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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Aug 27. 2024

모자 안 쓴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로마 모자 미스터리> ●●●

캐릭터의 정립 시도

<로마 모자 미스터리>는 고전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엘러리 퀸의 첫 작품이자, 그 유명한 국명 시리즈의 시작이다.

      


긴 시리즈의 첫 걸음답게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들이 도처에 엿보인다. 주인공이자 탐정인 엘러리(작가와 탐정의 이름이 같다)에 대한 묘사는 대강 이러하다.

    

하버드 출신의 지독한 책벌레에, 키가 크고 말랐으며 코안경을 걸치고 있는 20대 청년. 물려받은 재산 덕에 밥벌이에 종사할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일 - 미스터리 소설가 –을 할 수 있는 금수저이며, 이따금 소일거리로 아버지인 퀸 경감과 함께 강력 범죄 해결에 나서곤 한다.

     

사건 때문에 사고 싶은 고서를 못 샀다고 투덜거리거나, 틈만 나면 고전 경구를 읊는 등 대놓고 똑똑하고 잘난 척도 잘하는 캐릭터다. 그러나 으레 책벌레 하면 떠오르는 ‘너드’캐릭터와는 달라서, 상류층의 세련된 매너를 갖추고 있으며 친구도 많고, 주위 사람들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이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는 엘러리와 콤비를 이루는 그의 아버지 리처드 퀸이 경찰 간부이며, 그래서 경찰력과 공권력이 사건 해결에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추리소설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 등의 작품에서 경찰 권력이 방해꾼으로 여겨지거나 탐정보다 한 수 아래로 취급되며 무시받는 것과는 달리, 퀸 경감은 엘러리와 대등한 비중을 가지며 수사력을 뽐낸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는 무려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역할을 엘러리가 아닌 퀸 경감이 맡을 정도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장면을 퀸 경감에게 준 것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이 캐릭터를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추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첫 작품인 만큼 아직 엘러리 특유의 추리 기법이 현란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범인이 모자의 중요성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중요한 증거물이 숨겨진 곳이 어디인지 밝혀내는 장면에서 그의 두뇌는 빛을 발한다. 그가 해답에 도달하는 방법은 다음 대사와 같이 단순명료하기 그지없는 논리에 의한 것이다.


서류는 이곳 어디엔가 있어요. 논리가 저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10에서 2와 3과 4를 차례로 빼 나가면 1이 남지요.


모자를 안 쓴 게 왜 문제일까

고전 읽기의 장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각별히 생각하는 고전의 재미는 완전히 생소한 과거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20년대 소설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를 읽으며 현대인과 사뭇 달랐던 100년 전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을 구경하는 일은 추리 과정만큼이나 재미있다.

       

특히 모자를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지금의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퀸 경감과 엘러리는 살해당한 시체에서 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몹시 의아해하며, 추리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몸수색을 하며 여분의 모자를 들고 있는 사람(즉 죽은 사람의 모자를 챙긴 사람)을 집중적으로 조사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모자만을 쓰고 있었고, 수사는 난관에 봉착한다.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죽은 사람이 모자를 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이상한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50~60년대 이후로 서양인들의 옷차림에서 모자의 위상이 서서히 하락했기 때문이다.

    

<옷 입은 사람 이야기> (이민정, 바다출판사)에 따르면, 유럽은 아주 오래 전부터 외출 시에 반드시 모자를 착용하는 문화를 견지해왔다고 한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는 이를 반증하는 장면들이 여럿 등장한다.

     

(시체의) 주머니엔 모자 보관증도 없었지. (퀸 경감) - 소설의 배경은 영화관(극장)이다. 당시에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모자를 보관하고 보관증을 발행해주는 서비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관람객이 모자를 쓰고 오기에 가능했던 서비스였을 것이다.

    

모자가 없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찢어진 모자가 있는 게 경찰의 주의를 덜 끌었을 테니까요. (엘러리) -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반대로 찢어진 모자가 있는 것보다는 모자가 없는 상황이 훨씬 정상적이다.

     

옷장 속에는 지팡이가 하나도 없어요. 보통 피살자같이 화려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때그때 차림새에 맞춰 매치할 수 있도록 지팡이를 여러 개 구비해 놓기 마련인데 말이에요. (엘러리) - 20년대에는 지팡이가 신사의 주요 패션 아이템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사해보니 지팡이는 점차 더 실용적인 우산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누군가 피살자의 모자를 쓰고 극장을 빠져나갔단 말이지? 그러나 한 가지, 다음 질문에 대답해보렴. 그럼 그놈이 자기 모자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하는 문제다. 모자를 두 개 가지고 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 (퀸 경감) - 퀸은 범인이 자기 모자를 무조건 쓰고 왔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질문하고 있다. 즉, 모자 없이 영화(심지어 그 영화는 총 쏘고 비명 질러대는 통속극이었다) 를 보러 오는 일이 당시 사회에서는 이목을 끌 정도로 비정상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 극장 사무실에 모자걸이가 있다거나, (분명 옷걸이가 아니라 모자걸이라고 쓰여 있다) 피살자의 집 옷장에 모자만 담는 용도의 통이 몇 개나 있었다는 묘사도 당대인들의 모자 사랑을 대변한다.

     

이렇게 사람들의 외출복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모자는 대충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서서히 인기를 잃었다. 나는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해 열심히 관련 서적과 자료들을 뒤져보았지만 어디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아마도 궁금해 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간신히 찾아낸 가설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이 모자를 잘 쓰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사람들이 점차 간편한 옷차림을 추구하면서 자연히 모자를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설은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지만 신빙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남성 패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 데이비드 코긴스의 <맨 앤 스타일>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케네디는 수십 년 동안 상류사회에서 모자가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지만, 다시 유행이 바뀌면서 패션쇼 무대를 벗어난 곳에서도 모자를 쓴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146p)

     

그러나 나무위키에 따르면 케네디 역시 공식석상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다며, 그로 인해 모자 문화가 쇠퇴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케네디가 모자를 썼는지 안 썼는지는 잘 모르지만, 역시 외출할 때 뭐 하나라도 덜 걸치고 덜 챙기고 싶었던 사람들의 바람이 모자의 쇠퇴를 초래했으리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총평     

모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소설로 되돌아오자.

     

<로마 모자의 미스터리>는 긴박감이 넘치거나 자극적인 재미가 가득한 책은 아니지만, 시리즈 읽기를 포기하기는 이르다. 추리 역사에 남을 퀸의 걸작들을 읽기 전 워밍업으로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보자. 다음 편인 <프렌치 파우더 미스터리>는 좀더 흡입력이 있는 편이니 안심해도 좋다.

    

사족     

퀸 경감이 사건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부하들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쾌감이 느껴진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아는 노련한 공무원의 솜씨를 감상할 수 있어서다. 그의 손발이 되어 움직이는 형사들은 시리즈 내내 같은 팀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나중엔 이들에게도 정이 든다. 하나같이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훌륭한 경찰들이다.

    

참, <로마 모자의 미스터리>의 사건 현장에 최초로 등장해 기본적인 처치를 한 형사는 도일이라는 인물인데, 이 작품에만 등장하는 일회성 캐릭터다. 그가 한치의 빈틈도 없이 초동 조치를 해놓은 덕에 퀸 부자는 수월하게 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투철한 직업 정신에 찬사를 보내며, 부디 퀸 경감의 추천으로 성과금이라도 탔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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