데가 비슷한지 우리끼리도 신기해할 정도였다. 모르긴 몰라도 엄마는 어디 점집에 가서 부적이라도 써 왔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 남매의 뼈는 잘 붙어서, 언제 부러졌나 싶을 만큼 건강하고 튼튼히 기능하고 있다. 문제의 세발자전거는 그 후 어찌 됐는지 알지 못한다. 잔뜩 화가 난 엄마가 내다 버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시무시했던 경사로는 남아있는지, 아닌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D아파트가 다 허물어지고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지대가 몰라보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똥물은 더 이상 똥물이 아니게 되었다. 구청의 대대적인 환경정화 사업으로 몰라보게 깨끗한 하천으로 변모했다. 강가에는 잘 닦인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생겼고 군데군데 벤치와 포토스폿까지 마련되어, 사시사철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똥물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 가족은 아직도 그 하천의 환골탈태를 신기해하며 이따금 화제로 삼는다. (그런데 그곳의 위치가 문제인지, 다른 어떤 원인 때문인지 지금도 비가 온 후에나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옛날 같은 악취를 풍기곤 한다.)
다친 경험 때문인지, 딸아이가 킥보드를 너무 빨리 타는 모습을 보면 조마조마하다. 특히 경사진 길에서는 죽을힘을 다해 달려 보조를 맞추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와 똑같이 다쳤던 동생은 삼촌이 되어 조카에게 자전거를 사주었는데, 세발자전거보다도 안정적인 네발자전거를 헬멧과 보호대와 함께 선물해 주었다. 아이는 처음에는 페달을 돌리기 어려워하더니 이제는 쌩쌩 잘만 탄다. 즐겁게 자전거를 타는 딸아이의 모습에 잔뜩 신이 난 어린 내가 겹쳐 보인다.
때때로 궁금하다. 날 발견하고 우리 집에 찾아가 주었던 아주머니는 누구셨을까. 엄마 아빠는 그분에게 어떻게 사례했을까.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아빠는 그때 일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내일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이제 칠순이 된 아빠는 그런 일이 있었냐며, 꼭 그때처럼 허허 웃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