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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온 Oct 23. 2024

콘서트 관람을 빙자한 나들이 이야기 – 2

보아 콘서트 후기 두 번째

윤하도 유리도 나도   

공연 시작 40분 전, 핸드볼경기장의 2층 오른쪽 가장 끄트머리에서 좌석을 확인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시야제한석이라지만 그 정도로 안 보일 줄은 몰랐다. 가수가 점처럼 보이는 일이야 흔하다 해도 전광판까지 가리는 시야는 생전 처음이었다. 듣는 것만으로 만족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그 먼길을 간 걸 후회할 뻔 했다.

     

저 돌출무대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작년처럼 이번 공연도 올 라이브 밴드로 진행되었다. 콘서트는 역시 밴드 라이브지! 보아의 장난스러운 멘트에 의하면 편곡과 연주를 도맡은 멤버들이 어찌나 힘들어했는지 전날 공연 후 누구보다 일찍 퇴근했다고 했다. 그러는 본인 역시 올 핸드마이크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라이브를 선보였다.

      

하얀 미니 원피스를 입고 화사하게 등장한 보아가 제일 먼저 부른 곡은 <No.1>이었다. 우리나라 최대 히트곡이니만큼 그동안 거의 모든 콘서트에서 엔딩이나 앵콜을 장식한 노래인데, 이번엔 고정관념을 깨고 오프닝으로 배치했단다. 나는 어차피 넘버 원의 에너제틱함은 처음과 끝에 모두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목청이 터져라 환호성을 질렀다.

     

초반 댄스곡 러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The Shadow>였다. 유독 스텝이 많은 안무로, 특히 후렴에서 선보이는 역동적인 춤동작이 너무 멋있었다. 원래 보아 노래 중에서 특별히 즐겨듣는 노래가 아니었는데, 무대를 직접 보고 나서 자주 듣게 됐다.

     

그날의 선곡 중에서 베스트를 고르라면 나를 비롯한 많은 팬들이 <Every Heart>에 투표할 것이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발매한 Every Heart는 감성적인 가사와 아련한 멜로디의 발라드로, 정말 많이 들었고 좋아하는 곡이었지만 라이브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온 지 벌써 20년이 넘은 그 노래는 갖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CD를 구워서 플레이어에 넣고 흘러나오는 첫 소절을 들었을 때,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 2000년대 초반 보아의 싱글들, 그 트랙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수많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와 모의고사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신곡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과 공유하던 기억, 노래방에서 안 되는 고음을 내보려 기를 쓰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보아는 내 학창시절 그 자체였음을, 공연장에 몰아치는 사운드 속에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곳에 나와 같은 심정임이 분명한 유명인이 있었으니, 가수 윤하다. 성공한 보아 덕후로 유명한 윤하는 간신히 취소표를 구해 콘서트를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팬들과의 소통 앱을 통해 전했다. 그리고 연신 언니를 부르짖더니, 오프닝부터 울기 시작해 돌아가는 길에서까지 눈물이 났다고 고백했다. 

     

(출처 : https://x.com/lovelygirl_BoA/status/1845418357409071570?t=cOl9G1TNekLJOQQNMTg1ug&s=19)


언니가 건재해서 너무 좋다고 난리인 저 가수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여자 솔로인지 걸스 온 탑 어부바 춤 추겠다고 친구 등에 올라타던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애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다. 본인도 대단한 아티스트면서 보아를 보고 저렇게나 좋아하다니, 내적 친밀감이 느껴진다.

     

같은 시간 맨 뒤에서 신나게 응원봉을 흔들던 또다른 연예인은 소녀시대의 유리였다. 유리는 인스타를 통해 팬심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윤하도 유리도 나도, 보아 앞에서는 다 같은 언니부대였다.

     

다시 외국인 팬과

작년에 쓴 엔시티 콘서트 후기에서 옆에 미국 팬이 앉는 바람에 신기했다고 쓴 적이 있다. 이번에도 내 옆자리는 타국에서 온 팬 차지였다.

    

그녀는 미국 팬과 달리 외양은 우리와 비슷해서 처음엔 외국인인 줄 몰랐다. 소개팅에 딱 어울릴 법한 원피스를 입은 데다 무릎 위까지 오는 흰 스타킹을 신은 모습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냥 옷 취향이 특이한 우리나라 사람인 줄 알고 무심히 넘겼다.

     

그런데 공연이 진행될수록 그분의 반응이 미묘했다. 시야제한석에 혼자 응원봉을 들고 온 걸 보면 표를 선물받아 온 일반인은 아니고 팬인 게 분명함에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해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데 옆이 너무 조용하니 조금 민망했다. (경험상 우리나라 팬들은 백이면 백 시조새 소리를 낸다)

     

멘트 타임에서도 의아함은 계속되었다. 보아가 꽤나 유머러스한 말로 나를 포함한 팬들을 잔뜩 웃게 하고 있었건만, 이상하게 옆사람은 한 번 키득거리지조차 않고 얌전히 듣고만 있는 게 아닌가. 팬이면 그다지 재미없는 말에도 웃음이 나올 텐데 왜 그러고만 있는지 궁금해 하다가, 그제서야 외국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보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른 어떤 곡보다도 <Valenti> (일본 최고 히트곡)가 나왔을 때 눈에 띄게 좋아하는 것 같았고, 한국어 노래는 하나도 따라부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앵콜을 위해 전 좌석의 팬들이 합심해 <Milky Way>를 부를 땐 전광판에 가사가 뜨는데도 따로 스마트폰을 꺼내 가사를 찾는 걸 발견하고 확신했다. 일본인이었구나.

     

일본에서 여기까지 올 정도면 팬심이 보통은 아닐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중간에 응원봉의 배터리가 다 됐는지 불빛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자, 여분의 건전지를 들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나를 비웃듯 새 건전지를 꺼내더니 금방 갈아끼웠다. 역시 그분, 보통은 아니었다.

     

한편 앞 열에는 중년의 여성과 아들인 듯한 청년이 나란히 앉았는데, 뒷줄의 두 여자 같은 골수분자는 아니고 우연히 표를 얻어 온 분들인 것 같았다. 그날 셋리스트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히트곡보다 팬들이 좋아할 수록곡 위주였던데다 일본어 노래도 많았기에 좀 걱정이 됐지만, 다행히 무난히 공연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방이동에서 잠시     

이번 콘서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빨리 끝났다는 것이다. 작년과 비교해도 너무 짧았던 것 같아 실망했지만, 그땐 20주년 기념이라 특별히 무리해서 러닝타임을 길게 잡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우리 보아 언니는 매년 콘서트를 열어줘야 한다. 다시 처음부터 공연하라는 팬들 성화에 ‘나도 힘들어~’라고 외치던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말이다.

    

만에하나 SRT 막차를 놓칠까 싶어 남편까지 나서서 시외버스까지 예매해 주었건만, 오히려 시간이 남아버렸다. 얼른 버스를 취소하고 시간을 보낼 만한 카페를 검색했다. 스벅이나 투썸 같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근처에 많았지만 다 무시하고 특색있는 개인 카페를 찾았다. 이왕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으니 아이와 함께 가기 어려운 인스타 핫플을 골라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방이동의 한 카페를 점찍고 지하철역에서 내려 걸었다. 낮에 시간을 보낸 곳과 사뭇 다르게 입시학원 간판이 즐비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낯선 동네의 한적한 골목길을 걷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계속 번화가에 있다 주택가로 들어오니 아늑한 느낌도 들었다.

     

이윽고 들어선 카페는 기대한 만큼 좋은 분위기에 커피 맛도 만족스러웠다.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이고 차분히 콘서트 후기를 찾으며 시간을 보냈다.

     


내려오는 기차에서라도 잠을 잤어야 하는데, 영 잠이 오질 않아 지친 몸에 정신만 말똥한 채로 울산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에 마신 크림라떼가 화근이었다. 집에서도 거의 자지 못한 탓에 며칠간이나 졸려서 혼났다.

     

다음 목표는 내년 1월에 고척돔에서 열릴 엔시티127 콘서트다. 덕질은 내게 언제나 새로운 장소를 체험하게 하니, 잠실과 문학과 올림픽 홀, 핸드볼경기장에 이어 고척도 처음이다. 거대한 곳이니까 아마 못해도 3층 정도는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팬클럽 인증만 놓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다 실패해서 4층밖에 못 잡는다 해도 갈 거다. 고척 4층은 찐사랑이라는데, 그 찐사랑 내가 보여주지. (그래도 2층 이하면 너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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